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오레의 요아킴Joachim of Fiore: 中世資料

피오레의 요아킴 Joachim of Fiore1135년경에 태어나 1202330일 사망한 이탈리아의 신학자이며 성직자이다. 요아킴은 성지순례후 전 생애를 신에게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코라초의 베네딕트회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후일 수도원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수도원을 시토파에 귀속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허락이 지지부진하자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피오레의 산 지오반니San Giovanni in Fiore에서 새로운 수도회를 창립하였다.

1202년 세상을 떠날 때 요아킴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인물 중의 하나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의 사후 그에게 적대적인 자들이 그의 명성을 실추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요아킴의 저작은 방대하고 난해한 새로운 성서 주석서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빌린 많은 위작문서들이 유포되기도 했다.

피오레의 요아킴 사후 그의 종말론과 역사론에서 영감을 받고 그를 추종한 무리를 요아킴파Joachimites라고 부른다. 요아킴파가 신봉했던 피오레의 요아킴의 사상을 살펴보면서 요아킴파가 어떻게 이단으로 빠지게 되었는지 살펴본다. 피오레의 요아킴은 성 프란시스코와 동시대 인물로 성 프란시스코가 물질과 세속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극단적인 청빈淸貧을 선택한 반면 요아킴은 인간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약속하였다. 그가 새로운 시대를 약속한 근거는 신약이었다.

피오레의 요아킴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이 삼위일체성三位一體性이 아니라 사성四性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즉 피오레의 요아킴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은 세 개의 위격位格들과 네 번째 형태인 하느님의 본질本質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에게 있어 이 네 번째 형체形體는 교회와 그의 지체肢體들처럼 하나의 윤리적 집합集合으로 보았다. 피오레의 요아킴은 이런 독특한 시각으로 요한복음 1722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을 해석하였다. 그의 취지趣旨는 하느님을 재차 인간을 위해 개방시키고 내재적 삼위일체를 돌파하고 체험의 영역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었다.

피오레의 요아킴은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에 따르면 인류는 세 개의 시대 속에서 생활한다. 첫 번째 시대인 구약舊約의 시대에 인류는 성부聖父를 대하게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대가 아니라 상태status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 시대는 율법律法의 시대이며 육신肉身의 시대며 평신도平信徒와의 결혼의 시대다. 두 번째 시대인 신약新約의 시대는 성자聖子가 지배한다. 이 시대는 제도制度로서의 교회敎會의 시대요, 성직자聖職者들의 시대이다. 요아킴은 마태복음1,1-17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용하여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 기간이 42세대이고, 한 세대가 30년으로 계산하여 제2의 시대는 1260년에 끝나고 바로 성령의 시대가 도래 한다고 보았다. 이 시대는 다시 세 번째 시대인 성령聖靈의 시대에 의해 소멸消滅된다. 이 시대는 순수한 영성적靈聖的 시대요, 요한John적 시대이다. 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교회가 되고, 산상설교山上說敎는 온전히 성취된다. 이 시대에서는 누구나 수도자修道者이다. 피오레의 요아킴의 이 지상왕국地上王國의 관념은 정치적으로는 나치의 제삼의 천년제국千年帝國에까지 영향력을 끼쳤고 철학적으로는 관념론과 공산주의의 유토피아 사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요아킴은 성령의 시대가 확립되기 전에 적그리스도가 3년 반 동안 지상에 군림하고 그리스도교도는 가장 가혹한 최후의 시련을 맞게 된다고 보았다. 이 시기에 높은 덕성을 지닌 교황과 설교 수도자들과 명상 수도자들로 이루어진 영적 병사들viri sprituales이 적그리스도의 공격에 맞서 저항한다. 이후 영적인 수도자들이 인도하는 제3의 시대는 명상생활에 최대의 가치가 주어진다.

피오레의 요아킴의 이런 사고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 Fourth Council of the Lateran에서 거부되었다. 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회는 사성四性Quaternitas은 존재치 않으며 오직 삼위일체성만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타자他者alius이기는 하지만, 타자적인 것aliud은 아니라는 정식을 이어받았다. 세 위격에 있어서 각 위격은 하나의 본질quaedam summa res이다. 그 때문에 모든 역사는 하나의 원천을 가질 뿐이고, 각각 하나의 위격位格에 해당하는 서로 다른 여러 시기로 분할될 수 없다고 언명言明하였다.

피오레의 요아킴의 주장이 교회에 의해 거부됨으로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주장한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격間隔을 다시 강조하였다. 교회의 이런 주장은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삼중적三重的 관계를 체험할 수 없게 되고 오직 하나의 본질성, 신성神性만이 인간들과 상관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여기서 더 나아가세 위격들은 영원으로부터 그리고 동일한 양식으로 존재하며 삼위일체성은 만물의 한 존재원리라고 언명하였다. 이 결과 창조된 존재와 하느님 삼위일체 사이의 유사성은 비유사성보다 훨씬 미소하게 되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이 상이성이 더 크다고 기술하기 않고는 이 양자 사이에 이러한 유사성이 있다고 기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이런 언명은 피오레의 요아킴이 강조하였던 인간의 역사속에 하느님과의 관계가 부정되고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극이 다시 강조되었다. 이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하느님의 삼중적 관계를 체험할 수 없고 오직 하나의 본질성本質性 즉 신성神性만이 인간들과 상관相關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교회는 단일성을 위해 삼차원적인 신약성서의 하느님 체험을 부인하였다. 이는 하느님의 관계성을 기능이 없는 것으로 단죄한 비싼 대가였다. 이제 신학은 세 위격들은 세 개의 신들이 아니라 한 분 하느님이시다. 이 세 위격들은 하나의 실체, 하나의 본질성, 하나의 본성, 하나의 신성, 하나의 무량성無量性, 하나의 영원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관계들의 상호간에 상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외에는 모든 것이 하나이다.” 1442년 플로렌스 공의회의 이런 선언은 즉자적 하느님 안에서 전적인 단일성이 그의 본질성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세 위격들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상위성이 아니라 유일한 구별성이 허용되었다. 예를 들면 출산하는 것과 출산되고 있는 것은 상반되는 운동들이고 따라서 구별된다.

요아킴의 주장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제3의 시대였다. 3의 시대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교회 성직자들의 반발을 받았다. 반면 수도자들과 민중들은 요아킴의 사상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요아킴은 교회의 전통적인 제도인 교황, 성사, 성직자제도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여기에 큰 비중을 두지는 않았다. 요아킴에 따르면 성령에 의해 지배될 미래의 교회에서는 더 이상 성사가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성사聖事가 필요 없다면 사제직司祭職도 더 이상 존속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요아킴은 사제직은 소멸되지는 않지만 교회의 지도권은 영적인 병사들에게 귀속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 지배권은 순순한 영적인 것으로 외적인 교회 지배권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요아킴은 이 3의 시대는 성령의 인도로 완성될 것으로 보았다. 이는 약간 위험한 생각으로 구원 역사에서 그리스도가 차지하고 있는 중심적인 역할을 간과한 것이었다.

당시 교회는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정점頂點을 향해 가고 있었다. 교권과 속권의 대립에서 승리를 거둔 교회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유일한 절대자로 군림하게 될 것이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요아킴의 주장은 교회의 지도자들의 생각과 대립되는 것이었다. 요아킴의 이런 생각은 점점 세속적으로 비대해 지는 교회에 대한 비판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수도자들과 일반 민중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1209년 아시시에서 프란치스코에 의해 수도회가 창립되었다. 후일 성인으로 시성된 프란치스코는 요아킴의 사상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프란치스코는 청빈과 겸손과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추종자들에게 새로운 그리스도의 재림再臨體現했다는 찬사를 들었다. 이런 이유로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한때 이단의 의심을 받기도 했지만 프란치스코 본인이 교회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천명함으로서 교회의 의심을 불식시켰다. 그럼에도 프란치스코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가기도 하였다. 한 예로 1254년 보르초 산 도미노의 게라르도는 피오레의 요아킴이 저술한 세 권의 텍스트를 해석하고 주석을 달아 영원한 복음에의 서장이란 책으로 간행하였다. 여기서 게라르도는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다했고, 머지않은 1280년에 새로운 영적인 교회인 성령의 교회가 출현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를 계기로 신학자들은 탁발托鉢 수도회의 위험성과 이단성을 공격하였다. 사실 교회는 피오레의 요아킴이 사망한 후에 그의 사상에 대해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결과 1215년 요아킴의 삼위일체론이 이단으로 선고되었고 게라르도의 간행물이 큰 파란을 일으킨 후 교황 알렉산드로 4세는 1263년 요아킴의 중심적 사상을 모두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세권의 텍스트는 <신약성서와 구역성서의 조화에 관한 책Liber Concordiae Novi ac Veteris Testamenti > <요한의 묵시록 설명Expositio in Apocalipsim> <10개의 줄이 달린 현악기Psalterium Decem Cordarum>이다.

교회의 단죄에도 불구하고 요아킴의 저작들은 필사筆寫를 통해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 필사본을 통해 요아킴의 주장은 많은 이단 사상과 앞으로 태동할 종교개혁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출처: 미르치스 엘리아데, 세계종교사상사3, 이학사(2005), 177-182/ G.하센휘틀, 하느님-과학시대를 위한 신론 입문, 성바오로(1984), 260-273 참조.>


고정관념固定觀念 혹은 관념고정觀念固定: 蓼齋記


컬트cult란 숭배, 예찬, 열광, 일시적 유행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 속에 컬트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90년대 우리의 영화계는 컬트열풍에 휩싸였다. 컬트를 모르면 영화를 모른 것처럼 이해되기도 했다. 솔직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컬트를 컬투 삼총사이상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할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영화적인 코드가 컬트가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비디오 가게 먼지 속에 뭍혀있던 브레이드 런너를 찾아보고 재미없는 이레이저 헤드를 보았다. 우리는 과연 컬트를 이해했을까?

어떤 영화가 컬트가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특이한 조건이 꼭 첨부되어야 한다. 그것은 대중의 열광적인 환호보다는 소수의 마니아에게 어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디애나 존스시르즈나 ‘007’은 컬트영화로 인정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컬트 영화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을 프리메이슨이나 헤르메스 비밀결사단과 같이 자기들만의 유대감으로 뭉쳐있기 때문이다. 이 감정은 자신들을 선택된 자, 축복받는 자로 여기면서 문화적 우월감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컬트의 문화적 코드는 획일적인 사회가 붕괴되면서 다원화 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사회현상이다. 미국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은 사회적 변혁에 큰 역할을 한 사건이었다. 여성들은 군대에 나간 남성을 대신하여 전시경제를 이끌었고, 이로 인해 전후에 여성의 발언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흑인들 역시 미국인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가함으로서 변화의 기운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미국의 흑인 병사들이 유럽에 갔을 때 유럽 여성들이 미국보다 인종적 편협함이 적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런 유럽의 여성들과 미국 흑인 병사들 사이의 자연스런 성적 접촉은 이들이 귀국하면서 폐쇄적이었던 미국 흑인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변혁의 기운은 결국 1960년대 미국의 흑인들이 공민권 운동을 하면서 백인들과 월남전 반대운동에 자연스럽게 접속함으로서 1968년 대변혁을 일으키는데 일조하게 되었다. 이는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격렬한 반항이 컬트의 싹을 자라게 하는 촉매의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컬트 영화는 기존의 상식을 기묘하게 비트는데 있다. 한 예로 리쎌 웨폰1에서 멜 깁슨과 대니 글로버가 경창 지하 사격장에서 권총사격을 하는 장면을 보자. 여기서 영화적 컨셉을 멜 깁슨이 사격을 잘하고 대니 글로버는 어설프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둘의 사격장면을 자세히 보면 영화적 화면과 반대의 생각을 하게 된다. 멜 깁슨은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눈을 감는다. 사격교육에서 격발시 눈을 감는다는 것은 목표물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기에 지양해야 될 자세이다. 반면 대니 글로버는 시종일관 방아쇠를 당기면서 눈을 감지 않고 있다. 컬트 영화 애호가들의 감각은 이런 것이 아닐까?

컬트영화는 사회성과 정치성을 반영하기도 한다. 여기서 반영이란 찾아냄이란 단어로 대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컬트란 소수의 영화광들이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숨겨져 있는 암호문을 찾아내는 것은 소수의 몫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 소수의 노력 덕분에 컬트 영화의 대부분을 이해하면서 그 테두리 속에 갇혀 버린다. 이렇게 볼 때 컬트 영화광들의 사유는 무한 자유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테두리 속에 갇혀 일정한 형식에 의해 해석되는 것은 더 이상 컬트가 아니다. 이는 컬트를 빙자한 유사제품일 뿐이다. 컬트는 우리에게 익숙하면서 우리를 가르치거나 교화하려는 대중매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컬트는 비밀 결사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면서 철저한 그들만의 분위기 속에 감춰져 있다. 이는 대중음식점에서 파는 일반의 평균적인 입맛에 맞춘 음식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컬트의 컬트라는 음식은 심각한 불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컬트는 전통적이기 보다는 실험적인 퓨전음식과 유사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컬트란 음식은 전통주의자나 패스트 푸드 열광자에게 기피대상이 된다. 그 누구도 이 생경한 음식에 자신의 입맛을 도전하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통주의자나 패스트 푸드 열광자들은 이 음식이 아니라도 먹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컬트의 이런 특성 때문에 언제나 소수의 대변자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불행하게 이 소수는 거대한 현실을 물결을 바꿀 힘은 없다. 하지만 언제나 컬트는 주류의 목구멍에 박힌 가시가 되어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의 안일함과 고정관념에 일침을 가한다. 주류가 이 가시를 뱉어내거나 삼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 예로 에드우드 감독이 패티시즘이나 동성애를 영화로 표현했을 때 당시 대중들에게는 생경함과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이런 표현은 더 이상 생경하거나 혐오스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두에게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만으로도 컬트는 뮨화적 고정관념의 산소호흡기가 아닐까....

 

*2004년에 쓴 글을 약간 수정하여 다시 올림니다. 


몽세귀르Montségur:1243-1244(4) 中世資料



몽세귀르 함락과 이후

1243년 베지에 공의회의 결정으로 몽세귀르의 박멸이 결정된 이후 알비 십자군은 카타리파의 근거지인 몽세귀르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물론 1241년에도 툴루즈 백작 라몽 7세가 프랑스 국왕과 가톨릭 교회의 압력으로 몽세귀르 성채를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시 몽세귀르 성채에는 500여 명의 카타리파가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교회에서 파견한 종교 심문관인 귀욤 아르날William Arnald과 에티엔 드 상 티에리Stephen de Saint-Thibéry가 몽세귀르에서 파견한 50명의 무리에게 아비뇨네Avignonet에서 종자들과 함께 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국왕은 이단의 근거지인 이 요새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1243년 세네샬 휴 드 아르키Hugues des Arcis가 인솔하는 1만 명의 국왕 군대가 몽세귀르로 접근하였다. 몽세귀르 성채에는 1백 명의 전사들과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완덕자Parfait와 난을 피해 성에 피신해 온 민간인이 있었다. 카타리파 전사들의 사령관은 라몽 드 페레유Raymond de Péreille였다. 그는 미레포와의 피에르 로제Pierre-Roger de Mirepoix의 사촌이었다. 난민의 대다수는 카타리파 신도Credentes였다. 이들은 대부분 성채 밖에 있는 산속 동굴과 움막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알비 십자군 사령관 휴 드 아르키는 성채를 공략하기 전에 먼저 성으로 반입되는 식수와 물품을 차단하기 위해 성채 주변을 포위하였다. 방어자들 역시 자신들의 공급원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방어자들은 다행스럽게도 다수의 지역 주민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소수의 증원 병력이 도착하였다.

몽세귀르Montségur는 라틴어 몽스 세큐루스mons securus에서 유래由來하였다. 뜻은 안전한 언덕/산이란 의미이다. 이 단어가 오크어로 흘러가 몽 세귀르mont ségur가 되었다. 몽세귀르는 카르카손 남서쪽 80에 위치해 있는데 랑그독 Languedoc과 미디 피레네Midi-Pyrénées 지역의 중간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1204년 몽세귀르는 피레네 산맥 남쪽 국경의 방어를 위해 요새화되었다. 해발 1,200m 산꼭대기에 건설된 몽세귀르 성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채城砦가 되었다. 몽세귀르 성은 랑그독 언어로 포그pog라고 부르는 암반 위에 건설하였다. 포그란 단어는 산꼭대기peak, 언덕hill, 산맥mountain을 의미한다.

알비 십자군에게 가장 극렬하게 저항한 세력은 툴루즈 백작이었다. 1215년경이 되면 랑그독 지역의 대부분이 국왕의 군사들에게 점령되고 남은 것은 이 지역 최대의 대귀족인 툴루즈 백작뿐이었다. 툴루즈 가문은 초기 프랑스의 여섯 귀족 가문 가운데 하나로서 랑그독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가문이었다. 초기 여섯 가문은 다음과 같다. 노르망디 공작Duke of Normandy, 아키텐 공작Duke of Aquitaine은 기엔 공작Duke of Guyenne으로도 불린다. 부르고뉴 공작Duke of Burgundy, 플랑드르 백작Count of Flanders, 샹파뉴 백작Count of Champagne 그리고 툴루즈 백작이다. 이들 외에 렝스 대주교-공작Archbishop-Duke of Reims, 랑의 주교-공작Bishop-Duke of Laon, 랑그르 주교-백작Bishop-Duke of Langres, 보베의 주교-백작Bishop-Count of Beauvais, 살롱의 주교-백작Bishop-Count of Châlons, 노이용의 주교-백작Bishop-Count of Noyon을 합하여 12 귀족이라고 부른다. 이 가운데 랭스 대주교-공작이 가장 수위에 위치한다.

거대한 석회암 암벽으로 보호되어 있는 성채를 공격하는 일은 어려운 과정이었다. 성채로 통하는 좁은 통로를 이용하여 공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네샬 휴 드 아르키는 여러 차례 공격을 가하였지만 성채 가까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휴 드 아르키는 산악지방인 바스크 출신의 용병을 고용하여 성채 공격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산악지방 출신의 바스크 용병들은 성채 동쪽면의 안전한 지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곳에 성벽을 공략할 수 있는 공성기와 투석기를 설치할 수 있게 되면서 공격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성벽 바깥과 동굴에서 생활하고 있던 난민들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격자들은 외보外堡barbican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하였는데 아마도 내부의 배신자가 알려준 것으로 보인다.

12443월 투석기가 성채 가까이 접근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 안쪽 거주 지역으로 바위덩어리를 쏘아 댔다. 성안의 방어자들은 외보에 들어온 공격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공격을 했지만 실패하였다. 외보 탈환에 실패한 방어자들은 세네샬 휴 드 아르키에게 투항의 신호를 보냈다. 휴 드 아르키는 협상을 신속하게 마무리 지었다. 그만큼 몽세귀르 성채 공격이 힘들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협상내용은 카타리파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주로 완덕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속하게 성을 떠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2주간의 휴전이 선언되었다. 성에 남은 카타리파 신자들은 2주 동안 기도와 금식을 하면서 보냈다. 이들은 카타리파의 의식인 콘솔라멘툼consolamentum/오크어로 콘솔라망consolament을 받았다. 카타리파의 콘솔라멘툼은 세례인 동시에 종부성사이며 완덕자들에게는 서품식이 된다. 콘솔라멘툼은 죽음에 임박해서 행해진다. 의식은 요한복음을 낭독하고 기도문 복되도다, 성부를 경배합니다Benedictus, Adoremus pater’를 암송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일 죽어가는 카타리교도가 콘솔라멘툼을 받은 후에 회생한다면 완덕자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카타리파 교도들은 일생을 통해 단 한번의 콘솔라멘툼을 받게 되는 데 그것은 죽음에 임박해서이다. 카타리파들은 그들의 예배 장소가 따로 없었다. 카타리 교도들은 가르침의 장소인 그들의 집이 있을 뿐이었다. 이 만인의 집은 개방되었으며 특별한 장식이나 조각이 없었다.

1244316210명에서 215명 사이의 카타리 교도들이 카타리파 주교 베르트랑 마트리Bishop Bertrand Marty의 인도 아래 성을 떠나 아래로 내려왔다. 이들은 화형주火刑柱도 원하지 않았다. 이들 모두는 자발적으로 장작더미 속으로 들어가 똑바로 선 채로 불길 속에 자신을 맡겼다. 이들이 화형된 후 성 안의 나머지 사람들은 떠나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들 가운데는 성의 방어 사령관이었던 라몽 드 페레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로 여기에 전설이 개입하게 된다. 카타리 교도들이 투항하기 전에 몇몇 완덕자들이 카타리파의 보물과 서적을 가지고 성을 탈출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1249년 툴루즈 백작 라몽 7세가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파리 조약에 따라 루이 9세의 동생인 푸아티에의 알퐁스가 툴루즈 백작의 작위를 승계하였다. 이로서 프랑스 남부 지역은 외형적으로 평화를 찾게 되었다. 로마 교회와 프랑스 왕은 자신들이 의도했던 바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카타리 이단은 완전히 근절된 것이 아니었다.

1256년 카타리파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케리비 성Château de Quéribus이 함락되었다. 코르비에르 산맥 Corbières mountains 해발 728미터 정상에 서있는 이 성은 카타리파의 마지막 근거지였다. 이 성은 몽세귀르가 함락되자 생존한 카타리파들이 아라곤 국경 근처인 이곳으로 모여와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255년 프랑스 군대가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몰려오자 카타리 교도들은 싸움을 하지 않고 스페인의 아라곤과 북부 이탈리아의 피에몬테Piemonte 지역으로 도피하였다. 이 지역은 카타리 신앙에 관대한 지역이었다. 또한 이 지역은 옥시탄 언어Occitan language 사용권이었다. 케리비 성은 이른바 카르카손의 다섯 아들들Five Sons of Carcassonne 가운데 하나인 성이었다. 이 다섯 성은 아귈라Aguilar, 페이르페르튀즈Peyrepertuse, 테름므Termes와 퓔오렝Puilaurens이다. 이들은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국경을 방어하는 중요한 다섯 성채였다. 1659년 피레네 조약Treaty of the Pyrenees으로 국경선이 이동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루시옹Roussillon과 페르피냥Perpignan을 얻으면서 국경선이 남으로 이동하였다.

케리비 성의 함락으로 남 프랑스의 고지대와 오크 지역의 영주들의 영지를 장악함으로서 프랑스 왕은 비로소 이 지역의 패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270년 성왕 루이Saint Louis가 사망하였다. 1226년 즉위하여 44년간 프랑스를 다스렸던 루이 9세는 부친으로부터 경건한 신앙심과 격렬함을 물려받았다.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십자군도 2번이나 참전한 루이 9세는 존엄왕 필립이 추구했던 강력한 프랑스를 위해 헌신하였다. 루이 9세가 사망했을 때 그는 자신이 상속받은 것보다 훨씬 위대한 왕권을 아들에게 물려주었고, 이때부터 카페 왕가의 왕은 세습 군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왕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최고회의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 무엇이든지 집행할 수 있는 신의 직계 대표자로 생각하게 하였다.

1271년 툴루즈 백작 푸아티에의 알퐁스가와 툴루즈 백작의 무남독녀인 잔느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랑그독은 합법적으로 프랑스 왕의 영지로 귀속되었다.

1275년 경이 되면 프랑스에서는 더 이상 카타리파 주교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교회와 프랑스 왕의 합작으로 시작된 알비 십자군 운동은 서로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군사적 권한이 없는 교회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나 독일 제후, 프랑스 왕이나 잉글랜드 왕, 로렌 공작이나 부르고뉴 공작의 군사력을 이용해 프랑스 남부의 카타리파를 일소하였다. 반면 프랑스 왕은 교회와 합작으로 프랑스 남부를 자신의 영지로 삼을 수 있었다. 대신 프랑스 남부는 사회적 대청소를 당함으로서 독립적인 지위를 영원히 상실하였다. 이 알비 십자군이 프랑스 남부에는 재앙이었을지 모르지만 중세사회를 재건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교회는 40일 간 이교도와 싸우는 십자군 봉사를 한다면 모든 죄를 용서한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였다. 이 제안은 그동안 교회의 가르침을 어긴 영주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즉 교회는 군사력을 제공받는 대신 죄의 용서를 통해 봉건영주들의 사회적 명망과 위신을 회복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이런 교회의 파격적인 제안에 응한 사람들은 중세의 봉건제도 속으로 안착을 하였다. 반면 이를 거부한 영주들은 교회의 반대편에 있어야만 했다. 이는 종교가 근간인 사회에서 큰 약점일 수밖에 없었다.

알비 십자군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프랑스의 필립 2세는 성직자와 부르주아 계층과 손을 잡은 최초의 국왕이었다. 프랑스 국왕은 철저한 실리 계산을 통해 알비 십자군을 조직한 반면 프랑스 국왕의 목표가 된 툴루즈 백작이나 아라곤 국왕은 카타리파 교도가 아님에도 북부 프랑스의 군대가 남쪽으로 진격함에 따라 이에 대한 반발로 카타리파에 가담하여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남부의 카타리파를 응징하면서 이단심문을 동원하여 개인에게 주어진 신앙의 자유를 말살시켰다. 1229년부터 로마교황청은 중요한 도시마다 도미니코회 수도자 2명으로 구성된 법정을 2명의 심문관들은 이단의 색출을 위해 일반조사와 개인소환이란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였다. 일반조사란 지역 주민 전체를 모이게 한 다음 개인적으로 공술서를 쓰게 하는 것이었다. 개인소환이란 용의자를 법정에 소환하여 엄격한 선서를 하게 한 다음 개인이 알고 있는 이단에 관한 모든 것을 진술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가혹한 물리적 방법이 사용되었음은 불문가지이다.

1321년 이탈리아에서 최후의 카타리파 주교가 체포되었다. 이탈리아 지역의 카타리파는 프랑스보다 더 오래 존속했지만 이를 기점으로 더 이상 카타리파는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1326년 카르카손에서 프랑스 최후의 카타리파 교도가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몽세귀르Montségur:1243-1244(3) 中世資料

몽세귀르Montségur 전야前夜

1209년 시몽 드 몽포르Simon IV de Montfort가 이끄는 알비 십자군이 랑그독 지역을 침입하여 베지에와 카르카손을 함락시키고 1244년 몽세귀르가 함락될 때까지 기간은 프랑스 남부지역에서 카타리파가 근절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덤으로 프랑스 남부지역 고유문화도 함께 사라졌다.

카르카손이 허무하게 함락된 이듬해 시몽 드 몽포르는 미네르브Minerve를 공격하였다. 미네르브는 몽타뉴 누아르Montagne Noire와 카날 드 미디Canal du Midi 사이에 있는 카타리 교도의 도시로 이 전해 베지에 학살 소식을 들은 카타리 교도들이 피난 온 도시였다. 알비와 카르카손의 자작이 된 시몽 드 몽포르는 6주 동안 이 마을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시몽 드 몽포르는 4대의 투석기를 동원하여 3방면에서 미네르브를 공격하였다. 세스Cesse 강 골짜기 위에 자리잡은 미네르브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 마을은 이중의 성으로 둘러싸여있었고 미네르브 자작 귀욤Viscount Guilhem of Minerve의 지휘 아래 2백 명의 용맹한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다. 미네르브가 함락된 것은 이 요새로 흘러들어가는 식수원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미네르브가 항복하였을 때 가톨릭으로 개종改宗을 거부하는 카타리 교도 140명이 화형 당하였다.

미네르브의 이단을 척결한 시몽 드 몽포르는 카타리 교도의 성으로 알려진 남쪽의 테름므 성Château de Termes으로 방향을 틀었다. 카타리 교도인 라몽Ramon de Termes이 소유한 이 성은 가파른 벼랑 위에 건설되었다. 삼면이 절벽으로 방어되는 요새인 이 성은 시몽 드 몽포르가 4개월 간 포위공격을 시도한 끝에 함락시켰다. 이 성은 공격자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지만 건조한 여름과 가을을 지탱할 식수 저장 물탱크가 비게 되면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후일담으로 시몽 드 몽포르가 사망한 뒤 이 성의 전 소유주인 라몽이 성을 다시 찾으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 성은 프랑스 왕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랑그독 지역을 지배하던 툴루즈 백작은 852년부터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던 루아르그 백작Counts of Rouergue의 방계 가문으로 툴루즈에 자리 잡고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툴루즈를 통치하였다. 툴루즈 백작의 시작은 프랑크 왕국의 봉신封臣이었으나 얼마 안가 독립된 세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툴루즈 백작 가문은 쿼시Quercy, 루아르그Rouergue, 알비Albi와 님Nîmes 때로는 셉티마니아Septimania와 프로방스 Provence까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들의 선조 가운데 라몽 4세 백작Count Raymond IV은 십자군에 참가하여 트리폴리 공국County of Tripoli을 세우기도 하였다. 툴루즈 백작 가문의 전성시대는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친 시기였다. 알비 십자군이 결성되어 이 지역을 공격하자 1229년 프랑스 국왕에게 굴복하였다. 워낙 저항이 격렬하였기에 프랑스 국왕이 이 지역을 실질적de facto으로 지배한 것은 1271년부터이다. 당시 알비 십자군에 대항하여 싸운 남부의 대귀족은 툴루즈 백작, 카르카손의 트랑카벨Trecavel 가문, 푸아 백작count of Foix , 코맹주 백작Counts of Comminges과 베아르 자작viscounts of Béarn 등이다.

알비 십자군이 랑그독 지역을 공격하자 툴루즈 백작 라몽Raymond VI, Count of Toulouse은 격렬히 저항하였다. 라몽 6세의 외조부는 프랑스의 루이 6세이고 외삼촌은 프랑스의 루이 7세였다. 1194년 부친의 뒤를 이어 툴루즈 백작의 작위를 승계한 라몽은 방대한 영지를 소유한 만큼 통제에도 문제가 있었다. 라몽은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바쳐야할 의무를 지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봉신으로 프로방스를 소유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헨리 2세는 부인을 통해 아키텐을 지배하면서 툴루즈 백작 기욤William IV, Count of Toulouse의 딸이며 할머니인 필리파 Philippa of Toulouse를 통해 툴루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였다. 아라곤의 알퐁소Alfonso II of Aragon는 아라곤의 새로 재정복한 영토를 식민지화하면서 이곳으로 이민을 장려하면서 랑그독 지역의 일에 간섭하였다.

툴루즈에서 라몽은 정치적 자치를 유지하면서 세금을 면제받고 자치 영토에 대한 그의 보호는 확대되었다. 당시 이 지역에는 카타리파가 많았지만 라몽은 이들에 대해 별다른 제제制裁를 가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태도는 교회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라몽은 카타리 이단을 믿지는 않았지만 카타리 이단에 대해 크게 억압하지도 않았다. 이는 그가 처한 정치적 상황에 따른 대처 방식이었다.

1213년 툴루즈 근처인 뮈레Muret에서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알비 십자군과 아라공의 왕이며 바르셀로나 백작인 페드로 2Pedro II de Aragón가 이끄는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페드로 2세가 전사하였다. 시몽 드 몽포르는 랑그독 지역을 침입하여 카타리 교도를 물리치면서 이 지역을 프랑스 왕에게 귀속시켰다. 오크 문명은 12세기 남프랑스와 스페인 북동지역, 이탈리아 서부지역에서 번성하였다. 이 지역은 랑그독Laguedoc, 아키텐l’Aquitaine, 가스코뉴Gascogne, 오베르뉴‘Auvergne, 리무쟁Limousin, 도피네Dauphiné, 카탈루냐Catalogne, 이탈리아 알프스 지역을 아우른다. 시몽 드 몽포르가 툴루즈 지역을 침입하자 툴루즈 백작 라몽은 쫓겨났다. 이에 라몽 6세는 자신의 매형인 아라공 왕 페드로 2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페드로 2세는 이를 받아들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툴루즈 근교의 뮈레에서 시몽드 몽포르와 결전을 치뤘다. 페드로 2세는 우월한 병력을 유지하였음에도 패배하였고 자신도 목숨을 잃었다. 이 전투는 알비 십자군이 치룬 마지막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성 도미니코는 십자군을 위해 묵주기도를 받쳤다고 한다.

1215년 라테라노 총 공의회에서 이단 심문령을 채택하였다. 이 공의회에는 70명의 총대주교와 대주교, 4백 명의 주교들, 8백 명의 사제들과 수도원장과 평신도들이 참여하였다. 이 총 공의회에서 그리스도 국가에 대한 교황의 지도권이 선언되었다. 총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성변화聖變化 교리가 채택되었다. 성변화란 미사 중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성별하여 거양擧揚하는 순간,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이다. 두 번째는 서방교회가 동방교회에 우선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서방 교회가 전 세계 그리스도교의 대표자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세 번째는 세속권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주교는 정기적으로 자신의 관할구管轄區를 사목방문하도록 명시하였다. 네 번째는 사제들의 도덕성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교황은 사제의 독신을 지지하고 음주와 도박, 사냥과 사치를 금하였다. 다섯 번째는 성직세습을 금지하였다. 여섯 번째는 평신도는 일년 한번은 사제에게 고백성사를 보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사제는 신자들이 이단에 빠졌는지 알아보게 하였다. 일곱 번째는 교회가 이단으로 판정한 사람은 세속 군주의 법정에 넘겨 재판을 받도록 하였다. 교회가 이단으로 확정한 사람을 세속 군주가 처벌하지 않으면 파문하고 그래도 저항하면 교황은 군주의 신민들이 저항하도록 명령을 내릴 수 있게 하였다. 절대권력을 누리던 이노켄티우스 3세는 총 공의회 이듬해인 1216년 사망하였다. 그의 후임으로 호노리우스 3세가 선출되었다.

1218년 알비 십자군의 군사적 지도자인 시몽 드 몽포르가 툴루즈를 공격하다 사망하였다. 시몽 드 몽포르는 1213년 뮈레 전투에서 승리한 후 랑그독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시몽 드 몽포르는 툴루즈 백작, 베지에와 카르카손 자작으로 임명되었지만 영주민들은 시몽 드 몽포르를 자신들의 영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툴루즈의 시민들은 1217년 전 툴루즈 백작 라몽 6세의 아들이며 정당한 상속자였던 라몽 7세에게 툴루즈의 성문을 열어주었다. 시몽 드 몽포르는 반란의 싹을 잠재우기 위해 저항의 머리인 툴루즈를 점령하려 하였다. 121710월 시몽 드 몽포르는 툴루즈를 되찾기 위해 포위 공격을 시작하였다. 아홉 달 동안 툴루즈를 공격했지만 시몽 드 몽포르는 이 도시를 점령할 수 없었다. 운명의 날인 1218625일 공격을 독려하던 시몽 드 몽포르는 성 안에서 발사한 투석기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 즉사하였다. 그의 죽음을 기록한 연대기 작가에 의하면 날아오는 커다란 돌멩이에 맞아 눈과 뇌장腦漿, 치아, 이마, 턱 등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피와 더러움으로 얼룩진 채 땅에 떨어져 즉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점령했던 카르카손의 주교좌主敎座 성당인 생 나자레Saint-Nazaire에 묻혔다. 시몽 드 몽포르의 시신은 후에 아들인 몽포르 라모리Montfort l'Amaury가 이장하였다. 카르카손 주교좌 성당에는 시몽 드 몽포르가 묻혔던 자리에 묘지석이 붙어있다. 시몽 드 몽포르가 죽음으로서 알비 십자군은 정열적이고 탐욕스러운 위대한 군 지휘관을 잃었다. 이 죽음으로 알비 십자군은 5년 동안 소강상태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프랑스의 사자왕 루이Louis VIII the Lion1219년부터 1226년 계속된 군사작전 역시 실패하였다. 사자왕 루이는 툴루즈 백작 라몽 6세의 복귀를 허락하고 그의 아들 라몽 7세를 후계자로 인정하였다. 툴루즈 백작 라몽 6세는 그의 통치 지역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사자왕 루이는 1223년 즉위하여 1226년 사망하였다. 그는 부친인 존엄왕 필립Philip Augustus을 대신하여 알비 십자군에 참가하였다.

1221년 카타리 파 이단과 격렬하게 투쟁한 도밍고 데 구스만Dominic de Guzmán 수도자가 사망하였다. 그는 123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성 도미니코의 후계자들은 앞으로 중세 유럽에서 이단 심문관으로 활약하게 된다.

1222년 푸아Foix 백작 라몽 로제Raymond-Roger와 툴루즈 백작 라몽 6세가 사망하였다. 라몽 6세의 뒤를 이어 라몽 7세가 작위를 승계하였다. 툴루즈는 여전히 이단인 카타리파에 관대한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1223년 프랑스의 존엄왕 필립이 사망하고 왕세자인 사자왕 루이가 즉위하였다. 공식적인 이단 심문소가 설립되었다. 이는 교회와 세속의 왕권이 이단에 강력하게 대응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카타리파의 중심지역인 랑그독 지역으로 이단 심문관들이 파견되어 지역의 영주들과 마찰을 빚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지역의 영주들에게 이단에 강력하게 대응할 것을 요구하였다.

1224년 알비 십자군은 툴루즈에서 일시 퇴각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강력한 요구와 프랑스 왕국의 이익을 위해 새로 즉위한 사자왕 루이가 군대를 이끌로 툴루즈 원정을 실행하였다. 툴루즈가 완강히 저항하자 1226년 교회는 툴루즈 백작 라몽 7세를 파문하였다. 이듬해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사망하고 그레고리우스 9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레고리우스 9세는 강력한 교황이었던 이노켄티우스 3세 교황의 조카로 도미니코 수도회에 이단 심문권을 부여한 인물이다. 도미니코 수도자들이 가진 종교재판의 막강한 권리-사도적 권한-는 주교들의 권한과 마찰을 빚어 불만을 야기하였지만 교황은 도미니코 수도회를 끝까지 옹호하였다.

1227년 카타리파 주교 카스트르의 귈라베르Guilhabert de Castres는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카타리파가 장악하고 있던 성 가운데 하나인 샤토 드 피우스Château de Pieusse에서 일 백 여명의 카타리파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카타리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라세스Razes의 주교직을 설정하기로 결의하였다. 십자군 초기에 아젱Agen, 롱베르Lombert, 생 폴Saint Paul, 카바레Cabaret, 세르비앙Servian, 몽세귀르에 6명의 주교가 있었다.

1229년 툴르즈 백작 라몽Raymond VII, Count of Toulouse과 프랑스 국왕 루이 9Louis IX of France는 파리 근교 모Meaux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루이 9세는 후일 교회로부터 시성諡聖되어 성루이라고 불린다. 당시 루이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모친인 카스티야의 블랑쉬 Blanche of Castile가 조약 체결에 크게 관여하였다.

툴루즈 백작 라몽과 루이 9세는 모에서 만나 1209년에 시작된 알비 십자군의 공식적인 종결에 동의하였다. 두 사람은 라몽의 딸 조안Joan, Countess of Toulouse과 루이 9세의 동생인 푸아티에의 알퐁소Alphonse, Count of Poitiers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하였다. 툴루즈 백작 라몽의 유일한 후계자인 딸 조안과 결혼할 알퐁소는 주레 욱소리스Jure uxoris가 되면서 라몽이 사망하면 조안의 남편으로서 툴루즈의 지배자가 됨을 의미하였다. 이 조약을 체결하면서 라몽은 자신의 영지 가운데 동쪽 지방을 루이에게 프로방스 지역은 교황에게 양도하였다. 이 협약으로 옥시탄Occitania 지역의 정치적 자치가 종언을 고하였다. 옥시탄 지역은 오크어Lenga d'òc를 사용하는 지역을 말한다. 오베르뉴, 가스코뉴, 랑그독, 리무쟁, 프로방스 등지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프랑스어의 yes”를 오크oc로 말하느냐 오일oil로 말하느냐에 따라 오크어와 오일어로 구분된다. 라몽 백작은 자신의 영지 반을 루이에게 양도하게 되었고 나머지 영지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권리를 보유하게 되었다. 라몽이 사망한 뒤에 그의 영지는 사위인 알퐁소가 차지하고, 알퐁소가 사망하면 프랑스 국왕에게 영지가 귀속되게 되었다. 그리고 툴루즈의 성채城砦는 순차적으로 해체하고, 카타리파에 대한 정치적 보호도 철회하도록 하였다. 이 결과 이 지역의 카타리파들은 정치적 보호 세력을 잃게 되었다. 파리 조약의 결과 수 세기 동안 옥시탄 지역에 인정되었던 정치적 자치가 사라지고, 카타리파의 보호막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프랑스 왕이었다. 그는 이 지역까지 자신의 통치권을 확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1232년 파리 조약 이후 남부 프랑스에서 카타리 이단에 대한 대대적인 척결작업이 전개된다. 이에 위기를 느낀 카타리파는 주교 카스트르의 귈라베르Guilhabert de Castres의 주도하에 몽세귀르Montségur로 들어가 거점을 형성하였다. 몽세귀르의 성채는 1204년 몽세귀르의 영주인 라몽 드 페레유Raymond de Péreille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몽세귀르는 카르카손 남서쪽 80에 위치해 있는데 랑그독 Languedoc과 미디 피레네Midi-Pyrénées 지역의 중간에 위치한 요충지로 피레네 산맥 남쪽 국경의 방어를 위해 요새화되었다. 해발 1,200m 산꼭대기에 건설된 몽세귀르 성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채城砦가 되었다. 몽세귀르 성은 랑그독 언어로 포그pog라고 부르는 암반 위에 건설하였다. 포그란 단어는 산꼭대기peak, 언덕hill, 산맥mountain을 의미한다. 몽세귀르Montségur는 라틴어 몽스 세큐루스mons securus에서 유래由來하였다. 뜻은 안전한 언덕/산이란 의미이다. 이 단어가 오크어로 흘러가 몽 세귀르mont ségur가 되었다.

재건축된 몽세귀르 성은 카타리파 이론가이며 주교인 카스트르의 귈라베르에 의해 카타리파의 본거지이며 종교의 중심지가 탈바꿈하였다. 1165년에 카스트르에서 태어난 귈라베르는 1193년 판야우스Fanjeaux에서 카타리파를 지도하였다. 1209년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의 무자비한 카타리파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자 귈라베르는 카타리파 성직자들을 안전한 샤토 드 몽세귀르로 철수시켰다. 귈라베르는 1223년과 1226년 사이에 카타리파 교회의 툴루즈 주교이자 가장 높은 지도자인 완전한 자Parfaits가 되었다. 그는 교황청과 카타리파 간에 신학적 논쟁이 시작되었을 때 카타리파를 대표하여 논쟁을 주도하였다. 1206년 몽레알Montreal에서 마지막 신학적 토론과 1207년 알비 십자군이 시작될 중간 시기에 귈라베르와 성 도미니코가 조우遭遇한 것으로 보인다.

귈라베르는 1229년부터 1232년까지 샤토 뒤드 베주 Château du Bézu에 상주하면서 박해와 위협 속에서도 랑그독 지역의 성과 마을을 사목 방문 하였다. 1232년 귈라베르는 몽세귀르의 영주인 라몽 드 페레유에게 의탁하였고, 라몽은 귈라베르에게 몽세귀르 성의 소유를 허락했으며 그곳에 카타리파 교회의 주교좌domicilium et caput가 자리잡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몽세귀르에 카타리파의 지도자들과 난민들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귈라베르는 1240년 사망하였고 후임으로 베르트랑 마르티Bartrand Marti가 주교직을 승계하였다.

1241년 툴루즈 백작 라몽 7세는 몽세귀르 성채를 공략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듬해 라몽 7세는 또 다시 프랑스 국왕에 대항하여 반란을 시도하였다. 이 와중에 아비뇨네 지역에서 종교 심문관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들 종교 심문관들은 몽세귀르에서 파견된 카타리파 무장단원이었다. 이렇게 되자 1243년 베지에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여 몽세귀르의 이단을 완전히 박멸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몽세귀르Montségur:1243-1244(2) 中世資料


카르카손Carcassonne

당시 유럽은 십자군 운동과 교황권의 확립으로 그리스도교 발전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십자군을 통해 그리스도교는 유럽이란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주도한 로마 교황청은 서유럽에서 자신의 권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또 성지聖地 탈환을 위한 십자군 운동은 신앙심이 기층基層까지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고 민중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민중들은 십자군 운동을 통해 확대된 유럽의 신앙심을 교황청이 내면적인 성숙보다는 교회조직의 강화에 주력하는 것을 보고 반발하였다. 유럽을 떠나 성지를 다녀온 사람들은 돌아와 자신이 속했던 이전 사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이들 가운데 소수는 진실한 신앙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생활화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성직자에게만 부여된 특권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이들은 성직자보다 더 신심信心이 깊은 평신도에게도 이런 권리가 부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은 교황 중심의 교권주의와 신분제-성직자, 귀족, 평민-로 재편되어가는 사회와의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이러한 소수의 생각은 결국 교회와 교황의 권위에 대한 비판과 도전으로 이어졌고 여러 사회 운동이 출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것이 발도파와 카파리파였다.

특히 카타리파는 교회의 권위를 철저히 부정하였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의 미사, 원죄론, 성육화와 삼위일체를 거부하였고 성서도 오직 신약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청빈과 금욕만을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 카타리파는 성모 마리아를 천상의 존재로 인정하여 여성에게도 완전한 자라는 지도자의 역할을 부여하였다. 이는 여성을 배제하고 통제하려는 기존 교회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막달라 마리아를 성 베드로보다 더 중요시 여겼는데 이는 예수가 부활하였을 때 그 기적을 처음 목격한 사람이기 때문 이었다. 이는 가톨릭이 사도 베드로를 통해 정통성이 계승되는 것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었다. 또 카타리파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통해 모든 것을 이분법적인 논리로 이해하였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과 상충되는 것이었다.

이런 카타리파가 득세한 지역은 남 프랑스 지역이었다. 특히 피레네 산맥을 중심으로 프랑스 남서부의 랑그독 지방, 에스파냐 동부의 카탈루냐 지방에 널리 퍼져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지역 외에 라인란트와 저지대 지역, 북부 이탈리아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이들이 이 지역에서 지역 제후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프랑스 남부는 여전히 북 프랑스의 카페 왕가와는 별도의 독립적인 대제후가 통치하고 있었고,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허울뿐인 제국 속에 수많은 군소 제후국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북 이탈리아 역시 독립적인 도시국가로 나눠져 있었고, 에스파냐는 국토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아랍 세력과의 투쟁으로 통일된 왕국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 결과 군소 제후들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기존의 종교와 제도에 비판적인 카타리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카타리파는 지방의 토착문화와 관습도 존중하면서 지역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와 권위주의적 문화와 관습은 자유기질이 강한 이 지역 사람들의 거부감을 일으켰다. 이 지역의 대중들을 이단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을 돕기 위해 파견되었던 도밍고 펠릭스 데 구스만Domingo Félix de Guzmán-후일의 성 도미니크-은 오히려 이들의 생활에 감동할 정도였다. 그는 이 지역의 카타리파 사제들의 헌신적인 삶과 금욕적인 모습에서 가톨릭 사제의 현재적 위치를 가늠하게 되었던 것이다.

카타리파의 사제인 완전한 자들에게는 가톨릭 사제를 능가하는 권위가 부여되었다. 이들은 일반 카타리파 신자-봉솜Bones Hommes-보다 더 엄격한 생활을 했고 일 년에 세 차례씩 장기간 단식을 준수했다. 카타리파 사제들은 장남長男filius major과 차남次男filius minor이라 부르는 보좌의 도움을 받았다. 카타리파 사제가 사망하게 되면 그 자리는 장남이라 부르는 보좌가 계승하였다. 이들의 이런 전통은 고대 그리스도교 교회의 전통에 입각한 것이었다.

왜 카타리파가 랑그독 지방에서 일반대중들에게 환영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는 종교적 측면보다 사회정치적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당시 이 지역을 지배했던 것은 게르만법이 아니라 로마법이었다. 이런 연유로 북프랑스에서는 장자법이 시행되어 부모의 재산은 장남이 상속받았지만 남프랑스에서는 토지가 자식들에게 고르게 분배되었다. 이는 단일한 중앙집권이 불가능하고 지방분권적인 기능이 가동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봉건영주들은 억압보다는 타협을 통해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였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종교적 관용이 팽배하여 다른 지역에서 박해 받거나 거부당한 공동체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실제로 나르본 지방에서는 12세기에 유대교 랍비가 저술한 모세 오경에 대한 신비한 해석서가 출판되었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투르바두르가 유행하였다. 이런 분위기는 엄격하고 통제적인 북부와는 다른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더 복잡하였다. 과거 이 지역은 비시고트visigoth-西고트-가 지배한 지역이었다. 비시고트들은 정통 가톨릭을 신봉하는 대신 아리우스 이단을 선택한 집단이었다. 이후 이 지역은 이런 저항 정신이 계승되면서 권위에 대한 저항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 지역 최대 실력자는 툴루즈 백작이었다. 툴루즈 백작을 중심으로 카르카손 자작, 베지에 자작, 푸아 백작, 비고르 백작이 혈연과 정치적으로 얽혀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침해하는 로마 가톨릭의 추기경, 주교, 수도원장과 같은 성직자들에 대한 거부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이 교회 권위를 바탕으로 일반 대중들을 지배하려 하였다면 카타리파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추구하는 세속적 가치를 철저하게 경멸하였다. 가톨릭 고위성직자들이 북부의 영주와 같은 존재였다면 카타리파 성직자들은 일반 대중의 보시와 적선에 의지해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이었고 그 누구도 개인 재산이나 봉토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이런 카타리파 고위성직자들의 이런 검소한 생활은 지역 제후들 뿐 아니라 가톨릭 하위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 지역의 대귀족들은 로마가톨릭에 대한 견제의 의미로 카타리파를 용인하였다. 카타리파는 이 지역의 제후들의 보호를 받았지만 자신들의 어떤 정치적 권력도 구성하지 않음으로서 봉건영주들의 신임을 얻었다. 이는 봉건영주들을 교회 아래 두려는 가톨릭과는 대조적인 면이었다.

이 지역 상위 군주인 툴루즈 백작은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툴루즈 백작은 자신의 이웃인 잉글랜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툴루즈 백작은 그의 정치적 재정적 기초를 제공하는 일반 대중들이 신봉하는 종교를 탄압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교회와 프랑스 국왕의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툴루즈 백작의 영토는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의 소유인 아키텐과 인접해 있었다. 즉 잉글랜드에서 프랑스 남부로 이어지는 앙주 제국의 끝 부분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이는 툴루즈가 잉글랜드의 영향력 아래 들어간다면 프랑스는 영원히 동서로 분단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국왕에게 있어서 이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프랑스 국왕은 이단이란 실마리를 이용하여 교회와 손을 잡게 된다.

카타리파가 이 지역에서 가톨릭교회를 능가하는 교세敎勢를 확보한 것은 로마 교회의 타락이 큰 몫을 하였다. 특히 고위 성직자들의 타락은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 마저 육체의 쾌락에 절어 영적개발을 하지 않아 하느님의 말씀을 선교하고 지도할 능력이 결여된 주교들의 모습에 탄식하였을 정도였다. 성직자들의 부도덕성과 성직매매는 신자들이 교회를 멀리하게 하는 이유였다. 당시 많은 사제들이 결혼하였거나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극히 일부 사제들은 처자를 부양하기 위해 술집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사제들은 자신이 속한 교회의 후원자들에게 보답해야 했기에 세례, 혼인, 병자 성사와 미사성제聖祭에 금품을 요구하였다. 또 성경의 번역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통한 종교교육이 불가능했기에 하급 성직자들의 지적 능력은 형편없었다.

교황은 이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특사와 도미니코 수도사들을 이 지역으로 파견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204년 카르카손에서 카타리파와 가톨릭 신학자들 사이에 최후의 공개토론이 벌어졌다. 양측은 상대를 설득시키지도 굴복시키지도 못하였다. 교황은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마침내 1207년 이노켄티우스 3세 교황은 북프랑스의 부르고뉴 공작, 바르 백작, 느베르 백작, 샹파뉴 백작, 블루아 백작을 향해 알비 교도를 토벌할 십자자군 소집을 선포하였다. 카타리파를 알비 교도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교황은 십자군이 승리한다면 알비 교도를 지지한 귀족들의 영지를 분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프랑스 국왕도 남쪽으로 자신의 영지를 확대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십자군에 참여하였다. 카타리파와 알비 십자군 간의 전쟁은 1209년 시작되어 1255년까지 계속되었다.

1208년 카타리파 이단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랑그독 지역을 방문한 교황 사절 피에르 드 카스텔노Pierre de Castelnau가 암살되었다. 그는 1207년 론 강 계곡과 프로방스 지역에서 보의 영주Lords of Baux인 위그 3Hugh III, lord of Baux, viscount of Marseille와 툴루즈 백작 라몽 6Raymond VI, Count of Toulouse 사이의 분쟁에 휘말렸다. 이듬해 라몽 백작의 사주를 받은 카타리 교도에게 보의 영주인 위그가 암살당했다. 교회는 즉각 라몽 6세를 파문하고 알비 십자군을 파견하였다. 이 사건은 두 제후 사이의 분쟁에 관련된 수도자가 살해된 것임에도 교회는 카타리파를 박멸할 기회를, 프랑스 국왕은 남부 지역을 통합할 명분을 얻었던 것이다. 1209년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알비 십자군이 랑그독 지방으로 들이닥쳤다. 프랑스 북부에서 모집되어 남부로 내려온 3만 명의 알비 십자군은 무자비한 살육과 방화를 저질렀다. 이들의 행위는 종교를 방패막이로 한 조직적인 대량학살이었다. 1209년부터 1255년까지 감행되었던 알비 십자군은 세 단계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1209년부터 1215년까지로 랑그독 지역의 상당부분을 점령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두 번째는 1215년부터 1225년까지로 툴루즈 백작 라몽의 반란과 패배가 주를 이룬다. 세 번째 시기는 1226년부터 1255년까지로 랑그독 지역의 카타리파 박멸에 집중하면서 이 지역이 확실하게 프랑스 왕국으로 편입된다. 당시 알비 십자군에 대항하여 싸운 남부의 대 귀족은 툴루즈 백작, 카르카손의 트랑카벨Trecavel 가문, 푸아 백작count of Foix , 코맹주 백작Counts of Comminges과 베아르 자작viscounts of Béarn 등이다.

1208년 로마 교황청은 오크 지역의 대제후들에게 카타리파 이단자들을 더 이상 보호하지 말고 체포하라고 강요하였다. 이에 강력하게 저항한 툴루즈 백작은 교회로부터 파문당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사절 피에르 드 카스텔노를 툴루즈 백의 친구인 카타리파 교도가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빌미로 교황은 십자군 파병을 요청했지만 정작 프랑스 국왕 필립 2세는 잉글랜드와 전쟁 중이란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12094회 십자군 원정이 시작될 무렵이 돼서야 북부 프랑스의 귀족들이 정치적 반목을 상쇄할 목적으로 알비 십자군 원정에 응하였다.

1209년 시몽 드 몽포르가 지휘하는 알비 십자군이 랑그독 지방을 침입하였다. 이때부터 거의 반세기 동안 남부 지역에서 종교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왜 프랑스 남부, 특히 랑그독 지방은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면서까지 카타리파를 옹호하고 보호하려 하였던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민중들의 향방이었다. 남부의 대귀족들은 일반 민중들이 교회의 사회적 지배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자신들이 지배하는 신민들 앞에서 교회의 파문을 겁낼 이유가 없었다. 이는 교회의 파문이 있더라도 영주들은 더 이상 자신이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추방되거나 거부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는 가톨릭교회가 남부에서는 더 이상 신자들에게 공동체에 속하느냐 아니냐를 결정한 권한을 상실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민중들은 더 이상 교회의 간섭을 원치 않았다. 이들은 교회에 가야한다는 의무감에서 해방되었고 부패한 성직자의 설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남부에서 교회가 더 이상 신자들의 행동이나 사상을 지배할 수 없음을 자인自認해야만 했다. 귀족들은 카타리파가 기존 교회에 대한 거부로 선서의식을 부정하는 것을 교묘히 이용하였다. 이는 봉건질서의 토대인 봉건제가 선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의 이런 입장은 상위영주인 프랑스 국왕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알비 십자군은 랑그독 지방에 침입하여 첫 번째로 베지에Beziers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의 지휘관은 시토회 수도원장Abbot of Citeaux인 아르노 아말릭Arnaud Amalric이었다. 랑그독 지방 최대의 포도주 집산지集散地인 베지에는 부와 활력이 넘치는 도시였다. 알비 십자군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전날인 721일 베지에 성 밖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베지에의 주교 몽페이루의 르노Renaud II de Montpeyroux를 협상자로 보냈다. 르노 주교는 알비 십자군이 작성한 명단을 가지고 성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에는 카타리파 신자들 외에 도시의 부유하고 저명한 인물-유대인-들이 적혀있었다. 베지에의 관리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르노 주교는 소수의 가톨릭 성직자를 데리고 철수하자 베지에의 관리들은 전투 준비를 하였다. 만약 베지에가 무모하게 알비 십자군을 공격하지 않고 수비에 전념하였다면 전투는 길어졌을 것이다. 722일 베지에의 방어자들이 새벽에 소수의 알비 십자군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공격하였다. 베지에의 공격자들은 이들을 가볍게 물리쳤지만 이 소란을 틈타 알비 십자군이 열린 성문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베지에의 방어자들은 제대로 수비를 할 수 없었다. 알비 십자군이 베지에 성으로 난입하면서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알비 십자군은 교황사절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하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아이들과 아녀자들은 생 마리 막달렌St Mary Magdalene성당과 생 주드St Jude성당으로 피신하였다. 성역 안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알비 십자군은 성당 문을 부수고 난입하여 안에 피신한 모든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상황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그제야 귀족들은 병사들의 약탈을 통제하였다. 사실 귀족들이 약탈을 통제한 것은 자신들의 몫을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병사들은 자신들의 전리품을 귀족들이 빼앗는다 생각하고 갖지 못할 바에는 태우자는 심보로 베지에에 불을 질렀다. 불은 걷잡을 수없이 확대되어 하루아침에 2만 명의 사람이 사망하였다.

베지에를 폐허로 만든 알비 십자군은 이틀 후에 나르본Narbonne으로 향하였다. 지중해의 부유한 무역항인 나르본은 베지에의 학살 소식에 저항을 포기하였다. 725일 나르본의 대주교인 바르셀로나의 베렝가르Berengar of Barcelona와 나르본 자작 에이머리Aimery III of Narbonne는 카페스탕Capestang에서 알비 십자군을 만나 투항하였다. 이들은 여기서 카타리파 교도를 넘기고 이들과 유대인이 소유한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알비 십자군을 지원하기 위해 협조하기로 하였다. 이제 다음 목표는 도보徒步로 사흘거리에 있는 카르카손Carcassonne이었다.

726일 아질Azille이 알비 십자군에게 항복하였다. 알비 십자군은 아질에 들어가 카타리파 이교도를 시장 한 가운데 장작을 쌓아놓고 불태웠다. 이웃마을 라 레도르트La Redorte 역시 아질처럼 알비 십자군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생 나자르Saint-Lazare축일 전날인 728일 알비 십자군 선발대가 트레베Trèbes에 도착하였다. 선발대는 무저항의 표시로 열려있는 트레베 성문을 통과하여 입성入城하였다. 알비 십자군 선발대가 트레베 성으로 들어서자 하늘이 흐려지며 폭우를 동반한 천둥 번개와 폭풍우가 몰아닥쳤다고 한다. 북에서 온 병사들은 이 자연현상에 놀라 모두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으며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제 카르카손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81일 알비 십자군은 카르카손에 도착했다. 베지에처럼 지리적인 위치는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카르카손은 성벽이 가파르고 높이 솟아 있었다. 성벽을 따라 26개의 탑tower과 외보外堡barbican가 건축되어 있었고 도시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카르카손은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르Borgh와 카스텔로Castello라 부르는 두 성벽이 카르카손의 양 옆에 위치해 있었다. 보르와 카스텔로 사이에는 백작의 성Château Comtal이라 부르는 성의 중심부가 위치해 있었다. 백작의 성 앞으로는 가파른 절벽 아래로 상-비생St. Vincent지역이 있는데 이곳이 성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지점이었다. -비생은 보르와 카스텔로처럼 성벽이 없었다. 카르카손 성 안에는 1만 명이 넘는 인구와 성주城主24살의 라몽 로제 트렝카벨Raimon-Rogièr Trencavel을 따르는 기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군주를 위해 죽음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트렝카벨 자작은 카바레의 영주Lord of Cabaret인 노련한 피에르 로제Peire-Rogièr의 도움을 받았다. 트렝카벨의 봉신인 그는 주군이 도움을 요청하자 몽타뉴 누아르Montagne Noir에 있는 그의 성으로부터 밤을 달려와 자신의 의무를 다하였다. 피에르 로제는 트렝카벨에게 알비 십자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치르기보다는 성벽을 의지하여 장기적인 방어전을 수행하도록 충고하였다. 카르카손은 장기전에 버틸 만큼 충분한 병력과 자원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83일 알비 십자군은 카바레의 영주 피에르 로제가 예측한 대로 외드Aude 강으로부터 카르카손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상-비생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카르카손의 방어자들은 이곳을 집중적으로 방어했다는 증거는 없다. 만약 카르카손 방어자들이 상-비생을 적극적으로 방어했다면 양측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오소서 성령이여Sancti Spiritus를 부르며 공격자들을 격려하는 동안 투석기를 동원한 공격자들의 공격은 집요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방어측보다 10배나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다. 알비 십자군의 시몽 드 몽포르Simon IV de Montfort가 선두에 서서 방어자들의 참호를 점령하였다. 2시간 후 방어자들은 성벽 안으로 후퇴하였고 알비 십자군은 상-비생을 점령하였다. 알비 십자군은 방어용 참호를 모두 메우고 공격 무기를 배치하는데 방해가 되는 건물을 파괴한 뒤에 공성용 무기를 배치하였다.

이로 인해 카르카손은 식수원食水源이던 외드 강을 이용할 수 없어 성 안의 우물에 의존해야 했다. 알비 십자군은 상-비생을 장악한 기세로 카르카손의 오른쪽에 위치한 보르 지역을 급습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보르의 방어자들은 화살과 돌과 뜨거운 기름을 이용해 공격자들을 격퇴하였다.

포위 공격기간 동안 알비 십자군의 기술자들은 다양한 공격 무기를 구상하여 배치하였다. 이들은 노포弩砲catapult와 다양한 투석기magonels, tribuchets를 만들어 배치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고양이gata라 부른 공성용 무기였다. 네 바퀴가 달린 마차 지붕에 쇠가죽을 덮어씌운 공격용 무기는 병사들을 불화살과 돌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성벽 가까이 접근하게 하였다. 이를 이용해 성벽에 구멍을 내거나 터널을 파 성벽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 알비 십자군은 이 공성용 무기를 동원하여 보르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전세가 여의치 않자 트렝카벨 자작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84일 카르카손의 트렝카벨 자작은 자신의 상위 군주인 아라곤의 페드로 2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아라곤의 페드로 2세는 랑그독 지역의 대군주인 툴루즈 백작 레몽 6세의 처남이었다. 카르카손의 트렝카벨 가문과 아라곤의 페드로 가문은 역사적 유대가 견고한 사이였다. 구원요청을 받은 페드로 2세는 이튿날 카르카손으로 와 트렝카벨 자작과 의견을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페드로 2세는 카르카손이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 지적을 하였다. 이에 덧붙여 페드로 2세는 트렝카벨 자작이 교회와 화해하기를 권하였고 이들과 협상하기를 권하였다. 이에 트렝카벨 자작은 페드로 2세를 알비 십자군 측에 보내 양측의 협상을 중재하도록 하였다. 페드로 2세는 카르카손의 안전을 위해 협상을 시도했지만 알비 십자군의 사령관인 아르노 아말릭은 카르카손을 알비 십자군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트렝카벨 자작이 지명하는 12명의 가신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성을 떠나는 것을 허락한다고 하였다. 트렝카벨은 당연히 이를 거절하였다. 중재에 실패한 페드로 2세는 아라곤으로 떠났고 양측은 최후의 일전을 위한 대치를 계속하였다. 카타리 교도가 아닌 트렝카벨 자작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개화된 인물이었다.

86일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축일顯聖容에도 양측은 무의미한 전투를 지속하였다. 87일 알비 십자군은 공성용 무기를 앞세워 보르와 카스텔로 쪽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동시에 고양이를 이용해 단단한 성벽 밑을 파서 화약을 설치하였다. 88일 알비 십자군은 성벽 아래 설치한 화약을 터뜨렸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보르 지역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자 알비 십자군이 무너진 틈새로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88일 알비 십자군은 보르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이곳을 통해 물밀 듯이 들어왔다. 방어자들은 보르를 포기하고 카르카손 성 안으로 후퇴하였다.

완강하게 저항하는 카르카손을 알비 십자군은 점령할 수 없었다. 814일과 16일 사이에 양측은 다시 협상을 시작하였다. 카르카손의 트렝카벨 자작과 알비 십자군의 책임자인 아르노 아말릭 사이의 협상을 중재한 사람은 툴루즈 백작 라몽 6세였다. 협상에 응한 트렝카벨 자작은 소수의 기사를 대동하고 느베르 백작 에르베 드 동지Hervé de Donzy, Count of Nevers의 천막으로 갔다. 느베르 백작의 천막으로 들어간 트렝카벨 자작은 알비 십자군 측에 의해 체포되었다. 트렝카벨 자작은 자신이 체포를 조건으로 카르카손의 카타리 교도, 유대인, 가톨릭 신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고 떠날 수 있게 하였다. 단 떠나는 자들은 몸에 지닌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었다. 카르카손은 영주인 트렝카벨의 희생으로 큰 희생 없이 함락되었다.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트렝카벨 자작은 그 해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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