둠즈데이북Domesday Book 용어(2): 中世資料

11.쟁기ploughs

쟁기는 맷돌과 함께 중세 초기의 대표적인 동력원이었다. 그런데 유럽의 쟁기는 남부와 북부에서 각각 다른 형태를 사용한다. 남부의 경우 삽을 대형화한 것과 같은 쟁기를 두 마리의 소가 끌게 한다. 이 쟁기는 땅을 깊게 갈이 뒤집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지중해 연안의 건조한 지역에서는 깊게 땅을 갈아엎지 않기 때문에 수분의 과잉증발過剩蒸發을 막는 효과가 있다. 이런 남부식 쟁기는 토지가 습한 북부지역에서는 사용할 수 없다. 북부 유럽에서는 남부 유럽에서 사용하는 쟁기보다 더 크고 무거운 대형 쟁기를 사용하였다. 이 쟁기는 크기 때문에 쟁기 당 소 여덟 마리가 필요했고 바퀴가 달려 있었다. 이를 밭갈이 쟁기조 plough team라고 한다. 이 쟁기의 장점은 토지를 깊게 갈아 뒤집어엎기 때문에 유럽 남부의 쟁기처럼 두 번 쟁기질 할 필요가 없었다. 척박하고 습기 찬 북부에서는 이 쟁기가 효과적이었다. 잉글랜드에 대형 쟁기가 들어온 것은 아마도 데인 족의 침입과 거의 같은 시기로 보고 있다. 둠즈데이북의 기록을 보면 잉글랜드에는 두 종류의 쟁기가 풍부하였다고 한다. 둠즈데이북에 따르면 조사 당시 잉글랜드에 대략 8만 조 이상의 쟁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둠즈데이북에 나오는 쟁기는 무거운 쟁기로 이 쟁기 하나에 밭갈이 쟁기조plough team 소가 제대로 배당되었다면 노르망디 공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했을 당시 대략 65만 마리의 소가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12. 랜드 퍼Land for

라틴어 테라...카루키스terra ... carucis의 번역어이다. 굳이 번역하자면 쟁기질하는 땅이란 뜻이다. 이 단어는 종종 경작지ploughland나 팀랜드teamland로 번역되어 사용되었다. 플로우랜드ploughland는 경작지耕作地를 의미하지만 잉글랜드의 역사에서는 경작지단위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경작지ploughland120에이커의 토지를 뜻한다. 비르가타virgata이기도 하다. 이 정도의 토지는 소 여덟 마리가 한조가 되어 일 년 동안 경작하는 넓이이다. 팀랜드teamland 역시 한 무리의 소나 말이 경작하는 토지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둠즈데이 북에서 어떤 다른 통계학적인 단어보다 많이 언급되고 있다.

13. 헌드레드村落Hundred

이 단어는 카운티county의 주된 행정구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재정, 군사, 법률 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봉토fief에 정착한 사람들은 이 단위에 의해 지리적 위치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헌드레드의 판사判事들은 달마다 중앙에서 만나 정치적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하였다. 둠즈데이 북에서 이들의 목소리가 종종 기록되어 있다. 카운티county나 셔shire이 구성단위라고 할 수 있다.

 

14. 小作地vill

라틴어 빌라villa. 라틴어 빌라는 소작지小作地를 뜻한다. 둠즈데이 북에서 이 단어는 가장 작은 행정상의 단위이다. 남부의 패리쉬parish-교회의 교구를 기본으로 한 행정단위-나 혹은 북부의 타운쉽township-대교구를 기본으로 한 행정단위-과 동등한 단위이다. 촌락村落으로 부를 수 있다. 교회의 행정단위는 대교구大敎區-교구敎區-본당本堂-공소公所로 세분된다. 보통 한 국가는 소수의 대교구로 크게 나누고 여기에 대주교大主敎가 상주한다. 대주교가 상주하는 대교구는 교구로 나눠진다. 교구에는 주교主敎가 상주한다. 교구 아래 우리가 성당이라고 부른는 본당이 위치한다. 본당에는 신부神父가 거주한다. 공소는 말 그대로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곳을 말한다. 공소는 그 지역의 신부가 관할하며 정기적으로 순환하며 관리한다.

 

15. 에이커acre

이 단어는 밭을 뜻하는 라틴어 아게르ager에서 유래되었다. 일반적으로 하이드의 1/120 넓이에 해당된다. 이 단어는 둠즈데이 북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 이 넓이는 1/40, 1/48, 1/60 하이드로 사용된다.

 

16. 하이드hides

이 단위는 데인로Danelow 이외의 대부분 지역에서 발견되는 단위로 농민의 땅 소유 단위이면서 과세부과의 단위이다. 이 단어는 고 영어 hid에서 유래된 것으로 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땅의 크기를 의미한다. 대부분의 주에서는 120에이커acre1하이드hide로 계산한다. 하지만 남서부에서는 40, 48 혹은 60에이커를 1하이드로 계산하기도 한다.

 

17. 슬렁sulung

라틴어 솔리누스solinus에 해당한다. 이 용어는 세액부과稅額賦課 단위와 농부의 소유지所有地를 이르는 말로 오직 켄트Kent지역에서만 확인된다. 슬렁sulung과 쟁기yoke는 쟁기질ploughing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슬렁은 쟁기의 고 영어인 술sulh에서 나왔고 쟁기yoke는 한 쌍의 겨리 소pair of yoked oxen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슬렁에는 네 개의 쟁기가 포함되어 있다. 다른 지역에서 이 용어에 상당하는 말은 쟁기yoke이다. 이 용어는 하이드hide나 카루카테carucate가 관습적으로 사용된 지역에서도 두 번 정도 나타난다. 1슬렁sulung은 대략 240에이커 정도이다.

 

18. 버게이트virgate 地積單位

라틴어 비르가타virgata에서 유래한다. 지적단위地積單位이다. 이 용어는 데인로지역과 켄트 외곽지역의 대부분 지역에서 과세단위와 농부의 토지소유 단위로 나타나고 있다. 이 단위는 하이드의 1/4로 대략 30에이커에 해당된다. 데인로 지역에서 2옥스강oxgang에 해당한다.

 

19. 펄롱furlong

라틴어 콰랜티나quarentina의 번역이다. 콰랜티나는 40을 의미한다. 길이의 단위로 1/8마일이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201.17m이다. 펄롱은 콰랜티나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40퍼치perch-220야드-이다. 경작구역耕作區域으로 번역된다. 1펄롱은 한 쌍의 황소가 쉬지 않고 쟁기질 할 수 있는 거리이다. 4로드×1펄롱이 1에이커가 된다. 4로드는 1체인chain이다.

 

20. 퍼치perch

라틴어 페르티카pertica의 번역이다. 페르티카는 고대 로마의 단위이다. 페르티카는 길이를 재는 막대ox-goad를 의미한다. 길이의 단위이면서 면적의 단위이기도 하다. 둠즈데이북에서는 길이의 단위가 될 때는 5.5야드이다. 이를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5.03m가 된다. 면적의 단위가 될 때는 1에이커의 1/4의 면적이다. 이것은 1/4 하이드와 같은 면적이다.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25.3이다.


둠즈데이북Domesday Book 용어(1): 中世資料

1. 쿼터quarter

쿼터는 일반적으로 1/4을 의미하지만, 둠즈데이 북에서는 펄롱furlong으로 사용된다. 펄롱은 경작구역耕作區域으로 번역된다. 펄롱은 1마일의 1/8이다. 1마일mile이 대략 1.609이므로 펄롱은 200m 정도가 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쿼터나 펄롱 모두 현재의 10진법 체계에서의 1/41/8이 아니라 모두 60진법 혹은 12진법의 1/4, 1/8이라는 점이다. 펄롱은 고대 영어 풀랑furlang에서 유래되었는데 풀랑은 밭고랑의 길이를 뜻한다. 이 플랑의 길이는 대략 농부가 쟁기로 한번 밀고 가서 되돌아오는 거리의 반-201.17m-에 해당된다.

 

2. 로드rod

라틴어 비르가virga의 번역어이다. 로드는 라틴어 비르가타virgata-영어로는 버게이트virgate-에서 유래된 것으로 기록에서는 보통 v 혹은 virg로 표시된다. 비르가Virga나 비르가타Virgata는 어근의 의미가 같다. 비르가Virga는 고대 로마의 집정관이 권위의 표시로 가지고 다니던 버드나무 다발로 묶은 막대기-파스케스fasces-를 의미한다. 로드는 1에이커-4046.8-1/4-1011.70-을 의미하고, 버게이트는 하이드hide-60에서 120에이커acre-1/4 30에이커acre를 뜻한다. 파스케스에서 파시즘이란 용어가 나왔다. 로드는 길이의 단위일 때는 5.5야드-5.03m-이고, 면적의 단위일 때는 버게이트virgate-1/4 하이드hide로 약15에서 30acre-라고 부른다. 1acre는 대략 가로와 세로가 64m가량 된다. 4로드가 1에이커가 된다. 15에이커를 1옥스강oxgang이라고 한다. 1옥스강은 말 그대로 한 마리의 황소가 일년에 갈아엎을 수 있는 토지 면적을 의미한다. 비르가타는 30에이커로 2옥스강이 된다. 카루카타는 120에이커로 4비르가타 혹은 120옥스강이 된다. 라틴어

 

3. 세스테르sester

라틴어 섹스타리움sextarium의 번역어이다. 섹스타리움은 1/6을 의미한다. 이 단위가 용량으로 사용될 때는 1/6 콘지우스congius-3.25-이고, 곡식 들이로 사용될 때는 모디우스modius-7-1/16 이다. 이 도량 단위는 변화가 심해 잘 사용되지 않았지만 둠즈데이북Domesday Book에서 왕실과 전국의 표준량으로 인용되기 시작하면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세스테르는 둠즈데이북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용량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세스테르에는 큰 세스테르와 작은 세스테르가 있었다. 이 세스테르 단위를 사용하는 것으로는 보리, 밀가루, , 귀리, 라이, 소금, 밀과 포도주 등이 있다. 세스테르는 1/6 콘지우스일 때는 541그램 정도 이고, 1/16 모디우스일 때는 437그램이다.

 

4. 스틱stick

고대 영어 스티시안stician에서 온 단어이다. 이 말은 찌르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위는 일반적으로 영주領主에게 뱀장어를 바칠 때 사용한 용어이다. 25마리의 뱀장어가 1스틱이었다.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두름처럼 사용된 말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은 우리의 계산으로 한 두름은 열 마리씩 엮어서 두 줄이 된다. 장어는 중세 민물 생선 가운데 귀족들이 즐겨 먹던 음식이었다. 장어는 비타민 A가 풍부하여 보양식품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잉글랜드의 헨리Henry 1세는 장어를 과식過食하여 죽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당시 왕족들과 귀족들에게 인기 있던 식품이었다.

 

5. 호쿠스hoccus

라틴어 호쿠스hoccus를 차용한 단어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둠즈데이 북에서는 이 단어를 제염소製鹽所와 연관 지어 사용하고 있기에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잉글랜드의 염전鹽田은 동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잉글랜드 동부의 기후는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기후를 보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의 습기 많은 기후와 구별되었다. 그래서 잉글랜드에서 동부의 이스트 앙글리아East Anglia지역에 염전이 많았다.

 

6. 리그league

라틴어 레우카leuca의 번역어이다. 레우카는 갈리아 인들이 사용하던 거리 단위로 대략 3.25정도 이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리그는 대략 12펄롱-1펄롱이 대략 201m,1리그는 약2.4-이었다. 하지만 윌트셔Wiltshire에서는 15펄롱-3.1- 이상의 거리를 의미했고, 우스터셔Worcestershire에서는 고작 4펄롱-800m-이었다. 둠즈데이 북에서 리그league는 가끔 마일mile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1리그를 6펄롱으로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로 볼 때 리그의 단위는 당시에는 통일된 것이 없이 제각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앰버amber

라틴어 암브라ambra에서 유래되었다. 이 단어는 물건을 잴 때 사용하는 단위이다. 하지만 용량容量은 알 수 없다. 둠즈데이북에서는 고작 두 번만 나타난다. 이 두 번 모두 소금의 무게를 재는 경우에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용어는 염전지역에서 사용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참고로 amber는 호박琥珀을 의미하는 단어와 철자가 같지만 뜻이 다르다. 준보석인 호박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앰버는 아라비아어 안바르anbar-이 단어는 용연향龍硯香을 의미한다-에서 유래한다. 라틴어로 준보석 호박은 수키눔succinum으로 표현한다. 이 단어는 나무의 즙이나 액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단위를 뜻하는 앰버amber은 호박이란 준보석을 뜻하는 단어와 철자는 같지만 연관성은 없다.

 

8. 아르펜트arpent

이 단어는 프랑스 어에서 온 것으로 둠즈데이북에서는 포도원葡萄園을 언급할 때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둠즈데이북에서 모두 스물여섯 번 언급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스물한 번이 포도원, 다섯 번이 초지草地와 삼림지森林地를 설명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모두 윌트셔Wiltshire 지방의 장부에만 나타난다. 당시에 다른 지역에서는 포도원의 측량 단위로 오직 에이커acre만을 사용하였다. 이 단어와 연관된 다른 것은 현재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윌트셔Wiltshire는 잉글랜드 남부 지역에 위치해 있다.

 

9. 카루캐이트carucate

라틴어 카루카타carucata의 번역어이다. 데인로Danelaw 카운티county의 대부분에서 공적公的인 세금稅金은 카루캐이트carucates와 보베이트bovates 안에서 결정되었다. 카루카타는 라틴어로 쟁기를 뜻하는 카루카caruca에서 보베이트bovate는 소를 뜻하는 라틴어 보스bos에서 왔다. 둠즈데이북에서 일반적으로 한 해 쟁기질을 하는 한 무리의 소는 여덟 마리가 한조를 이루었다. 보통 이 여덟 마리의 황소가 일 년 농사를 지었다. 그러므로 카루카테에는 여덟 마리의 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여덟 마리의 소가 한 조가 되어 일 년 동안 쟁기질 하는 땅을 경작지耕作地ploughland-이 농지는 대략 120에이커, 1하이드-라고 불렀다. 카루카테carucate, 보베이트bovate, 플로우랜드ploughland, 그리고 쟁기질 하는 한 무리의 소는 경작을 하는데 있어 하나의 개념으로 연결되어 있다.

 

10. 보베이트bovate

라틴어 보바타bovata의 번역어이다. 보바타는 황소를 뜻한다. 데인로Danelaw 카운티count 대부분에서 발견되는 소유 농지의 단위이다. 이 단위는 세금을 매기기 위해 토지 면적을 평가하는 단위이기도 하다. 토지면적 단위인 보베이트는 소를 의미하는 라틴어 보스bos에서 왔다. 둠즈데이북에서 일 년 동안 밭을 가는 평균적인 밭갈이 쟁기조plough team는 여덟 마리의 황소이다. 카루카테carucate를 참조할 것.


콘월 공작Duke of Cornwall 中世資料

콘월 공작Duke of Cornwall은 영국의 공작 작위 중 하나로, 잉글랜드 왕위 상속인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다.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는 독립적인 왕국이었다. 윌리엄 정복 왕이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정복하면서 잉글랜드가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잉글랜드는 곧바로 웨일즈를 정복하여 왕자王子의 영지로 삼아버렸다. 1603년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가문이 잉글랜드의 왕관을 차지한 이후 연합왕국United Kingdom이 된다. 연합왕국은 왕만 공동으로 모셨을 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각자의 독립적인 국회를 보유하고 있었다. 1707년 두 왕국의 국회마저 하나로 통합하면서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이 성립成立된다. 당시 아일랜드는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의 식민지였다. 1800년 그래이트 브리튼 왕국이 아일랜드를 흡수하여 새로운 주로 만들면서 1801년 그레이트 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이 성립된다. 1921년 아일랜드가 북아일랜드를 제외한 나머지 주가 독립하면서 왕국의 명칭도 그레이트 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으로 변경된다. 콘월 공작 작위는 잉글랜드 시대에 최초로 만들어진 작위이다. 콘월Cornwall의 위치는 최남단 서쪽 끝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랭커스터 공작과 함께 공작령을 가지고 있는 단 두 개의 작위爵位이다. 랭커스터 공작은 1413년에 헨리 4세가 사망하면서 랭커스터 공작의 작위는 자신의 직계 후손이 상속받도록 하였다. 하지만 장미 전쟁 후에 랭커스터 가문의 직계가 단절되면서 랭커스터 공작의 작위는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 4세가 차지하게 된다. 에드워드 4세는 이 작위와 영지를 왕실 영지와 구분하여 오직 잉글랜드의 왕 만이 상속받도록 한다. 이 작위는 왕에게 직접 수여하지는 않지만 비공식적으로 소유한 칭호이기도 하다.

전설에 따르면 콘월 공작 골루아Gorlois가 자신이 모시던 왕 유서 펜드래곤Uther Pendragon이 자신의 부인인 이그레인Igraine을 탐내 취하자 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유서 팬드라곤은 골루아를 죽이고 이그레인과 결혼해 아서 왕 King Arthur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 몬머스의 제프리Geoffrey of Monmouth의 브리튼 왕들의 역사 History of the Kings of Britain에서.

콘월 공작 작위는 1336년 에드워드 3세가 장남 에드워드 블랙 프린스에게 수여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에드워드 블랙 프린스가 에드워드 3세보다 먼저 사망하였기에 작위는 손자인 리처드Richad가 승계하였다. 리처드는 에드워드 3세 사망 후 리처드 2세로 즉위한다. 리처드 2세는 헨리 1세로부터 시작된 플랜태저넷 왕가의 마지막 왕이다. 다음 왕인 헨리 4세는 랭커스터 가문 출신이다. 1421년의 헨리 5세는 칙령으로 콘월 공작 작위는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이며 왕의 아들 중 최 연장자에게만 상속된다고 규정하였다. 이런 규정 때문에 콘월 공작의 작위는 왕위 계승자인 장남이 사망했을 경우 작위는 사망한 왕위 계승권자의 장남에게 수여되지 않는다. 콘월 공작의 작위는 왕의 아들 가운데 최 연장자에게 승계되기 때문에 왕의 차남, 혹은 왕위 계승자의 동생에게 수여된다. 예를 들면 현재의 콘월 공작은 엘리자베스 2세의 장남인 찰스가 가지고 있다. 그런데 찰스 왕세자가 사망하게 되면 작위는 왕위를 계승하는 찰스 왕세자의 장남인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 왕자의 아들인 케임브리지 공작 조지Prince George of Cambridge가 콘월 공작의 작위를 승계하게 된다. 콘월 공작은 헨리 5세의 칙령으로 왕으로부터 수여받는 작위가 아니라 왕의 자식 가운데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적으로 승계되는 작위이다. 현재 차기 왕위 계승자인 콘월 공작 찰스 왕세자의 공식적인 명칭은 프린스 오브 웨일즈The Prince Charles, Prince of Wales이지만 그의 두 번째 부인 카밀라 파커 볼스의 칭호는 왕세자비가 아니라 콘월 공작부인 카밀라Camilla, Duchess of Cornwall로 호칭된다. 이는 찰스 왕세자비 다이애너가 사망한 후 국민들의 여론이 나빠 카밀라가 정식 왕세자비로 호칭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콘월 공작은 영지에서 나오는 지대地代를 받을 권리를 지니며, 공작령의 수입으로 자기 공무를 꾸려나갈 권리를 가진다. 공작이 부재중일 때는 공작령의 수입은 왕에게 귀속歸屬된다. 콘월 공작은 이외에도 공작령에 대해 몇 가지 권한이 있다. 콘월 주 장관은 잉글랜드나 웨일스와 달리 국왕이 아니라 공작이 임명한다. 공작령 내에서 유언 없이 죽은 사람의 유산, 상속인이 없는 토지, 발견된 매장물 및 콘월 지방의 해안에서 난파된 배는 공작의 것이 되나, 콘월 이외의 지방에서는 국왕의 것이 된다. 영국에서 잡힌 철갑상어는 의례상 국왕에게 진상進上되지만 콘월에서는 공작에게 진상한다.

콘월 공작의 문장은 검은 바탕sable에 황금색 원반이 배치된 모양이다. 황금색 원반은 열다섯 개로 문장학에서는 배잔트bezant라고 한다. 세이블은 담비 가죽을 뜻하지만 문장학에서는 검은 색을 의미하기도 한다. 황금색 배잔트는 프랑스어 푸아pois에서 유래되어 영어의 완두콩peas으로 번역되는데 사실은 프랑스의 지명인 푸아투Poitou와 관련이 있다.

 

초대 콘월 공작 블랙프린스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1330년 태어나 1376년 사망하였다. 에드워드 3세와 에노의 필립파Philippa of Hainault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드워드 블랙프린스는 리처드 2세의 아버지이다. 에드워드는 1337년 콘월 공작으로 서임되고 1343년 왕세자Prince of Wales로 책봉되었다. 에노의 필립파는 에노 백작 귀욤William I, Count of Hainaut과 발로아의 조안Joan of Valois 사이에서 태어났다. 발로아의 조안은 프랑스 왕 필립 3Philip III of France의 손녀이다. 블랙프린스 에드워드는 잉글랜드에서 처음으로 왕세자의 칭호稱號로 프린스 오브 웨일즈Prince of Wales를 사용한 인물이다. 프린스 오브 웨일즈는 원래 웨일즈의 최고 군주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웨일즈는 원주민인 켈트 족이 앵글로-색슨의 침공을 받아 오파의 장벽 너머인 웨일즈로 피신하여 자신들 만의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이 공동체는 단일한 지도자가 없이 여러 토착 세력의 장들이 각 지역을 나눠 통치하였다. 이런 관계로 이들 토착 세력의 장들은 잉글랜드 왕의 종주권을 인정하였다. 잉글랜드의 군주들 역시 웨일즈를 직접 다스리는 대신 명목상의 군주로 만족하였다. 하지만 웨일즈는 13세기에 위대한 지도자 웨일린 압 로웰스Llywelyn ab Iorwerth가 등장하면서 하나의 단일 공동체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웨일린은 자신을 웨일즈의 최고 통치자Prince of Wales/ Tywysog Cymru로 호칭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 1세가 즉위하면서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관계는 험악하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브리튼 섬의 통일에 대한 야망이 있는 에드워드 1세는 가장 먼저 웨일즈를 공략하기로 결심하였다. 1301년 웨일즈는 에드워드 1세의 무력에 굴복하였다. 에드워드 1세는 자신의 아들인 후일의 에드워드 2세에게 웨일즈 최고 통치자Prince of Wales의 칭호를 부여하고 웨일즈를 독립된 왕국이 아니라 잉글랜드 왕실에 종속된 웨일즈로 편입시켰다. 이후 왕세자의 칭호는 프린스 오브 웨일즈로 확정되었다. 에드워드 블랙 프린스는 백년전쟁이 시작되자 부왕 에드워드 3세를 도와 프랑스 원정에 참여하였다. 크레시Crécy와 푸아티에Poitiers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일조하였다. 카스티야 원정에 참여하여 페드로 왕을 복위시켰다. 이런 원정을 통해 건강을 해친 에드워드는 부친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블랙프린스 에드워드는 에드워드 1세의 동생인 켄트 백작Earl of Kent인 우드스톡의 에드먼드Edmund of Woodstock의 상속녀이자 딸인 조안Joan과 결혼하였다. 이 둘은 사촌간이다. 블랙프린스 에드워드와 결혼하기 전에 조안은 이미 초대 켄트 백작 토머스 홀랜드Thomas Holland, 1st Earl of Kent2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몬태규William de Montague, 2nd Earl of Salisbury와 결혼을 했던 몸이었다. 블랙프린스 에드워드는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이었다. 조안은 두 번의 결혼으로 자식이 있었는데 블랙프린스 에드워드는 이들 모두를 자신의 양자녀로 받아들였다. 토머스 홀랜드와 조안 사이에서 태어난 조안 홀랜드는 블랙프린스 에드워드의 동생인 랭리의 에드먼드Edmund of Langley와 결혼하였다. 또 존 홀랜드는 블랙프린스 에드워드의 조카인 랭커스터의 엘리자베스 Elizabeth of Lancaster와 결혼하였다. 랭커스터의 엘리자베스는 겐트의 존의 딸이다.

 

2대 콘월 공작 헨리 5Henry V of England1387년 태어나 1422년 사망하였다. 141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잉글랜드의 국왕이었다. 헨리 5세는 랭커스터 가문House of Lancaster에서 즉위한 두 번째 왕이다. 부친은 헨리 볼링블로크Henry of Bolingbroke이고 모친은 7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Humphrey de Bohun, 7th Earl of Hereford의 딸 메리 드 보훈Mary de Bohun이다. 험프리의 아내는 10대 아룬델 백작 리처드 피츠알랜Richard FitzAlan, 10th Earl of Arundel과 랭커스터의 엘레노어Eleanor of Lancaster의 딸 조안 피츠알랜Joan FitzAlan이다. 엘레노어는 헨리 3세까지 이어지는 플랜태저넷 가문이다. 헨리 5세는 부친인 헨리 볼링블로크가 조카인 리처드 2세를 의회를 통해 축출하고 왕-헨리 4-으로 선출되면서 콘월 공작이 될 수 있었다. 이로서 앙주와 노르만의 피가 혼합된 플랜태저넷 왕통이 단절되고 랭커스터 가문의 왕조가 시작된다. 헨리 5세는 부친인 헨리 4세의 왕권에 도전했던 반대파들을 용서하고 몰수한 재산을 돌려줌으로서 잉글랜드에서의 대립을 종식시켰다. 이를 위해 부친인 헨리 4세와 대립하다 사망한 리처드 2세의 장례식을 다시 거행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헨리 5세는 잉글랜드에서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헨리 5세는 프랑스 원정을 감행하였다. 아쟁쿠르Agincourt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둠으로서 헨리 5세는 장인인 프랑스의 샤를 6Charles VI of France와 트루아 조약Treaty of Troyes을 체결하였다. 트루아 조약의 골자는 샤를 6세가 사망하게 되면 헨리 5세가 프랑스의 왕위에 오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헨리 5세가 장인인 샤를 6세보다 두 달 먼저 서른다섯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전쟁은 백년을 채워야만 했다. 헨리 5세는 프랑스 발루아 가문House of Valois의 샤를 6세의 딸 발루아의 캐서린Catherine of Valois과 결혼하였다. 여기서 후일 헨리 6세로 즉위하는 아들이 태어났다.

 

3대 콘월 공작 헨리 6Henry VI of England1421년 태어나 1471년 사망하였다. 1422년부터 1461년까지 그리고 1470년부터 1471년까지 잉글랜드의 국왕이었다. 헨리 5세의 장남이다. 부친은 헨리 5세이고 모친은 프랑스 발로아 왕가의 캐서린Catherine of Valois이다. 헨리 6세의 부인은 앙주의 마거릿Margaret of Anjou이다. 앙주의 마거릿은 프랑스 왕 샤를 7세의 조카이다. 샤를 7세는 헨리 6세의 모친 캐서린의 동생이기도 하다. 캐서린은 헨리 5세가 사망한 뒤에 오웬 튜더Owen Tudor와 재혼하였다. 여기서 에드먼드Edmund Tudor, 1st Earl of Richmond와 재스퍼Jasper Tudor, Duke of Bedford가 태어난다. 에드먼드는 후일 잉글랜드의 헨리 7세가 되는 헨리 튜더의 부친이 된다. 헨리 6세는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왕위에 올랐다. 이런 관계로 숙부인 초대 베드포드 공작 존John of Lancaster, 1st Duke of Bedford과 초대 글로스터 공작 험프리Humphrey of Lancaster, 1st Duke of Gloucester가 섭정으로 통치하였다. 헨리 6세의 재위기간은 잉글랜드의 위기였다. 에드워드 3세로부터 시작하여 헨리 5세에 이르러 정점에 이른 백년전쟁의 영광은 헨리 6세의 치세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프랑스에 산재해 있던 잉글랜드의 영토는 그의 외숙부인 프랑스의 샤를 7세에게 모두 빼앗겼다. 게다가 1453년 외할아버지인 프랑스의 광인 왕 샤를 6세와 같은 증상을 보임으로서 잉글랜드 인들을 낙담落膽하게 하였다. 정신병 발작이 시작된 그 해에 아들 에드워드가 태어났지만 헨리 6세는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나마 위로를 받을만한 것은 그의 재위 중에 이튼 칼리지와 케임브리지의 킹스 칼리지가 건립되었다는 점이다. 1461년 팔촌간인 에드워드에게 왕좌를 탈취 당하였다. 1465년 헨리 6세는 킹메이커Kingmaker 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Richard Neville, 16th Earl of Warwick에 의해 런던탑에 감금되었다. 하지만 리처드 네빌과 에드워드 4세 사이에 불화가 일어나면서 1470년 헨리 6세는 리처드 네빌에 의해 다시 왕으로 복귀하였다. 하지만 리처드 네빌이 에드워드 4세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살해당하면서 헨리 6세는 다시 런던탑에 수감되었고 1471년 사망하였다. 공식적인 사인死因은 우울증에 의한 것이라고 하지만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에드워드 4세와 사촌 간인 리처드 네빌의 사이가 틀어진 것은 순전히 에드워드 4세의 바람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잘생기고 바람기가 많았던 에드워드 4세는 여자관계가 복잡했다. 리처드 네빌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프랑스의 루이 11Louis XI of France의 딸 앤Anne of France과의 혼사를 성사시키기 위해 해협을 건넌 사이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에드워드 4세는 프랑스와 숙적 관계인 부르고뉴와 동맹까지 맺으므로서 리처드 네빌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게 하였다. 이에 분개한 리처드 네빌은 에드워드 4세에 반기를 들고 헨리6세를 다시 복위시켰던 것이다. 이 바람기는 후에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하고 아들 에드워드가 왕위에 오르면서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 간의 혼약이 무효임이 선언되어 에드워드 5세의 왕권이 박탈되고 숙부인 리처드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에드워드 4세는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기 전에 이미 성직자 앞에서 결혼을 올린 몸이었다.

 

4대 콘월 공작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Edward of Westminster, Prince of Wales1453년 태어나 1471년 사망하였다. 헨리 6세와 앙주의 마거릿Margaret of Anjou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이다. 에드워드는 투크스베리 전투Battle of Tewkesbury에서 살해되었다. 에드워드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전투 중 살해당한 유일한 왕세자이다. 투크스베리 전투에서 패배로 헨리 튜더는 프랑스로 도피해야만 했다. 헨리 튜더는 혈통상으로는 잉글랜드 왕관을 주장할 수 없었다. 헨리의 조부인 오웬 튜더는 헨리 5세의 미망인인 발루아의 캐서린과 사통私通하여 에드워드를 낳았다. 에드워드는 서출庶出이지만 에드워드와 배다른 형인 잉글랜드의 헨리 6세가 적출嫡出로 인정해 주었다. 에드워드 튜더는 랭커스터 가문의 방계傍系인 뷰포트Beaufort 가문의 마거릿 뷰포트와 결혼하였다. 마거릿은 랭커스터 가문의 시조인 겐트의 존의 증손녀이다. 헨리 튜더는 이렇게 방계로 이어진 혈통을 내세워 잉글랜드의 왕권을 주장하였다.

 

5대 콘월 공작 웨드워드 5Edward V of England1470년 태어나 1483년 행방불명되었다. 요크 가문의 왕인 에드워드 4세의 아들이다. 에드워드 4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에드워드 5세의 재위기간은 148349일부터 1483626일까지이다. 에드워드 5세는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둘의 결혼은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하면서 중혼重婚으로 인정되면서 에드워드 5세의 왕위계승자격이 박탈되었다. 숙부인 리처드 3세가 즉위한 후 런던탑에 갇혀있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야사野史에서는 리처드 3세가 보낸 자객이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켰다는 것이 널리 유포되어 있지만 현재는 버킹엄 공작 헨리 스태포드Henry Stafford, 2nd Duke of Buckingham나 새로 왕위에 오른 헨리 7세가 죽였다는 설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6대 콘월 공작 미들햄의 에드워드Edward of Middleham, Prince of Wales1473년 태어나 1484년 사망하였다. 아버지는 요크 가문의 첫 번째 왕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리처드 3세이다. 어머니는 네빌 가문의 앤 네빌Anne Neville이다. 미들햄의 에드워드는 리처드 3세가 왕에 즉위한 이듬 해 사망하였다. 기록에 보면 리처드 3세는 아들의 죽음에 크게 상심했다고 한다. 1485년 헨리 튜더에게 패배하여 살해된 리처드 3세는 자신이 사망하기 전 해에 사망한 유일한 요크 가문의 적통자 에드워드의 죽음과 요크 가문 내부의 분열로 인해 크게 고통을 받고 있었다. 요크 가문은 네빌 가문과 연합하여 왕권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네빌 가문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자 제거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협조자로 왕비의 가문인 우드빌 가문이었다. 하지만 우드빌 가문은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리처드 3세와 사이가 벌어지게 되면서 헨리 튜더가 웨일즈에 상륙했을 때 리처드 3세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었다.

 

7대 콘월 공작 아서Arthur, Prince of Wales1486년 태어나 1502년 사망하였다. 튜더 가문의 첫 번째 왕 헨리 7세의 장남이다. 그는 1501년 열 네 살의 나이로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과 결혼했지만 이듬해 사망하였다. 헨리 7세는 아라곤과의 동맹을 위해 아서의 동생인 헨리-후일의 헨리 8-와 캐서린을 결혼시켰다. 이 결혼은 불행을 잉태하였다.

 

8대 콘월 공작 헨리 Henry, Duke of Cornwall1457년 태어나 1509년 사망하였다. 헨리 7세의 차남이지만 형 아서가 사망하면서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509년 부친의 사망하자 열여덟의 나이로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의복과 풍속에도 유행이 있듯이 국왕에게도 유행하는 타입이 있다. 중세의 위대한 군주는 예의가 바르고 무용武勇이 출중出衆하며 언행이 엄격하고 신앙이 독실해야 했고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는 교양敎養 있는 방종放縱, 화려한 풍채가 있고 때로는 잔인해야 했다. 헨리 8세는 이러한 성격을 모두 구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국적이어서 방종도 부부관계에서 이탈하지 않았고 교양도 신학과 스포츠였으며 사치도 고상한 취미였고, 잔인성도 법률을 벗어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국민의 눈에는 죄악을 범했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인기 있는 군주로 보였던 것이다.’ -앙드레 모로아의 영국사- 중에서

 

9대 콘월 공작 헨리Henry, Duke of Cornwall1511년 태어나 1511년 사망하였다. 헨리는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둘 사이에는 첫 번째 딸이 있었지만 사산死産하였다. 콘월 공작 헨리는 두 번째 자식이며 아들로는 첫 번째이다. 하지만 헨리 역시 53일밖에 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0대 콘월 공작 헨리Henry, Duke of Cornwall1513년 태어나 1513년 사망하였다. 헨리는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세 번째 자식이다. 아들로는 두 번째이다. 하지만 헨리는 태어나서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11대 콘월 공작 헨리Henry, Duke of Cornwall1515년 태어나 1515년 사망하였다.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네 번째 자식으로 아들로는 세 번째이다. 헨리는 사산死産되었다. 아들 욕심이 많았던 헨리 8세는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작위를 수여하였다.

 

12대 콘월 공작 에드워드 6Edward VI of England1537년 태어나 1553년 사망하였다. 에드워드는 헨리 8세와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Jane Seymour 사이에서 태어났다. 1547년 아홉 살이 나이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을 원하였던 헨리 8세의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이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외삼촌들인 초대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Edward Seymour, 1st Duke of Somerset와 초대 시모어 남작 토머스 시모어Thomas Seymour, 1st Baron Seymour of Sudeley가 섭정을 하였다. 토머스 시모어는 헨리 8세의 마지막 부인인 캐서린 파와 결혼한 인물이다. 캐서린 파는 헨리 8세가 사망한 후 토머스 시모어와 결혼했는데 그는 그녀의 네 번째 남편이었다. 토머스 시모어는 야심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조카인 에드워드 6세를 납치하려는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어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에드워드 시모어 역시 토머스와 다르지 않았다. 어린 왕을 등에 업고 권력을 전횡하다 반대파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자 에드워드 6세를 윈저 성으로 납치하였다. 하지만 에드워드 6세가 에드워드 시모어를 신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몰락하게 된다. 에드워드 6세는 재위기간이 짧고 헨리 8세와 메리와 엘리자베스 1세 사이에 위치한 왕이기에 앞의 인물들에 비해 존재감이 약하다. 에드워드 6세는 신교도였고 누나인 메리는 가톨릭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여동생 엘리자베스는 신교도였다. 잉글랜드는 헨리 8세가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선포하면서 영국 성공회로 개종하였다. 에드워드 6세는 자신이 사망할 경우 가톨릭인 누이 메리가 왕이 되면 영국 성공회를 박해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스무살 연상의 누이인 메리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메리와 동생인 엘리자베스 둘을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시키고 신교도인 친척 제인 그레이를 차기 왕으로 지명하려하였다. 에드워드 6세의 이런 결정은 그의 사후 엄청난 분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의 사후 메리를 지지하는 당파와 제인 그레이를 지지하는 당파가 충돌하게 된다. 제인 그레이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는 시아버지인 존 더들리였다. 하지만 존 더들 리가 메리 여왕의 추종자들에게 패배하면서 제인 그레이와 존 더들리를 비롯한 반대 세력 대부분이 처형되었다. 에드워드 6세 사후 누이인 메리가 왕위에 올랐다. 메리는 후에 신교도를 박해하면서 피의 메리로 알려진다. 메리가 사망한 후 왕좌는 튜더 가문 최후의 왕인 엘리자베스 1세가 차지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잉글랜드의 왕좌는 스코틀랜드의 왕인 스튜어트 가문의 제임스 6세가 차지한다. 제임스 6세의 모친은 메리 스튜어트이다. 메리 스튜어트의 부모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와 잉글랜드 헨리 7세의 딸 마거릿이다. 그러므로 잉글랜드에서 튜더 가문이 단절되자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가문에서 왕을 모셔오게 된 것이다. 피의 메리와 메리 스튜어트는 다른 인물이다. 피의 메리는 헨리 8세의 딸이고 메리 스튜어트는 헨리 7세의 손녀가 된다.

 

13대 콘월 공작 헨리 프레더릭Henry Frederick, Prince of Wales1594년 태어나 1612년 사망하였다. 아버지는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이고 어머니는 덴마크의 앤Anne of Denmark이다. 앤의 부친은 덴마크의 국왕 프레더릭 2세이다. 헨리 프레더릭의 이름은 친가의 조부인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Henry Stuart, Lord Darnley와 외조부인 덴마크의 국왕 프레더릭 2세로부터 따온 것이다. 헨리 프레더릭은 열여덟의 나이에 장티푸스typhoid fever로 부친 제임스 1세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이 결과 동생인 찰스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왕관을 승계하였다. 제임스 1세는 헨리 8세의 외증손이며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동군연합同君聯合의 첫 번째 왕이기도 하다. 동군연합은 왕만을 공동으로 모시고 의회와 다른 정부기관은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체제를 말한다.


이어지는 내용

수오 주레Suo jure, 주레 욱소리스Jure uxoris, 주레 마트리스Jure matris: 中世資料

중세 유럽에서 여성 상속相續의 경우 수오 주레suo jure, 주레 욱소리스Jure uxoris 간혹 주레 마트리스란 용어가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 단어들은 쉽게 말해 한 집안의 남자 상속자가 없을 경우 그 집안의 유일한 생존자인 여성이 부친의 사후 모든 영지領地와 작위爵位를 상속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여성 당사자의 부친은 특별히 왕에게 청원하여 왕의 허락을 얻고 이 용어를 사용할 수 있었다.

 

수오 주레suo jure

중세 여성에게 있어서 이름과 함께 재산의 상속이라는 문제가 얽혀있는 경우도 있었다. 막대한 장원을 가진 영주가 작위와 영지를 계승할 후계자가 없을 경우 국왕에게 청원하여 딸이 태어나더라고 자신의 영지와 작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이런 요청이 받아들여지면 딸은 태어나면서부터 suo jure란 명칭을 칭호 앞에 붙여 사용하였다. 이 경우 딸은 부친이 사망할 경우 부친이 사용하던 작위와 소유한 영지를 모두 계승하게 된다. 이 여성이 결혼하게 되면 남편은 주레 욱소리우스jure uxorious로 불리며 아내가 먼저 사망할 경우 아내의 작위를 계승하며 태어난 자식 가운데 장남이 모친의 작위를 계승하게 된다. 수오 주레의 예는 아래와 같다.

Eleanor, Duchess of Aquitaine, French, then English queen consort, duchess suo jure

아퀴텐의 여공작이며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여왕이었던 엘레노어는 수오주레였다.

Mary, Duchess of Burgundy, Queen consort of the Romans, duchess suo jure

Anne Marie Louise d'Orléans, Duchess of Montpensier, French princess, peeress suo jure

Hawise, Duchess of Brittany, duchess suo jure

Henrietta Godolphin, 2nd Duchess of Marlborough, English peeress suo jure

Maria Theresa of Austria, Austrian archduchess, Hungarian and Bohemian queen regnant

Elizabeth of Russia, Russian empress regnant

Princess Wilhelmine, Duchess of Sagan, Baltic princess, duchess suo jure

Princess Alexandra, 2nd Duchess of Fife, British princess, duchess suo jure

Cayetana Fitz-James Stuart, 18th Duchess of Alba, Spanish grandee suo jure

Patricia Mountbatten, 2nd Countess Mountbatten of Burma, British countess suo jure

Jane Heathcote-Drummond-Willoughby, 28th Baroness Willoughby de Eresby, British baroness suo jure

Rosalinda Álvares Pereira de Melo, 1st Duchess of Cadaval-Hermès, Portuguese duchess suo jure

Diana Álvares Pereira de Melo, 11th Duchess of Cadaval, half-sister of the above, Portuguese duchess ad personam and suo jure

Margaret of Mar, 31st Countess of Mar, Scottish peeress suo jure

Catherine Willoughby, 12th Baroness Willoughby de Eresby English baroness suo jure

Joan of Kent, suo jure 4th Countess of Kent and 5th Baroness Wake of Liddell.

Queen Anne Boleyn, of England, Marquess of Pembroke suo jure

Catharina-Amalia, Princess of Orange became, in 2013, the first suo jure Princess of Orange since Mary of Baux in 1417

수오 주레는 말 그대로 자신의 권리를 의미한다. 이것은 외동딸인 경우 사용되는 용어이다. 이때 외동딸은 부친이 죽기 전에 왕에게 청원하여 가문과 작위 그리고 영지를 딸에게 상속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중세시대 왕은 신하에게 영지를 하사하고 충성심을 약속 받았다. 그 관계는 한쪽이 그 계약을 해지하거나 사망하였을 때 해소되었다. 문제는 영지였다. 봉신에게 남성 상속자가 있는 경우 그 자식이 영지와 작위를 이어받아 왕에게 충성을 맹서하면 간단하게 해결되었지만 남성 상속자가 없을 경우가 문제였다. 봉신이 자식이 없이 부인만 남겨놓고 사망하였다면 왕으로서는 큰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사망한 봉신의 아내는 엄밀하게 말하면 왕의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왕은 과부가 된 봉신의 아내 결혼을 통제하여 영지를 얻지 못한 젊은 기사들의 충성심을 유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신에게 딸이 있다면 과부와 같은 형태로 왕이 관리한다. 하지만 딸에게 수오 주레란 칭호가 붙게되면 왕도 어찌할 수 없게 된다. 수오 주레가 붙은 딸은 사망한 부친의 작위 앞에 수오 주레를 붙여 자신이 영지와 작위의 당당한 계승자임을 밝히게 되는 것이다.

수오 주레가 결혼하게 되면 그녀의 남편은 주레 욱소리스라고 불린다. 이것은 아내의 권리를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남편은 아내가 먼저 사망하게 되면 아내의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게 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아내가 외동딸로 남자 상속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한 가문이 사위에게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주레 욱소리스Jure uxoris

이 말은 부인의 권리혹은 부인의 권리에 의한이란 뜻의 라틴어이다. 이 단어는 수오 주레 suo jure

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칭호는 대부분 남자가 차지하게 되는 귀족 칭호와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남자의 부인이 수오 주레이기 때문이다. 여자 상속인의 남편은 주레 욱소리스로 부인의 땅을 합법적으로 소유하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에서는 1882년 결혼한 여성의 상속법Married Women's Property Act 1882이 시행될 때까지 여성은 법률적으로 자신이 소유한 영지의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주레 욱소리스 군주들Jure uxoris monarchs은 여왕의 배우자이기에 공동 통치자가 아니라 배우자일 뿐이었다. 봉건시대에는 남편이 아내의 재산권과 작위爵位을 통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결혼하는 순간 남편은 결혼생활이 유지되는 동안과 결혼 후에 획득한 것을 포함하여 아내의 토지를 소유할 권리를 얻었다. 결혼생활 동안 남편은 영지에 대한 법률적인 직함을 갖지는 못하지만 영지에서 나오는 이익이라든가 소작료를 사용할 수 있었다. 이 권리는 합법적 영지의 소유자인 아내가 항의를 하더라도 가능하였다. 주레 욱소리스는 중세시대에 여왕의 통치권을 순탄하게 할 수 있도록 확정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의 왕 풀크Fulk, King of Jerusalem, 뤼지냥의 기Guy of Lusignan, 몽페라트의 콘라드Conrad of Montferrat, 헨리 2Henry II, 샹파뉴 백작Count of Champagne과 예루살렘의 아말릭Amalric II of Jerusalem은 모두 결혼을 통해 그들의 직함을 받았다. 예루살렘 왕 풀크의 손자인 앙리는 잉글랜드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하여 주레 욱소리스가 되었고 결국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 룩셈부르크의 지키스문트Sigismund of Luxembourg는 헝가리의 메리 Mary of Hungary 여왕과 결혼을 통해 왕관을 차지하였다. 왕관은 아내가 사망한 후에도 그대로 유지하였다. 지기스문트가 사망한 후 헝가리의 왕관은 지기스문트의 딸인 에리자베스 Elizabeth of Luxembourg와 결혼한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Albert II of Austria가 상속하였다. 주레 욱소리스로 왕위에 오르게 되면 아내와 이혼하거나 아내가 사망하더라도 그 직함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주레 마트리스Jure matris/iure matris

이 말은 모친母親의 권리혹은 모친의 권리에 의한이란 의미의 라틴어이다. 이 단어는 어머니로부터 아들에게 작위라든가 다른 권리가 상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법률적 용어이다. 어머니가 수오 주레인데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남편이 먼저 사망하게 되면 장남은 주레 마트리스가 된다. 이것은 모친의 권리를 이어받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의 왕 보두앵 3Baldwin III of Jerusalem1143년부터 1153년까지 jure matris King of Jerusalem으로 불렸다. 이는 모친 멜리장드Melisende, Queen of Jerusalem로부터 받은 것이다. 멜리장드는 예루살렘 왕 보두앵 2세의 딸로 앙주 백작Count of Anjou 풀크Fulk the Younger와 결혼하였다. 소 풀크가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인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은 후에 잉글랜드의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하였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앙리 플랜태저넷이 후일 잉글랜드의 헨리 2세가 되며 플랜태저넷 왕가를 여는 인물이 된다. 소 풀크의 두 번째 아내가 멜리장드이다. 1143년 예루살렘의 왕인 소 풀크가 사망하자 부인인 멜리장드가 여왕으로 통치하였다. 대신 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보두앵은 주레 마트리스의 권리를 얻었다.

헨리 2세의 아들인 리처드Richard the Lionheart와 그의 동생 존John 역시 아키텐 공작령의 주레 마트리스jure matris Dukes of Aquitaine였다. 리처드는 1189년부터 1199년까지 동생 존은 1199년부터 1204년까지 아키텐 공작령의 주레 마트리스였다. 이 권리는 그녀의 모친인 엘레노아로부터 얻은 것이다.


소비에트 연방 다섯 원수元帥: 寫眞으로 본 風景

소비에트 최초의 원수元帥: 좌측에서 우측으로 투하체프스키Tukhachevsky, 부됸느이Budyonny, 보로실로프Voroshilov, 블뤼헤르Blyukher 예고로프Yegorov.

 

제정 러시아를 붕괴시킨 볼셰비키들이 가장 처음 한 일은 제정 러시아 군대의 해체였다. 하지만 군대라는 무력을 해체한 뒤 자신들을 보위保衛해야할 또 다른 무력이 필요함을 느꼈다. 볼셰비키들은 혁명 완수에 가장 위협적인 제정 러시아 군대를 해체한 대신 혁명을 수호할 적위대赤衛隊Red Guards를 만들었다. 당시 제정 러시아 군대의 경험 많은 영관급領官級 이상의 장교들은 혁명에 회의적이거나 반대세력에 가담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볼셰비키 정권은 구 제국군의 장교들을 제외하고 병사들만으로 구성된 병사 소비에트를 활용하여 혁명을 보위할 적위대赤衛隊를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병사 소비에트나 혁명 지도부 역시 군사적 경험이 일천日淺한 집단이었다. 이들은 혁명을 보위할 적위대赤衛隊를 통상적인 군대의 계급체계가 아닌 평등에 입각한 새로운 군대 조직으로 만드는 것을 구상하였다.

실제로 초창기 적위대赤衛隊는 군대 계급제도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대신 병사들로만 구성된 병사 소비에트에서 선거로 지휘관을 뽑았다. 이 제도는 민주적인 방식이긴 했지만 군사적 전문지식이 없는 사병士兵들 사이에서 지휘관을 뽑는 것이기 때문에 적백 내전赤白內戰초창기에 백군에게 적군이 연전연패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볼셰비키 혁명 지도부는 레온 트로츠키를 국방인민위원에 임명하였다. 레온 트로츠키는 1918년 적위대赤衛隊적군赤軍으로 개편하면서 구 제국군에서 근무하였던 장교들을 지휘관으로 받아들이고 이들을 견제할 정치장교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지휘관을 뽑는 선거를 폐지하고 상부에서 능력자를 지휘관으로 임명하는 방식을 도입하였다. 이를 통해 많은 구 제국군의 장교들이 적군赤軍에 입대하였다. 이들을 통해 적군赤軍의 능력과 전력이 상승되면서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세가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계급제도는 내전이 끝날 때까지 도입되지 않았다.

이 결과 적군赤軍에는 계급에 의한 통제가 사라지고 직책職責-분대장,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여기서 예외는 장군將軍뿐이었다. 결국 적군赤軍은 병사와 장군만이 있는 집단으로 재편되었다. 하지만 이런 체제는 기병과 보병으로 구성된 부대가 전선이 불확실한 넓은 지역을 게릴라처럼 돌아다니면 싸운 적백 내전에서는 그럭저럭 유지될 수 있었지만 내전이 끝나고 거대해진 군대가 복잡성을 띠면서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동등한 계급-병사-에서 명령체계가 설 수 없었고 책임의 소재 또한 불분명하였다. 장군과 병사 사이의 중간 관리자가 없는 적군赤軍은 평상시에도 통제가 힘들었지만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이런 제도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트로츠키 뒤를 이어 군사인민위원에 임명된 미하일 프룬제Mikhail Vasilyevich Frunze가 이를 개선하려 하였으나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미하일 프룬제가 사망할 당시 적군赤軍은 양적으로 5백만의 군세를 자랑하고 있었고 보병과 기병 외에도 기갑과 공수부대 같은 새로운 병과가 창설되면서 근대적인 군대에서 현대적인 군대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1935년 적군赤軍은 폐지되었던 계급제도를 부활시켰다.

이때 계급이 부활되면서 혁명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다섯 명에게 원수元帥의 칭호를 수여하였다. 그들은 투하체프스키Mikhail Nikolayevich Tukhachevsky, 부됸느이Semyon Mikhailovich Budyonny, 보로실로프Kliment Yefremovich Voroshilov, 블뤼헤르Vasily Konstantinovich Blyukher, 예고로프Alexander Ilyich Yegorov 이다. 이들 다섯 명의 원수 가운데 투하체프스키, 블뤼헤르, 예고로프는 적군赤軍을 현대전에 맞는 군대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부됸느이와 보로실로프는 근대적인 군대 체제를 옹호하였다. 문제는 당시 소비에트의 최고 지도자였던 스탈린이 보로실로프의 손을 들어 줬다는 점이다. 그리고 투하체프스키, 예고로프, 블뤼헤르는 스탈린에 의해 처형되고 보로실로프와 브돈느이는 대숙청에서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투하체프스키Mikhail Nikolayevich Tukhachevsky1893년 구 러시아의 알렉산드로프스코예에서 태어나 1938년 소비에트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였다. 투하체프스키는 1918년부터 1937년까지 소비에트의 군 지휘관이며 이론가로 활약하였다. 1920년부터 1921년까지 벌어졌던 러시아-폴란드 전쟁에서는 소비에트 서부전선의 사령관을 맡아 활약하였다. 1925년부터 1928년까지는 신생 적군赤軍Red Army의 총참모장으로 복무하였다. 이때 보병과 기병이 중심이 된 군대를 기갑과 공군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군대로 재편하려 하였다. 투하체프스키의 이런 생각은 보로실로프나 부돈느이와 같은 보수파의 반발을 사 총참모장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투하체프스키의 개념을 받아들여 적군赤軍을 기갑과 공군을 중심으로 한 부대로 재편하려 하였다. 당시 소련은 경공업과 농업을 희생하면서 중공업을 육성하였다. 이는 적백 내전 기간 동안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간섭을 경험한 소련이 이를 격퇴하기 위한 군사력 증강에 우선을 두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935년 계급제도가 부활되면서 투하체프스키는 보로실로프, 브돈느이, 블뤼헤르, 예고로프와 함께 원수元帥로 임명되었다. 1937522일 투하체프스키는 나치 독일의 스파이이며 군사적 트로츠키 주의자로 몰려 체포되었다. 투하체프스키는 체포된 직후 극심한 고문을 받으며 자술서를 작성하였다. 같은 해 612일 재판을 받고 사형이 선고되었고 즉각 처형되었다. 이후 그의 핵심적인 군사이론인 종심전투이론은 반혁명적이라는 이유로 폐기되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의 침공으로 그의 종심전투이론은 젊은 지휘관들이 실행하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투하체프스키의 이론은 독소 전쟁 중반까지 소련군이 제대로 실행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이론의 실행에 필요한 장비와 인원이 계속 충원되고 있었음에도 실전적 경험이 전무全無 했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젊은 장군들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쓰디쓴 패배를 경험하며 종심전투이론을 배우고 익혀 전쟁 중반에 이르러 종심전투이론을 흉내 낼 수 있었고 후반에 가서 제대로 구사할 수 있었다. 1957년 후르쇼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이 시작되면서 투하체프스키는 복권復權되었다.

적군赤軍의 개혁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노력을 기울였던 투하체프스키는 공군과 기갑부대의 협동을 근거로 한 종심전투이론縱深戰鬪理論을 주장하였다. 종심전투이론은 기동부대가 적 종심縱深 깊숙이 돌파한 다음 적 지휘소와 물자집적소, 통신시설, 비행장 등의 '두뇌頭腦''신경망神經網'을 공격해 적 전투력이 멀쩡히 살아 있더라도 이를 제대로 운용할 수 없도록 마비시키고 종국에는 심리적으로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투하체프스키는 후에 이를 종심전투이론으로 집대성하였다. 투하체프스키의 종심전투이론은 소비에트의 공업 발전에 맞춰 개발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소련은 급속한 공업화를 통해 서구 유럽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의 산업은 구 제국 시절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런 산업력은 육군에서는 기갑부대로 공군에서는 비행기로 실현되었다. 투하체프스키는 이런 근대화를 통해 공군은 적의 보병과 포병을 넘어서 공격하고 기갑부대는 돌파를 담당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이런 주장은 1929년 소비에트 군사교리인 야전규범에 실렸고 1935종심전투지도교범으로 완성되었다. 파시즘이 유럽에 확산되자 소련은 1939년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세미욘 미하일로비치 브돈느이Semyon Mikhailovich Budyonny1883년 구 러시아의 플라토프스카야Platovskaya에서 태어나 1973년 소비에트 연방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였다. 부돈느이는 남부 러시아의 돈 코사크Don Cossack 지역 가까운 농촌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부돈느이는 돈 코사크 지역에서 성장했지만 코사크는 아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勃發하자 사병으로 징집되어 용기병龍騎兵으로 복무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군에 남아 직업군인의 길을 택하였다. 1907년 뛰어난 기마실력으로 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1914년 제일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용기병 연대의 상사로 서부전선에서 독일과 싸웠고 이후에 카프카스 전선으로 전출되어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용맹을 발휘하여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았다. 브돈느이는 군사적 식견과는 별개로 용맹 과감하고 인품도 뛰어나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1917년 혁명이 발발하자 브돈느이는 병사 소비에트에서 지휘관으로 선출되었다. 이후부터 브돈느이는 볼셰비키에 경도되었다. 1919년 볼셰비키 당에 입당하였고 이때부터 스탈린과 보로실로프와 친분을 맺었다. 내전 기간 동안 새로 창설된 적군赤軍에서 제1기병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러시아-폴란드 전쟁에서 제1기병군은 크게 활약하였지만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 대패하는 치욕을 격기도 하였다. 브돈느이의 제1기병군은 적백 내전 기간 동안 하나의 혁명의 상징이었다. 이런 모습은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 강에 잘 묘사되어 있다. 내전이 마무리 된 1924년 브돈느이는 기병총감을 맡아 기병을 지휘하였다. 하지만 이 시기 기병은 새로운 기갑부대에게 자리를 내 주는 시기였다. 그럼에도 브돈느이는 기병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브돈느이의 이런 사고방식은 당시 기계화 부대가 앞으로의 전쟁에서 주역이 될 것이라느는 주장을 펼치는 투하체프스키에 사사건건 반대함으로서 소련군의 현대화에 큰 장애물이 되었다. 1935년 적군赤軍의 계급제도가 부활되자 브도느이는 투하체프스키, 블뤼헤르, 보로실로프, 예고로프와 함께 원수元帥로 임명되었다. 제이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브돈느이는 남부전선 총사령관이었다. 당시 북부에서는 레브 대 보로실로프, 중부에서는 보크 대 티모셴코가 접전을 벌였다. 브돈느이가 담당한 남부 전선은 대체적으로 선전했지만 키에프에서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육십만 명의 병사가 포로가 되는 대 참패를 당하였다. 스탈린은 이런 대패배에도 불구하고 브돈느이를 처벌하지 않았다. 스탈린의 배려로 브돈느이는 전쟁기간 내내 후방에서 상징적인 자리를 유지하며 종전을 맞이하였다. 이후 순탄한 삶을 살다 1974년 구십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클리멘트 예프레모비치 보로실로프Kliment Yefremovich Voroshilov1881년 제정 러시아의 리시찬스크Lysychansk에서 태어나 1969년 소비에트 연방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였다. 1896년 열 다섯이 나이로 공장노동자로 일하다 파업에 참여하였다가 해고되었다. 1903년 볼셰비키에 참가하고 1906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4차 대회에 대표로 출석하여 레닌과 스탈린을 알게 되었다. 1907년 런던에서 개최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5차 대회에도 참석하여 미하일 프룬제와 미하일 칼리닌과도 알게 되었다. 런던에서 귀국한 뒤 체포되어 아르한겔스크로 유배형에 처해졌으나 1913년 사면되었다. 1917년 내전이 시작되었을 때 보로실로프는 짜리친-후일의 스탈린그라드-방어전에서 스탈린과 친분을 맺었다. 이 친분관계는 후에 대숙청 기간 동안 보로실로프 인맥人脈이 살아남는데 큰 역할을 했다. 문제는 보로실로프가 군사적 지식이라든가 정치적인 식견이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이 스탈린에게 필요한 재능이었다. 보로실로프의 이런 무사안일주의는 나치 독일의 소비에트 연방을 침입하면서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의 연줄로 살아남은 장성將星들은 나치 독일군이 구사하는 전격전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전쟁 초기 소련군의 연전연패는 스탈린의 독단에 기인하바가 크지만 일선에서 지휘하는 장군들의 능력도 한 몫 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보르실로프는 스탈린으로부터 어떤 재제를 받지 않고 목숨을 부지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보로실로프는 적백 내전의 영웅인 미하일 프룬제가 살아있었다면 결코 중용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1925년 미하일 프룬제가 위의 종양을 제거하는 가벼운 수술을 받고 급사하는 바람에 보로실로프는 프룬제의 뒤를 이어 국방장관과 혁명평의회 의장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보로실로프가 차지한 직책은 소비에트 연방의 중요한 세 자리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에게는 그 자리에 어울릴만한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하지만 스탈린은 눈치 빠른 수하보다는 맹목적인 친구가 더 필요했다. 스탈린은 1926년 새로 창설한 정치국의 일원으로 보로실로프를 선출했고 이 자리는 1960년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보로실로프가 소련 연방에서 중용될 수 있었던 것은 혁명에 크게 기여했기 보다는 10월 혁명 이전에 볼셰비키에 참여한 고참 당원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이런 경력으로 보로실로프는 프룬제와 트로츠키가 죽거나 몰락한 이후에 적군赤軍의 최고 책임자가 될 수 있었다. 보로실로프는 1935년 군의 계급이 부활되면서 투하체프스키, 부돈느이, 블뤼헤르, 예고로프와 함께 원수元帥도 임명되었다.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에서 소련군의 기계화를 추진하려 했던 투하체프스키의 죽음에 큰 역할을 하였다. 보로실로프는 투하체프스키의 기계화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당시 소련연방의 능력 이상을 요구하는 투하체프스키의 요구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그는 소련군의 근대화에 반대한 인물로 각인刻印 된 것이다. 193911월에 벌어진 소련-핀란드 겨울 전쟁은 보로실로프의 무능을 총체적으로 드러낸 전쟁이었다, 현대전에 대한 개념이 전무한 보로실로프가 사십만 명의 군대를 지휘했다는 그 자체가 비극이었다. 19401월 보로실로프는 총사령관직과 국방장관직에서 해임되었다. 나치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하자 1941년 보로실로프는 레닌그라드 관구 방위사령관 직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보로실로프의 능력으로 독일군의 공격을 분쇄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게오르기 주코프에게 물려주게 된다. 스탈린은 보로실로프의 실책을 용서하고 후방근무를 맡겼다. 종전 후에 보로실로프는 1945년부터 1947년까지 헝가리에서 친소 정권이 들어서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52년 보로실로프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최고간부회의의 위원이 되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보로실로프는 과도기의 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의 의장-명목상 소련의 국가원수-이 되었다.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흐루쇼프이고 수상은 말렌코프였다. 1956년 스탈린 격하운동이 시작되자 보로실로프는 말렌코프, 카가노비치. 몰로토프와 함께 흐루쇼프의 반대편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세 불리를 느낀 보로실로프는 1957년 흐루쇼프를 지지하였다. 1960년 흐루쇼프는 보로실로프에게 은퇴를 강요하고 그의 후임으로 레오니드 브레즈네프를 간부회의 의장-국가원소-으로 선출했다. 1961년 보로실로프는 22차 당대회에서 중아위원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몰락 후 1966년 브레즈네프는 보로실로프를 혁명원로로 대접하여 중앙위원으로 복귀시켰다. 하지만 그의 역할을 얼굴마담 이상은 아니었다. 1968년 두 번째로 소련 영웅 칭호를 받고 이듬해 사망하였다. 그는 크레믈린 벽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뤼헤르Vasily Konstantinovich Blyukher1889년 제정 러시아의 바르신카Barschinka에서 태어나 1938년 소련 연방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였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블뤼헤르의 원래 성은 구로프Gurov였는데 19세기에 영주가 프로이센의 원수인 게브하르트 레베레크트 본 블뤼헤르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를 기념하여 구로프 가문에 블뤼헤르란 별명을 붙여줌으로서 시작되었다. 제일차 세계대전 전에는 공장 노동자로 일하였다. 1914년 제정 러시아의 군에 입대하였다. 제일차세계대전에서는 부사관副士官으로 종군하였다. 1916년 러시아 공산당의 전신인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하였고 1917년 사마라에서 10월 혁명에 참가하였다. 이후 적위대 지휘관으로 활약하였고 1918년 새로 창설된 적군赤軍에 참여하여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블뤼헤르는 적백 내전 기간 동안 가장 유능한 볼셰비키 지휘관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의 진가는 1918년 체코 군단 Czech Legion이 반란을 일으키자 백군 지역에서 일 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15백 킬로미터를 사십일 만에 주파하여 붉은 군대 주력과 합류하는데서 잘 드러났다. 이 공적으로 그는 적기훈장 Order of the Red Banner을 받았다.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예고로프와 함께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蔣介石의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었다. 이 기간 동안 갈렌Galen이란 별명을 사용하며 활동하였다. 이 기간 동안 블뤼헤르는 새로 신설된 국민당의 군사학교인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서 강의도 하며 국민당군의 현대화에 기여하였다. 이때 후일 중국공산당 홍군紅軍의 최고 지휘관이 되는 임표林彪도 교육하였다. 1927년 중국에서 귀국한 뒤에 우크라이나 군관구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극동군관구極東軍官區로 전출되어 하바로프스크에 사령부를 둔 적기赤旗 극동군Separate Red Banner Far Eastern Army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 적기 극동군은 일본의 확장 기도를 억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부대로 이 지역이 소련 연방의 안보상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기에 블뤼헤르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였다. 이런 연유로 블뤼헤르는 상당한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일본은 적백 내전 기간 동안 시베리아 출병을 통해 이 지역의 점유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 중심지가 하바로프스크였다. 1929년부터 1930년 사이에 만주를 지배하던 동북군벌인 장학량이 소련의 만주철도 이권을 회수하려 하였다. 이에 블뤼헤르는 만주를 침공하여 장학량의 국민당 동북군을 제압하였다. 이 공훈으로 적기훈장赤旗勳章을 받았다. 1935년 적군赤軍의 계급제도가 부활되자 최고 계급인 소련 연방 원수元帥에 임명되었다. 1937년 동료인 투하체프스키 재판에 재판장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87월과 8월 사이에 조선과 소련의 접경지역인 두만강 장고봉張鼓峰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국경충돌은 대규모 충돌로 비화하였고 소련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힘겹게 승리하였다. 하지만 블뤼헤르는 장고봉 사건의 처리에서 부적절한 행위를 한 죄목으로 극동 사령관 직에서 해임되었다. 같은 해 1022일 블뤼헤르는 일본의 간첩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다. 블뤼헤르는 감옥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았지만 날조된 자신의 죄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블뤼헤르는 정식재판없이 스탈린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블뤼헤르 역시 1956년 후르쇼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에 의해 복권復權되었다.

 

알렉산데르 일리치 예고로프Alexander Ilyich Yegorov1883년 제정 러시아의 부주루크Buzuluk에서 태어나 1939년 소련 연방의 수도 모스크바에서 사망하였다. 예고로프는 사마라Samara 근방의 부주루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1년 열 여덟의 나이로 제정 러시아의 군대에 입대하여 능력을 인정받아 1905년 장교로 임관되었다. 예고로프는 사병 시절인 1904년 사회혁명당에 입당하였다. 제일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장교로 종군하여 다섯 번이나 부상을 당할 정도로 용감히 싸웠다. 이 결과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하지만 191710월 혁명이 발발하자 사회혁명당에서 볼셰비키 지지로 돌아섰다. 그리고 적위대에 가담하여 능력을 발휘하여 바로 사령관급의 지위를 맡았다. 그 이유는 적위군 내에 정규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가 부족하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예고로프의 용맹성도 큰 몫을 하였다. 러시아 내전 기간 동안 적군赤軍의 남부전선의 사령관이 되어 우크라이나의 반혁명 집단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20년 소련-폴란드 전쟁에 참전하였고 이때 함께 참전한 스탈린, 브돈느이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1925년부터 1926년까지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蔣介石의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어 국민당군의 군사적 혁신에 조언하였다. 1927년 귀국하여 벨라루스-백러시아-군관구의 사령관이 되었다. 1931년 부국방인민위원이 되고 1934년에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임명되었다. 1935년 적군赤軍의 계급제도가 부활되자 최고 계급인 소련 연방 원수元帥에 임명되었다. 1937년 대숙청 기간 동안 스탈린과의 친분으로 무사히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1937년 동료 원수元帥인 투하체프스키의 군사재판에 판사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7년 말 갑자기 한직閑職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체포되었다. 예고로프는 1939년 옥사 혹은 처형 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죽음 이후 이름과 저작著作은 소비에트 연방의 공식 문서에서 사라졌다. 1956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후르쇼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이 시작된 후 예고로프는 복권復權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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