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상징 국화國花: 雜學考

영국 정부는 2017328일부터 기존의 1파운드 동전을 새로운 디자인의 동전으로 교체한다고 발표하였다. 1983년 발행한 동전은 위조가 쉬워 주화鑄貨 유통량 가운데 위조율이 3%에 이를 정도였다. 영국 정부의 1파운드 동전 유통량은 15억 파운드로 이 가운데 200만 파운드 규모의 위조주화가 해마다 발견되 폐기되고 있다. 이에 영국 정부는 1970년대 유통되었던 3페니 동전에 사용되었던 12각형 테두리 설계에 2파운드 동전에 사용한 은색과 금색을 배합한 형태로 만들었다. 새로운 동전의 도안圖案2015년 웨스트미들랜드의 퀸 메리 그래머 학교에 다니는 당시 15세 학생 데이비드 피어스의 작품이라고 한다.

데이비드 피어스는 동전의 도안으로 앞면에는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얼굴이 들어가고 뒷면에는 잉글랜드England, 웨일즈Wales, 스코틀랜드Scotland, 북아일랜드North Ireland를 상징하는 국화를 집어넣었다. 여기에 들어간 식물은 동전의 순서대로 장미, 리크leek, 엉겅퀴, 토끼풀이다. 이 네 국가를 상징하는 식물은 단일한 왕국을 상징하는 왕관이 감싸고 있다.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국화國花는 장미薔薇rose이다. 장미는 튜더 장미라고 불리는 랭커스터 가문의 붉은 장미와 요크 가문의 백장미가 합해진 장미이다.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 간의 잉글랜드 왕관을 놓고 싸운 전쟁을 장미전쟁이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두 가문의 문장이 각각 흰 장미와 붉은 장미였기 때문이다.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은 모두 위대한 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의 방계 가문이다. 이들은 플랜태저넷 가문의 마지막 왕인 에드워드 3세의 손자 리처드 2세가 축출된 후에 잉글랜드 왕관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이들은 돌아가면서 잉글랜드 왕관을 차지했지만 영원하지는 않았다. 웨일즈 출신의 헨리 튜더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최후의 승리자가 된 헨리 튜더는 잉글랜드의 화합을 위해 두 가문의 문장인 흰 장미와 붉은 장미를 하나로 합쳐 튜더 장미를 고안하였다. 바깥은 랭커스터 가문의 붉은 장미로 장식하고 안쪽은 요크 가문의 흰 장미로 장식한 튜더 장미는 이후 잉글랜드 왕실의 상징이면서 잉글랜드의 상징이 되었다. 랭커스터 가문의 붉은 장미가 바깥을 차지한 이유는 헨리 튜더의 모친이 랭커스터 가문 출신이고 자신의 아내인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요크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웨일즈를 상징하는 국화는 파와 비슷한 리크leek라는 식물이다.

웨일즈는 너무 일찍 잉글랜드에게 정복되었기 때문에 브리튼 왕국에서는 존재감이 희미한 나라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쉽게 포기하지 않고 있다. 웨일즈는 브리튼 연합왕국의 깃발인 유니언 잭에 자신들의 문장을 집어넣지 못했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문장-흰색과 녹색 바탕 위에 붉은 용-을 사용하고 있다. 웨일즈의 국화는 파의 일종인 리크인데 파 특유의 냄새가 진한 식물이다. 리크는 양파나 마늘과 같은 부류로 취급된다. 그래서 리크를 먹다Eat the Leek’라는 관용구는 약간의 경멸조가 담긴 뜻이라고 한다. 잉글랜드 인들이 웨일즈를 보는 시각을 엿볼 수 있는 관용구라 하겠다. 웨일즈는 리크 외에 수선화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고 있다.

31일 웨일즈의 수호성인 성 데이비드-성 다윗St. David-의 축일이 되면 여성들은 수선화 꽃을 남성들은 리크를 옷깃에 달고 행진을 한다.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국화는 엉겅퀴Thistle이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엉겅퀴의 나라 the Land of Thistle’라고도 부른다.

엉겅퀴가 스코틀랜드의 상징이 된 것은 데인족의 침략하던 시절의 전설에 연결되어 있다. 엉겅퀴 때문에 데인족의 침략을 물리쳤기 때문에 이때부터 스코틀랜드의 상징 꽃은 엉겅퀴가 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연합왕국을 구성하는 왕국 가운데 가장 늦게 까지 독립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국왕인 스튜어트 왕가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으로 추대推戴되면서 웨일즈나 아일랜드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잉글랜드의 입장에서 볼 때 웨일즈나 아일랜드는 자신들이 정복한 땅이지만 스코틀랜드는 자신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경쟁한 왕국으로 인정하였다. 실제로 연합왕국이 제국주의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스코틀랜드 인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민지의 실질적인 첨병尖兵으로 활약하였다. 엉겅퀴는 이런 스코틀랜드 인들의 강인함을 잘 나타내는 상징이라 하겠다.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국화는 토끼풀Shamrock이라고 부르는 클로버Clover이다. 아일랜드에서 선교한 성 패트릭St. Patrick은 그리스도 교리 가운데 가장 심오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삼위일체 교리를 세 잎 클로버를 가지고 설교하였다고 한다. 이후 아일랜드의 상징은 클로버가 되었다. 314일 성 패트릭의 날이 되면 아일랜드 인들은 클로버를 옷에 달고 온 거리를 녹색으로 치장하고 행진을 한다.


블랑쉬 네프호의 참사Victims of the White Ship disaster: 中世資料

White Ship/Blanche-Nef는 같은 뜻이다. 전자는 영어이고 후자는 프랑스 어이다.
1120년 11월 25일 어둠을 뚫고 노르망디의 바플뢰르Barfleur에서 잉글랜드로 한 척의 배가 출항하였다. 배의 이름은 블랑쉬 네프 호. 중세시대 바플뢰르 항구는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로 출항하는 배들이 사용한 가장 중요한 항구 가운데 하나였다. 이 배에는 잉글랜드의 왕세자인 윌리엄 애설링William Æthelin을 비롯한 많은 귀족들과 성직자들 그리고 선원들이 타고 있었다. 배는 밤중에 출발하였다. 배가 항구를 벗어나 얼마 가지 않았을 때 현지인들이 킬버Quillebœuf라고 부르는 암초에 배가 부딪쳤다.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고여서 배의 승객들이 피신할 시간이 없었다. 사고 원인은 출항 전부터 술에 취해있던 선원들의 실수, 특히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키를 잡은 키잡이의 실수였다. 이 조난 사고로 블랑쉬 네프 호에 탑승해 있던 승객들과 선원들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망하였다. 최악의 참사에 가장 상심한 사람은 잉글랜드의 헨리 1세였다. 자신의 유일한 후계자인 아들 윌리엄 애설링이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사고가 난 블랑쉬 네프 호는 당시 최신 기술과 자재를 투입하여 만든 신형의 배였다. 블랑쉬 네프 호는 범선帆船sailing ship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마스트 한 개에 사각범四角帆을 장비한 일본장선一本檣船이었다. 선수루船首樓와 선미루船尾樓가 있었지만 선체와 일체를 이룬 것이 아니라 기둥 위에 다락을 지어 올린 형태였다. 배의 외판外板은 클링커 이음을 사용하였다. 이 방식은 외판을 덧대어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시공이 쉬울 뿐 아니라 튼튼한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 방식은 대형 선박을 건조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 배의 선장인 토머스 피츠스테판Thomas FitzStephen은 자신의 배를 헨리 1세에게 제공하여 노르망디의 바플뢰르에서 잉글랜드로 돌아가는데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헨리 1세는 이미 다른 배로 잉글랜드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후였기 때문에 왕세자인 윌리엄이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왕세자가 자신들의 배에 탑승한다는 소식을 들은 선원들은 포도주를 요청하였다. 왕세자는 많은 양의 포도주를 선원들에게 하사下賜하였다. 이로 인해 선원들은 배가 항해하기도 전에 과도한 음주로 인해 취醉한 상태였다. 저녁 무렵 배가 출항할 때 대략 300여명의 승객들이 타고 있었다.
배가 출항하자 선장인 토머스 피츠스테판은 술에 취한 선원들에게 먼저 떠난 헨리 왕의 배를 따라 잡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선장인 토머스 피츠스테판은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친 스테판 피츠애일라드Stephen FitzAirard는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침공할 때 승선한 기함旗艦 모라Mora 호의 선장이었다. 바이외 테피스트리에서 모라 호는 마스트에 교황의 십자가 깃발이 걸려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런 유능한 선장이 왜 출항 전에 선원들이 만취가 되도록 방치했는지 알 수 없다. 배가 바플뢰르 해안을 약간 벗어난 지점에서 킬버Quillebœuf라고 부르는 암초에 옆구리를 부딪쳤다. 그 충격으로 배는 급속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배에서 좌측을 포트사이드port side, 우현을 스타보드사이드starboard side라고 한다. 그 이유는 항구에 들어올 때 좌측을 부두 쪽에 키starboard가 있는 쪽은 바깥쪽을 향하도록 정박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키가 손상되기 때문이었다.

선장과 승무원Captain and crew
선장 토머스 피츠스테판Thomas FitzStephen
1120년 11월 25일 노르망디의 바플뢰르Barfleur 해안에서 화이트 십White Ship/a Blanche-Nef이 침몰할 때 배의 선장이었다. 선장 토머스 피츠스테판은 스테판 피츠애일라드Stephen FitzAirard의 아들이다. 스테판 피츠애일라드는 정복왕 윌리엄이 노르망디에서 잉글랜드로 침입할 때 승선乘船했던 모라Mora 호의 선장이었다. 사고가 날 당시 헨리 1세는 먼저 잉글랜드로 떠났고 왕세자는 뒤따라 갈 예정이었다. 토머스 피츠스테판은 왕에게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부친이 선왕인 윌리엄의 잉글랜드 침공 시에 배를 몰았으며 자신도 부친과 같은 봉사를 하고 싶다고 간청하였다. 덧붙여 토머스 피츠스테판은 바플뢰르 항구에 기술이 뛰어난 50명의 수부들과 장비를 갖춘 자신 소유인 블랑쉬 네프 호로 왕을 모시면 더할 나위없는 영광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헨리 1세는 이미 다른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블랑쉬 네프 호에 승선할 수 없다고 하였다. 대신 자신의 후계자인 윌리엄 애설링William Ætheling과 서출인 링컨의 리차드 Richard of Lincoln, 마틸다 피츠로이Matilda FitzRoy, Countess of Perche와 귀족들, 다수의 수행원을 블랑쉬 네프 호에 승선하도록 허락하였다.
배가 출발하자 선장인 토머스 피츠스테판은 이미 먼저 떠난 헨리 1세의 배를 따라 잡을 것을 명령하였다. 블랑쉬 네프 호는 최근에 새로운 재료로 만들어진 빠른 배였기 때문에 헨리 1세보다 먼저 잉글랜드에 도착할 것으로 선장과 승무원들은 자신하였다. 하지만 어둠이 내리자 퀼뵈프Quillebœuf로 알려진 암초에 배의 측면을 부딪쳤다. 배는 순식간에 전복되었다. 선장인 토머스는 조치를 취할 겨를도 없이 빠르게 침몰하는 배와 함께 사망하였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키잡이Helmsman
배가 출항하기 전에 이미 취해 있었다. 아마도 이 키잡이가 술이 취해 암초가 있는 곳으로 배를 몰고 갔을 가능성이 있다. 술 취한 키잡이 역시 익사 하였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50명의 노잡이와 선원들
노잡이들은 배의 측면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배가 암초에 부딪쳤을 때 가장 먼저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선원들 역시 술에 취해 있었기에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모두 익사하였다.

배가 침몰하면서 250명의 하인과 병사들이 익사하였고, 기사와 귀족 140명이 사망하였다. 이 가운데 18명은 귀족 여성이었다.

잉글랜드 헨리 1세의 가족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애설링William Ætheling/William Adelin, Duke of Normand
헨리 1세의 아들이며 차기 잉글랜드의 왕관을 승계할 후계자였다. 윌리엄 애설링은 블랑쉬 네프 호가 침몰할 당시 배에 구비된 유일한 소형 보트를 이용할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소형 보트를 타고 아수라 속을 벗어날 무렵 윌리엄 애설링은 여동생 마틸다의 외침을 듣고 배를 되돌렸다. 이것이 실수였다. 물에 빠진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작은 보트에 매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소형 보트는 과도하게 올라탄 사람들로 인해 침몰하고 말았다. 윌리엄 애설링도 이때 사망하였다.
헨리 1세는 강단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타협을 할 줄 알았지만 굴복하지는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부친 윌리엄이 정복한 잉글랜드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함을 절감하였다. 헨리 1세는 정복자 노르만 인과 피정복자 앵글로-색슨 인의 화합을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였다.
헨리 1세는 정복지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앵글로-색슨계 주민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스코틀랜드 왕 말콤Malcolm 3세의 딸이며 에설레드의 후손인 에디스 마틸다Edith-Mathilda와 결혼을 발표하였다. 귀족들은 이 결혼이 잉글랜드 정복자인 노르만 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결혼이라고 공공연히 헨리 1세를 비난하였다. 반대로 앵글로-색슨계 국민들은 앞으로 태어날 후계자가 그들의 조상들이 색슨의 왕태자에게 붙였던 이름인 애설링Atheling으로 불리게 될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이들 부부는 국민들의 희망대로 왕태자인 윌리엄 애설링을 낳았다. 이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평화가 정착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잠정적인 평화는 바플뢰르 해안의 갑작스런 사고로 말미암아 깨지고 모든 사람들이 희망하던 평화를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퍼스 백작 마틸다 피츠로이Matilda FitzRoy, Countess of Perche
잉글랜드의 헨리 1세의 서출庶出이며 윌리엄 애설링의 이복동생이다. 마틸다의 모친은 에디스로 헨리 1세의 정부情婦 가운데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진 경우이다. 에디스의 가문家門은 알려지지 않았다. 중세시대에 서출은 항상 아버지가 동의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었다. 당시 많은 귀족의 사생아들이 인정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헨리는 마틸다를 포함해 대략 20여명의 사생아를 자신의 소생으로 인정하였다. 1103년 퍼스의 백작 로트로Rotrou III, Count of Perche와 결혼하였다. 마틸다는 퍼스 백작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로트로 백작은 결혼과 함께 잉글랜드의 헨리 1세의 봉신封臣이 되었고 주레 욱소리스jure uxoris의 권리를 소유하였다. 헨리 1세는 노르망디에 있는 로베르 드 벨렘Robert de Belleme의 몰수한 영지를 사위에게 수여하였다.
사고가 나던 날 밤 소형 보트에 탑승하여 목숨을 구한 윌리엄 애설링은 동생인 마틸다가 살려달라는 비명을 지르는 것을 듣고 배를 돌려 여동생을 구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소형 보트를 본 물에 빠진 사람들이 너도 나도 올라타려 하면서 배가 전복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윌리엄 애설링과 마틸다는 사망하였다. 
링컨의 리처드Richard of Lincoln
헨리 1세와 안스프리드Ansfride라는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서출이다. 리처드는 링컨의 주교인 로버트 블로트Robert Bloet에게 사사師事하였다. 블로트 주교는 리처드의 이복형제인 초대 글로스터 백작 로버트Robert, 1st Earl of Gloucester로 가르쳤다. 리처드는 부친인 헨리 1세를 위해 부친이 가장 혐오하던 몽포르의 아모리 3세 Amaury III de Montfort가 소유한 에브루Évreux 성의 포위 공격에서도 싸웠다. 리처드의 마지막 군사 행동은 1119년의 브레믈 전투battle of Brémule이다. 헨리 1세의 형인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의 아들인 윌리엄 클리토와 앙주 백작 그리고 프랑스 왕 루이 6세가 연합하여 노르망디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일으킨 전쟁이었다. 리처드는 부친인 헨리 1세를 도와 이 사태를 수습하였다. 헨리 1세는 이 지역의 안정을 위해 자신의 아들 윌리엄 애설링과 앙주 백작의 딸 마틸다Matilda of Anjou를 결혼시켰다.
1120년 리처드는 브레믈의 방어자defender of Brémule인 갈과 몽포르의 영주 라울 3세 Raoul II de Gael, seigneur of Gael and Montfort의 딸 아미스Amice와 약혼했다. 아미스는 블랑쉬 네프 호에 승선하지 않았다. 아미스는 남편인 리처드가 사망한 뒤 1168년까지 생존하였다. 아미스는 왕의 호위인 2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뷰몬트Robert de Beaumont, 2nd Earl of Leicester와 결혼하였다.

체스터 백작 휴 다블랑쉬의 가족The family of Hugh d’Avranches, Earl of Chester
2대 체스터 백작 리처드 다블랑쉬Richard d'Avranches, 2nd Earl of Chester
리처드는 부친인 뚱보 휴Hugh the Fat가 사망했을 때 일곱 살이었다. 1107년 체스터 백작이 되었다. 블로와의 스티븐 백작Stephen, Count of Blois과 노르망디의 아델라Adela of Normandy 사이에서 태어난 루시아-마에Lucia-Mahaut와 결혼하였다. 루시아 마에의 모친인 아델라는 윌리엄 정복왕의 딸이다. 헨리 1세는 체스터 백작 휴와는 처삼촌 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바플뢰르 해안에서 사망하였다.
루시아-마에Lucia-Mahaut (Matilda)
왕의 조카이자 2대 체스터 백작 리처드 다블랑쉬의 부인이다.  블로와 백작 스티븐Stephen, Count of Blois의 딸이며 후에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 스티븐Stephen, King of England의 여동생이다.
오뛰 다블랑쉬Ottuel d’Avranches
휴 다블랑쉬Hugh d’Avranches의 서출이다. 휴는 체스터 백작 리처드 다블랑쉬의 이복형제이다. 오뛰는 왕의 아들들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제프리 리델Geoffrey Ridel
왕실 재판관이며 휴 다블랑쉬의 딸 게바Geva의 남편이다. 리처드 다블랑쉬의 처남이다.

라이글의 영주Seigneurs de l’Aigle
엠의 자작 길베르 라이글Gilbert d’Aigle, Vicomte of Exmes
퍼스 백작 조프리Geoffrey II, Count of Perche의 차녀次女 줄리에타Juliette와 결혼하였다.
조프리 드 라이글Geoffroy de l'Aigle
엠의 자작 길버트 라이글과 줄리에타의 아들. 사고가 났을 때 근처의 바위에 기어올라 구조를 기다렸지만 기력이 다해 사망함.
앙게눌프 다이글Engenulf d’Aigle
제프리 드 라이글과 형제간이다.

왕의 식솔들
윌리엄 비고드William Bigod
노퍽의 로저 비고드의 아들이다.
귀술프Gisulf
헨리 2세의 사악한 대신.
모뒤의 로베르Robert I of Mauduit
헨리 2세의 시종장chamberlain이며 모뒤의 윌리엄William I of Mauduit의 아들이다. 로베르의 형제인 윌리엄William II은  8대 워릭 백작 윌리엄 모뒤William Maudit, 8th Earl of Warwick의 증조부이다.
집사執事들Stewards, 시종들chamberlains, 컵베어cupbearers-궁중연회에서 술따르는 임무를 맡은 사람, 다수의 관리들이 사망하였다.
술에 취에 탑승 승객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무질서한 수병들 역시 살아남지 못했다.
 
잉글랜드의 귀족들
이들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이 없지만 많은 귀족들이 승선했고 사망했다.
에버시의 월터Walter of Everci
리처드 안스킬Richard Anskill
버크셔Berkshire의 지주landowner 아들이자 후계자.
로버트 맥콘뒤Robert Mauconduit-귀족이다.
몰린의 휴Hugh of Molines

노르망디의 귀족들
퐁테샹프레이의 붉은 랄프Ralph the Red (Ralph le Roux) of Pont-Echanfray
레자드리Les Andelys에서 리처드를 구해낸 인물이다. 그의 두 번째 아내도 이 배에 함께 승선한 것으로 부인다. 붉은 랄프는 로버트 드 레이시Robert de Lacy의 서출이라고도 한다.
이보와 윌리엄 그랑매스닐Ivo II and William de Grandmesnil
이보 드 그랑매스닐의 아름다운 두 아들이라고도 불렀다.
루들란의 윌리엄William of Rhuddlan
로버트 루들란Robert of Rhuddlan의 아들이며, 이보와 윌리엄 그랑매스닐과는 사촌 간이다.

성직자
헤리퍼드의 대부제 조프리Geoffrey, Archdeacon of Hereford
윌리엄William
코탕스의 주교 로저Roger, Bishop of Coutances의 아들이다. 이 배에 윌리엄의 형제와 3명의 조카가 함께 승선하였다. 이들 모두 사망하였다.

황제의 가족
디트리히Dietrich/Theodoric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5세의 친척 하인리히의 아들이다. 하인리히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여동생인 독일의 아그네스Agnes of Germany의 아들이다.

유일한 생존자
루앙Rouen의 정육업자 베롤드Berold
블랑쉬 네프 호가 침몰했을 때 가까운 암초에 기어올라 밤새 버틴 끝에 구출되었다. 그와 함께 암초에 매달려 있던 제프리 드 라이글은 기진맥진 한 끝에 사망하였다.

이 참사의 끝은 우울하다. 사고가 난 다음날 왕세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헨리 1세는 이후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노인 특유의 심술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평생을 통해 변덕이 심했지만 유능한 군주였다. 헨리 1세는 밀어붙일 때와 물러설 때는 아는 군주이기도 했다. 그의 이런 면은 1107년 웨스트민스터 협약에서 잘 나타난다. 성직임명권으로 교황과 불화를 겪던 헨리 1세는 타협안으로 왕인 자신이 성직임명권을 포기하는 대신 임명되는 주교와 수도원장은 축성 전에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해야만 했다. 이 문제는 후에 캔터베리 대주교 베케트와 헨리 2세의 갈등에서 표면화하게 된다. 하지만 왕세자가 사망하자 그는 물러설 줄을 모르고 밀어붙이기만 하였다. 이런 고집으로 결국 헨리 1세 사후 왕국이 분열되었다.
왕세자가 사망하자 헨리는 1125년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5세에게 시집갔다가 과부가 된 딸 마틸다를 잉글랜드로 불러들였다. 헨리 1세는 귀족들 앞에서 앞으로 자신에게서 아들 후계자가 생기지 않는다면 딸 마틸다를 후계로 삼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리고 이를 기정사실화 하기 위해 귀족들에게 헨리1세와 마틸다에게 충성 서약을 강요하였다. 1128년 잉글랜드에 돌아온 마틸다가 프랑스로 건너가 앙주 백작 조프루아와 결혼하였다. 마틸다는 과부였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결혼했던 황후였다. 이런 그녀가 백작의 아들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매우 못마땅해 하였다. 이런 이유로 결혼 초기 마틸다와 조프루아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결혼이 둘 사이에 손실보다 이득이 더 많음을 알게 되면서 결혼을 유지하였다. 이 둘 사이에서 세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이것이 잉글랜드에게는 불행이었다.
잉글랜드 귀족들은 헨리 1세가 사망하면 마틸다와 프랑스 인 조프루아에게 충성을 맹세해야할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귀족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1133년 마틸다가 아들 헨리를 낳았다. 말년의 헨리 1세에게 그리 좋은 소식이 없었지만 이 소식은 그를 약간 기쁘게 하였다. 그리고 2년 후 헨리 1세가 사망하였다. 이제 마틸다는 남편 조프루아와 함께 잉글랜드로 들어와 왕관을 받을 계승자로 지명되었기에 즉위식만 남은 상황이었다. 이때 마틸다의 사촌인 블로아의 스티븐이 런던에 먼저 들어가 왕관을 차지하였다. 블로아의 스티븐이 왕위 찬탈에 성공한 것은 잉글랜드 귀족들의 우유부단한 처신 때문이었다.
마틸다와 헨리는 스티븐에게 전쟁을 선언하고 양측은 잉글랜드의 왕관을 향해 돌진하였다.
귀족들은 헨리와 스티븐 사이에서 힘의 균형을 저울질 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한 취하였다. 왕은 군림했지만 절대적이지 못했다. 귀족들은 스티븐에게 버림 받으면 마틸다에게 붙었고, 마틸다가 내치면 스티븐을 지지했다.
블로아 백작 스티븐은 정복왕 윌리엄의 피가 사분의 일이 섞인 반면 플랜태저넷 가문의 헨리는 팔분의 일밖에 섞이지 않은 형국이었기에 혈통 상으로는 스티븐이 우세하였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왕관은 혈통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잉글랜드의 왕관은 처음부터 기회와 명민함 그리고 무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절대로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헨리 역시 외할아버지 헨리 1세나 고조 외할아버지 윌리엄 정복왕처럼 무력과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였다. 그리고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야망이 큰 어머니가 있었기에 혈통의 약세를 극복하고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대만 계엄 해제 공고 雜學考

總統部 公報

總統令

中華民國 七十六年 七月十四日

准 立法院 中華民國 七十六年 七月八日(76)

台院字 第一六四一號

 

宣告 臺灣地區自 七十六年七月十五日 零時起 解嚴.

 

總統 蔣經國

行政院長 兪國華

國防部部長 鄭爲元


둠즈데이북Domesday Book 용어(2): 中世資料

11.쟁기ploughs

쟁기는 맷돌과 함께 중세 초기의 대표적인 동력원이었다. 그런데 유럽의 쟁기는 남부와 북부에서 각각 다른 형태를 사용한다. 남부의 경우 삽을 대형화한 것과 같은 쟁기를 두 마리의 소가 끌게 한다. 이 쟁기는 땅을 깊게 갈이 뒤집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지중해 연안의 건조한 지역에서는 깊게 땅을 갈아엎지 않기 때문에 수분의 과잉증발過剩蒸發을 막는 효과가 있다. 이런 남부식 쟁기는 토지가 습한 북부지역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북부 유럽에서는 남부 유럽에서 사용하는 쟁기보다 더 크고 무거운 대형 쟁기를 사용하였다. 이 쟁기는 크기 때문에 쟁기 당 소 여덟 마리가 필요했고 바퀴가 달려 있었다. 이를 밭갈이 쟁기조 plough team라고 한다. 이 쟁기의 장점은 토지를 깊게 갈아 뒤집어엎기 때문에 유럽 남부의 쟁기처럼 두 번 쟁기질 할 필요가 없었다. 척박하고 습기 찬 북부에서는 이 쟁기가 효과적이었다. 잉글랜드에 대형 쟁기가 들어온 것은 아마도 데인 족의 침입과 거의 같은 시기로 보고 있다. 둠즈데이북의 기록을 보면 잉글랜드에는 두 종류의 쟁기가 풍부하였다고 한다. 둠즈데이북에 따르면 조사 당시 잉글랜드에 대략 8만 조 이상의 쟁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둠즈데이북에 나오는 쟁기는 무거운 쟁기로 이 쟁기 하나에 밭갈이 쟁기조plough team 소가 제대로 배당되었다면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했을 당시 대략 65만 마리의 소가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12. 랜드 퍼Land for

라틴어 테라...카루키스terra ... carucis의 번역어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쟁기질하는 땅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종종 경작지ploughland나 팀랜드teamland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플로우랜드ploughland는 경작지耕作地를 의미하지만 잉글랜드의 역사에서는 경작지단위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경작지ploughland120에이커의 토지를 뜻한다. 비르가타virgata이기도 하다. 이 정도의 토지는 소 여덟 마리가 한조가 되어 일 년 동안 경작하는 넓이이다. 팀랜드teamland 역시 한 무리의 소나 말이 경작하는 토지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둠즈데이 북에서 어떤 다른 통계학적인 단어보다 많이 언급되고 있다.

13. 헌드레드村落Hundred

이 단어는 카운티county의 주된 행정구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재정, 군사, 법률 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봉토fief에 정착한 사람들은 이 단위에 의해 지리적 위치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헌드레드의 판사判事들은 달마다 중앙에서 만나 정치적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둠즈데이 북에서 이들의 목소리가 종종 기록되어 있다. 카운티county나 셔shire이 구성단위라고 할 수 있다.

 

14. 小作地vill

라틴어 빌라villa. 라틴어 빌라는 소작지小作地를 뜻한다. 둠즈데이 북에서 이 단어는 가장 작은 행정상의 단위이다. 남부의 패리쉬parish-교회의 교구를 기본으로 한 행정단위-나 혹은 북부의 타운쉽township-대교구를 기본으로 한 행정단위-과 동등한 단위이다. 촌락村落으로 부를 수 있다. 교회의 행정단위는 대교구大敎區-교구敎區-본당本堂-공소公所로 세분된다. 보통 한 국가는 소수의 대교구로 크게 나누고 여기에 대주교大主敎가 상주한다. 대주교가 상주하는 대교구는 교구로 나눠진다. 교구에는 주교主敎가 상주한다. 교구 아래 우리가 성당이라고 부른는 본당이 위치한다. 본당에는 신부神父가 거주한다. 공소는 말 그대로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곳을 말한다. 공소는 그 지역의 신부가 관할하며 정기적으로 순환하며 관리한다.

 

15. 에이커acre

이 단어는 밭을 뜻하는 라틴어 아게르ager에서 유래되었다. 일반적으로 하이드의 1/120 넓이에 해당된다. 이 단어는 둠즈데이 북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이 넓이는 1/40, 1/48, 1/60 하이드로 사용된다.

 

16. 하이드hides

이 단위는 데인로Danelow 이외의 대부분 지역에서 발견되는 단위로 농민의 땅 소유 단위이면서 과세부과의 단위이다. 이 단어는 고 영어 hid에서 유래된 것으로 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땅의 크기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주에서는 120에이커acre1하이드hide로 계산한다. 하지만 남서부에서는 40, 48 혹은 60에이커를 1하이드로 계산하기도 한다.

 

17. 슬렁sulung

라틴어 솔리누스solinus에 해당한다. 이 용어는 세액부과稅額賦課 단위와 농부의 소유지所有地를 이르는 말로 오직 켄트Kent지역에서만 확인된다. 슬렁sulung과 쟁기yoke는 쟁기질ploughing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슬렁은 쟁기의 고 영어인 술sulh에서 나왔고 쟁기yoke는 한 쌍의 겨리 소pair of yoked oxen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슬렁에는 네 개의 쟁기가 포함되어 있다. 다른 지역에서 이 용어에 상당하는 말은 쟁기yoke이다. 이 용어는 하이드hide나 카루카테carucate가 관습적으로 사용된 지역에서도 두 번 정도 나타난다. 1슬렁sulung은 대략 240에이커 정도이다.

 

18. 버게이트virgate 地積單位

라틴어 비르가타virgata에서 유래한다. 지적단위地積單位이다. 이 용어는 데인로지역과 켄트 외곽지역의 대부분 지역에서 과세단위와 농부의 토지소유 단위로 나타나고 있다. 이 단위는 하이드의 1/4로 대략 30에이커에 해당된다. 데인로 지역에서 2옥스강oxgang에 해당한다.

 

19. 펄롱furlong

라틴어 콰랜티나quarentina의 번역이다. 콰랜티나는 40을 의미한다. 길이의 단위로 1/8마일이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201.17m이다. 펄롱은 콰랜티나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40퍼치perch-220야드-이다. 경작구역耕作區域으로 번역된다. 1펄롱은 한 쌍의 황소가 쉬지 않고 쟁기질 할 수 있는 거리이다. 4로드×1펄롱이 1에이커가 된다. 4로드는 1체인chain이다.

 

20. 퍼치perch

라틴어 페르티카pertica의 번역이다. 페르티카는 고대 로마의 단위이다. 페르티카는 길이를 재는 막대ox-goad를 의미한다. 길이의 단위이면서 면적의 단위이기도 하다. 둠즈데이북에서는 길이의 단위가 될 때는 5.5야드이다. 이를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5.03m가 된다. 면적의 단위가 될 때는 1에이커의 1/4의 면적이다. 이것은 1/4 하이드와 같은 면적이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25.3이다.


둠즈데이북Domesday Book 용어(1): 中世資料

1. 쿼터quarter

쿼터는 일반적으로 1/4을 의미하지만, 둠즈데이 북에서는 펄롱furlong으로 사용된다. 펄롱은 경작구역耕作區域으로 번역된다. 펄롱은 1마일의 1/8이다. 1마일mile이 대략 1.609이므로 펄롱은 200m 정도가 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쿼터나 펄롱 모두 현재의 10진법 체계에서의 1/41/8이 아니라 모두 60진법 혹은 12진법의 1/4, 1/8이라는 점이다. 펄롱은 고대 영어 풀랑furlang에서 유래되었는데 풀랑은 밭고랑의 길이를 뜻한다. 이 플랑의 길이는 대략 농부가 쟁기로 한번 밀고 가서 되돌아오는 거리의 반-201.17m-에 해당된다.

 

2. 로드rod

라틴어 비르가virga의 번역어이다. 로드는 라틴어 비르가타virgata-영어로는 버게이트virgate-에서 유래된 것으로 기록에서는 보통 v 혹은 virg로 표시된다. 비르가Virga나 비르가타Virgata는 어근의 의미가 같다. 비르가Virga는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 권위의 표시로 가지고 다니던 버드나무 다발로 묶은 막대기-파스케스fasces-를 의미한다. 로드는 1에이커-4046.8-1/4-1011.70-을 의미하고, 버게이트는 하이드hide-60에서 120에이커acre-1/4 30에이커acre를 뜻한다. 파스케스에서 파시즘이란 용어가 나왔다. 로드는 길이의 단위일 때는 5.5야드-5.03m-이고, 면적의 단위일 때는 버게이트virgate-1/4 하이드hide로 약15에서 30acre-라고 부른다. 1acre는 대략 가로와 세로가 64m가량 된다. 4로드가 1에이커가 된다. 15에이커를 1옥스강oxgang이라고 한다. 1옥스강은 말 그대로 한 마리의 황소가 일년에 갈아엎을 수 있는 토지 면적을 의미한다. 비르가타는 30에이커로 2옥스강이 된다. 카루카타는 120에이커로 4비르가타 혹은 120옥스강이 된다. 라틴어

 

3. 세스테르sester

라틴어 섹스타리움sextarium의 번역어이다. 섹스타리움은 1/6을 의미한다. 이 단위가 용량으로 사용될 때는 1/6 콘지우스congius-3.25-이고, 곡식 들이로 사용될 때는 모디우스modius-7-1/16 이다. 이 도량 단위는 변화가 심해 잘 사용되지 않았지만 둠즈데이북Domesday Book에서 왕실과 전국의 표준량으로 인용되기 시작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세스테르는 둠즈데이북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용량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세스테르에는 큰 세스테르와 작은 세스테르가 있었다. 이 세스테르 단위를 사용하는 것으로는 보리, 밀가루, , 귀리, 라이, 소금, 밀과 포도주 등이 있다. 세스테르는 1/6 콘지우스일 때는 541그램 정도 이고, 1/16 모디우스일 때는 437그램이다.

 

4. 스틱stick

고대 영어 스티시안stician에서 온 단어이다. 이 말은 찌르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위는 일반적으로 영주領主에게 뱀장어를 바칠 때 사용한 용어이다. 25마리의 뱀장어가 1스틱이었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두름처럼 사용된 말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은 우리의 계산으로 한 두름은 열 마리씩 엮어서 두 줄이 된다. 장어는 중세 민물 생선 가운데 귀족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었다. 장어는 비타민 A가 풍부하여 보양식품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잉글랜드의 헨리Henry 1세는 장어를 과식過食하여 죽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당시 왕족들과 귀족들에게 인기 있던 식품이었다.

 

5. 호쿠스hoccus

라틴어 호쿠스hoccus를 차용한 단어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둠즈데이 북에서는 이 단어를 제염소製鹽所와 연관 지어 사용하고 있기에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잉글랜드의 염전鹽田은 동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잉글랜드 동부의 기후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기후를 보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습기 많은 기후와 구별되었다. 그래서 잉글랜드에서 동부의 이스트 앙글리아East Anglia지역에 염전이 많았다.

 

6. 리그league

라틴어 레우카leuca의 번역어이다. 레우카는 갈리아 인들이 사용하던 거리 단위로 대략 3.25정도 이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리그는 대략 12펄롱-1펄롱이 대략 201m,1리그는 약2.4-이었다. 하지만 윌트셔Wiltshire에서는 15펄롱-3.1- 이상의 거리를 의미했고, 우스터셔Worcestershire에서는 고작 4펄롱-800m-이었다. 둠즈데이 북에서 리그league는 가끔 마일mile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1리그를 6펄롱으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로 볼 때 리그의 단위는 당시에는 통일된 것이 없이 제각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앰버amber

라틴어 암브라ambra에서 유래되었다. 이 단어는 물건을 잴 때 사용하는 단위이다. 하지만 용량容量은 알 수 없다. 둠즈데이북에서는 고작 두 번만 나타난다. 이 두 번 모두 소금의 무게를 재는 경우에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염전지역에서 사용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참고로 amber는 호박琥珀을 의미하는 단어와 철자가 같지만 뜻이 다르다. 준보석인 호박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앰버는 아라비아어 안바르anbar-이 단어는 용연향龍硯香을 의미한다-에서 유래한다. 라틴어로 준보석 호박은 수키눔succinum으로 표현한다. 이 단어는 나무의 즙이나 액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단위를 뜻하는 앰버amber은 호박이란 준보석을 뜻하는 단어와 철자는 같지만 연관성은 없다.

 

8. 아르펜트arpent

이 단어는 프랑스 어에서 온 것으로 둠즈데이북에서는 포도원葡萄園을 언급할 때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둠즈데이북에서 모두 스물여섯 번 언급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스물한 번이 포도원, 다섯 번이 초지草地와 삼림지森林地를 설명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모두 윌트셔Wiltshire 지방의 장부에만 나타난다. 당시에 다른 지역에서는 포도원의 측량 단위로 오직 에이커acre만을 사용하였다. 이 단어와 연관된 다른 것은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윌트셔Wiltshire는 잉글랜드 남부 지역에 위치해 있다.

 

9. 카루캐이트carucate

라틴어 카루카타carucata의 번역어이다. 데인로Danelaw 카운티county의 대부분에서 공적公的인 세금稅金은 카루캐이트carucates와 보베이트bovates 안에서 결정되었다. 카루카타는 라틴어로 쟁기를 뜻하는 카루카caruca에서 보베이트bovate는 소를 뜻하는 라틴어 보스bos에서 왔다. 둠즈데이북에서 일반적으로 한 해 쟁기질을 하는 한 무리의 소는 여덟 마리가 한조를 이루었다. 보통 이 여덟 마리의 황소가 일 년 농사를 지었다. 그러므로 카루카테에는 여덟 마리의 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여덟 마리의 소가 한 조가 되어 일 년 동안 쟁기질 하는 땅을 경작지耕作地ploughland-이 농지는 대략 120에이커, 1하이드-라고 불렀다. 카루카테carucate, 보베이트bovate, 플로우랜드ploughland, 그리고 쟁기질 하는 한 무리의 소는 경작을 하는데 있어 하나의 개념으로 연결되어 있다.

 

10. 보베이트bovate

라틴어 보바타bovata의 번역어이다. 보바타는 황소를 뜻한다. 데인로Danelaw 카운티count 대부분에서 발견되는 소유 농지의 단위이다. 이 단위는 세금을 매기기 위해 토지 면적을 평가하는 단위이기도 하다. 토지면적 단위인 보베이트는 소를 의미하는 라틴어 보스bos에서 왔다. 둠즈데이북에서 일 년 동안 밭을 가는 평균적인 밭갈이 쟁기조plough team는 여덟 마리의 황소이다. 카루카테carucate를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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