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총 부대Machine Gun Corps:

1914년 7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유럽 사람들은 이 전쟁이 길어야 한 달 안에 끝날 것으로 생각했다. 전선으로 향하는 유럽의 청년들 모두는 앞으로 4년 4개월 간 자신들이 지옥의 문턱까지 가게 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부모와 형제자매, 그리고 아내와 자식들에게 적어도 크리스마스 전 까지는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전선으로 떠났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전의 전쟁과는 전혀 다른 전쟁이었다. 이전의 전쟁은 병사들이 열과 오를 지어 사격 지근거리까지 행군한 다음 상대를 보며 총질을 해대는 방식이었다. 대포가 있었지만 정확하지 못했고, 지속적인 사격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오로지 보병들의 힘과 용기에 의해 승패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이런 방식에서 탈피한 현대적인 전쟁이었다. 전투는 땅에서 뿐만 아니라 바다와 하늘에서 동시에 치러졌다. 게다가 병사들은 새로운 문명의 이기인 철도와 자동차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전선으로 배치되었다. 전선은 더 이상 적과 마주보는 광활한 전투지대가 아니었다. 철조망과 참호, 기관총이란 신무기로 무장되어 보병이나 기병이 공격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진지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한 번의 전투로 승리가 갈리는 고전적인 방식은 사라지고 전선이 고착固着되어 지루한 참호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런 새로운 전술은 이미 1905년 러일전쟁과 1910년 멕시코 혁명 당시에 선을 보였지만 유럽의 근대적인 군 지휘관들은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이들 노쇠한 군 지휘관들은 기관총이 쓸데없이 총알을 많이 소비하는 비효율적인 무기라고 생각하였고 철조망과 참호 역시 보병과 기병의 공격으로 쉽게 돌파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 군 지휘관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기관총을 개발한 하이람 맥심이 자신의 총기를 선전하면서 ‘이 총은 20명의 어머니가 20년을 키운 자식들을 20초 만에 없애버릴 수 있다’라고 한 말을 심각하게 숙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기관총에 대한 영국과 독일의 군 지휘관들의 입장은 상이相異했다.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서구의 군 지휘관들은 기관총이 무겁고 총알을 낭비하는 쓸데없는 무기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군사적 승리를 위해서는 사거리가 긴 볼트 액션 소총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전선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기병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반면 독일의 지휘관들은 기관총이 가지고 있는 속도감과 다량의 실탄을 퍼부을 수 있는 소사掃射능력에 관심을 가졌다. 독일의 지휘관들은 기관총의 화력과 보병의 공격을 적절히 조합하면 전력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런 전투에서 기병은 공격에 한계를 보일 것으로 생각하였다. 대신 독일의 지휘관들은 병력 이동의 신속함에 더 신경을 썼던 것이다. 그래서 독일은 전쟁 초기부터 보병 대대에 기관총 부대를 배치하여 지원하였고 병력 이동을 위해서는 철도를 효율적으로 이용하였다.

기관총의 위력은 참호전으로 변질된 서부전선에서 강력하게 발휘되었다. 독일은 진지에 사선으로 기관총을 배치하여 일정한 지역으로 교차사격을 하도록 하여 사각이 없도록 하였다. 이런 기관총탄의 탄막 속으로 들어오는 생명체는 결코 살아나갈 수 없도록 하였다. 어리석게도 영국과 프랑스군의 지휘관들은 고전적인 보병 돌격을 전쟁 기간 동안 고수하였다. 이런 작전은 병사들을 기관총의 탄막 속으로 몰아넣는 것과 진배없었다. 병사들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들처럼 기관총의 교차사격으로 탄막이 형성된 무인지대로 돌격하였고, 결과는 끔찍하였다. 연합군의 지휘관들은 자신들이 한 짓이 무엇인지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자신들의 전쟁 관념을 바꾸는데 시간이 좀 더 필요하였다.

기관총의 위력을 실감한 연합군측도 참호와 철조망으로 무장한 진지 뒤에 기관총을 배치하면서 양측의 젊은이들은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일종의 도살에 가까웠다. 그래도 아직 계급적 질서에 순응하고 있던 양측의 젊은이들은 그 부조리한 진격 명령에 제대로 항거하지 못하고 죽음의 무인지대로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당시 기관총은 현대적인 기관총보다 소사속도가 느렸지만 지속적인 사격은 가능하였다. 실례로 한 기관총 사수는 적절한 탄약의 공급과 총신의 교환으로 24시간 사격을 하였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렇게 튼튼한 기관총은 전쟁터의 페스트였다. 당시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기관총 사수는 증오의 대상이었기에 이들을 포로로 잡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기관총 사수는 발견되는 즉시 병사들에게 살해당하였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42,959,850명의 병력을 동원하였고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은 25,248,321명의 병사들을 징집하였다. 결과는 연합군이 사망 5,525,000명, 부상 12,831,500명, 실종 4,121,000명이 발생한 반면 동맹국은 전사 4,386,000명, 부상 8,388,000명, 실종 3,629,000명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많은 사상자들은 호각 소리에 참호를 뛰쳐나와 무인지대로 돌격하다 기관총과 포탄 세례에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이 기관총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제시되었지만 탱크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 어떤 대안도 없었다. 탱크는 순전히 참호와 철조망 그리고 기관총으로 무장된 진지를 공략하기 위한 발상에서 나온 무기였다. 그만큼 진지전이 남긴 군사적 교훈은 컸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기관총은 총알을 낭비하는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당당히 전장의 주역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문제는 기존의 기관총을 좀더 가볍고 더 많은 총탄을 쏘아대는 무기로 개량하는 것이었다. 이런 위업은 30년 뒤에 벌어질 두 번째 세계대전에서 달성된다.

영국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MGC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영국은 전쟁에서 승리를 이루기까지 이들 MGC들이 분투한 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170,500의 장교와 병사들이 MGC에 복무하였고 이 가운데 62,049명이 부상을 당하고 12,498이 전사하였다. 거의 반에 해당하는 병사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는데 이는 이들 MGC들이 전투의 최전선에서 싸웠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기념비의 모습이다. 기념비의 인물은 병사들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다윗이다. 벌거벗은 다윗은 긴 칼을 들고 쓰러져 있는 거인 골리앗의 목을 베려는듯한 모습이다. 그리고 다윗의 양쪽에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의 주력 기관총이었던 비커스 기관총Vickers Gun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기관총 밑에는 로마자로 1914년과 1919년이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다윗의 동상에는

'세계대전에서 쓰러져 간 기관총 군단의 영광스런 영웅들을 기념하여 이 기념비를 세운다/ERECTED TO COMMEMORATE THE GLORIOUS HEROES OF THE MACHINE GUN CORPS WHO FELL IN THE GREAT WAR'라고 적혀있고 그 아래 조그만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사울은 수천을 치시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Saul hath slain his thousands but David his ten of thousands'.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원래 하고싶은 말은 드러내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닐까.

by doldom | 2012/01/25 21:06 | 寫眞으로 본 風景 | 트랙백

아서 해리스Arther Harris: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각국은 스페인 내전 동안 프랑코와 동맹국인 독일의 비행대대가 공화파 지역의 도시에 폭격을 가한 것을 생각했다. 그 무자비한 폭격은 전쟁을 시작한 모든 국가에게 하나의 악몽이었다. 그래서 1940년 여름까지 모든 교전국들은 상대방의 도시는 건드리지 않았다. 물론 전쟁 초기 바르샤바와 로테르담의 예외는 있었지만 공격 측인 독일조차도 군사목표물에 한정한 폭격만을 감행하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이런 제한폭격으로는 전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히틀러 역시 이를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이럴 즈음에 영국본토를 폭격하던 독일 공군 폭격대 가운데 일부가 방향을 잃고 1940년 8월 24일 이스트 런던을 폭격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다음날 영국 공군은 베를린을 폭격하였다. 히틀러는 이를 빌미로 영국에 대한 무차별 폭격을 결정하였다.

1940년 겨울부터 본격적인 폭격기에 의한 전역戰役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영국과 독일 양측 모두 폭격으로 상대를 굴복시킬 힘은 없었다. 상대방은 서로에게 약한 펀치만을 계속 때리거나 헛손질을 하는 정도였다. 사실 영국과 독일 양측은 딜레마에 빠져있었다. 무차별 폭격 전역은 서로의 도덕적인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독일이 자신들의 도시를 폭격하면 이에 대한 보복으로 독일의 도시를 골라 폭격하는 수준이었지만 영국 스스로도 자신들이 독일과 동등한 도덕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을 고민하였다.

이런 제한적인 폭격은 폭격사령부를 ‘독일에 폭탄을 수출하는 엉성한 항공화물 서비스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아냥을 받게 하였다. 영국은 1941년 한 해 동안 독일을 폭격하면서 자신들이 폭격하여 죽인 독일의 민간인 수보다 전사한 항공병들의 숫자가 더 많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영국이 사용하는 항공기의 질에서 문제가 있었지만 지리적인 이유도 무시할 수 없었다. 독일은 도버해협만을 넘으면 영국본토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영국 공군은 독일의 대공포화망이 밀집되어있는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를 지나 독일에 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주간 공습에서 영국 폭격기를 호위할 장거리 전투기가 영국에게 없다는 점이었다. 이를 이유로 폭격사령부는 야간 폭격을 전담했는데 그 효과는 10% 정도였다. 이 결과 1941년 한 해 동안 영국은 700여 대의 폭격기를 잃고 얻은 것은 독일 시골 마을에 무수한 폭탄구덩이彈孔를 만든 것뿐이었다.

결국 영국은 1941년 말에 가서야 현재의 전력과 기술로는 독일의 공장을 정확히 타격할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무차별 폭격을 선택해야한다는 점도 이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새로운 폭격 전술을 수행할 사람을 고르게 된다. 그 사람이 바로 야비한 외골수 지휘관으로 명성이 자자한 ‘폭격기 해리스Bomber Harris’ 혹은 ‘도살자 해리스Butcher Harris’란 별명으로 불린 아서 해리스Arther Harris였다.

1942년 2월 22일, 아서 해리스가 전략폭격대의 수장으로 취임하면서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폭격으로 전쟁에 이길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직 단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제 대답입니다. 두고 보세요’라고 말하였다. 그의 말대로 해리스는 무엇인가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가 운이 좋았던 것은 그가 취임하면서 기술적인 연구를 통해 정밀폭격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항법 보조 기구가 실전에 배치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항법장치는 지Gee, 오보에Oboe, H2S였다. 이 세 가지 항법 보조장치는 폭격목표에 대한 대규모 정밀폭격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해리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선도편대를 편성하였다. 선도편대란 경량 고속의 경폭격기인 모스키토가 폭격대에 앞서 소이탄과 조명탄을 탑재하고 먼저 날아가 목표물에 투하하여 화재를 일으켜 놓는 전법이었다. 나머지는 불빛을 보고 달려드는 나방처럼 폭격기들은 야간에 빛나는 목표물에 폭탄을 투하하기만 하면 되었다. 사실 해리는 선도편대비행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선도편대비행으로 유능한 비행사들이 소모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선도편대비행으로 폭격의 효율이 높아지자 그는 반대의사를 재빨리 거둬들이는 기민함을 발휘하였다.

해리스는 폭격을 질이 아닌 양으로 생각하였다. 그의 생각은 독일의 방공부대와 소방대가 어찌해 볼 수없는 양의 폭격을 중시했다. 1942년 3월 프랑스의 르노Renault공장, 3월28일 뤼벡, 4월에는 발트해의 또 다른 도시 로스토크Rostock를 무차별 공습했다. 이에 대해 독일은 베데커Baedeker 공격으로 앙갚음 하였다. 베데커란 독일 출판사에서 전전에 출판한 여행안내 책자로 독일이 폭격한 바스, 노리치, 액서터, 요크, 캔터베리가 베데커에서 추천한 영국의 유명 관광지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해리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5월에 1천 대의 폭격기를 동원하여 독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인 쾰른을 폭격하였다. 이 폭격으로 퀄른은 유명한 대성당을 제외하고는 모두 파괴되었다. 6월에는 에센과 브레멘에 1천 대의 폭격기 공습이 있었다. 영국은 독일 산업의 심장부인 루르 지역의 폭격에 온 힘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영국의 혼자 힘만으로는 버거운 것이 사실이었다.

1943년 1월 영국과 미국의 수뇌부는 카사블랑카에서 회담을 갖고 영국과 미국의 폭격공격의 통합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폭격사령과 에이커와 영국의 해리스는 가치관에서 뚜렷한 차이점을 보였다. 결국 영국과 미국은 폭격을 나눠서 실행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 공군은 독일 주요 도시의 가옥밀집 지역을 뜻하는 ‘타종 목표물他種目標物’에 계속 야간 공습을 하고 미국 공군은 주간에 독일의 군수공장에 공격을 집중하기로 하였다. 당시 미국은 B-17이라는 장거리 전략폭격기로 무장되어 있었다. 자체 방어망을 가진 이 폭격기는 미국이 내심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미국은 이를 과시하기 위해 1943년 8월 17일 독일 중심부에 위치한 슈바인푸르트Schweinfurt의 볼베어링 공장에 229대의 폭격기를 동원하였다. 결과는 참혹하였다. 무려 36대의 폭격기가 격추되었던 것이다. 이는 1회 폭격으로 허용하는 손실율 5%의 세 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 공군은 폭격기를 호위하는 장거리 전투기가 개발될 때까지 종심침투 임무는 완전하게 재개되지 않았다.

반면 해리스의 무차별 폭격은 미군 보다 훨씬 효과가 있었다. 해리스는 루르 지역에 대규모 공습을 감행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타종 목표물’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이에 따라 7월 24일과 30일 사이에 독일의 함부르크가 재앙의 목표물이 되었다. 4일간 연속 야간공습을 당한 함부르크는 화재폭풍이 일어났다. 화재폭풍이란 중심부의 화재가 주변의 끌어들여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온도가 치솟아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현상을 뜻한다. 이로 인해 함부르크는 도시의 80%가 파괴되고 3만 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여성 사망자의 수가 남성보타 40% 더 많았다고 한다. 이는 화재폭풍으로 발생한 진공효과로 지하실이나 방공호로 대피했던 여성과 아이들이 질식사 했기 때문이었다.

이 화재폭풍은 함부르크를 시작으로 카셀, 뷔르츠부르크, 다름슈타트, 하일브론, 부퍼탈, 베저, 마그데부르크로 이어졌다. 해리스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음 목표를 베를린으로 잡았다. 베를린은 1942년 1월의 폭격을 마지막으로 그동안 폭격의 목표물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하지만 해리는 8월과 9월에 베를린에 위력수색공격-이른바 맛보기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결과 베를린의 방어력보다 자신의 폭격력이 더 우세함을 감지한 해리스는 베를린을 본격적으로 폭격하기로 마음먹었다. 1943년 11월 18일-19일 베를린 공습이 시작되었다. 이후 1944년 3월 2일까지 16차례 대규모 공습이 실시되었다. 베를린에서는 다른 도시와는 달리 화재폭풍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도시에 탁 트인 공간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도시는 완벽하게 폐허가 되었다. 베를린 공습이 1944년 3월에 끝난 것은 해리스가 관대해 졌기 때문이 아니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준비에 따른 항공기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독일이 영국 공군만을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면 영국공군은 1944년 봄에 패배를 인정해야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란 변수로 인해 독일은 패배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영국의 폭격으로 독일의 도시들이 하나씩 지도상에서 소멸되어 갈 때도 독일의 민간인들의 사기는 결코 꺽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는 영국이 독일의 폭격을 받으며 민간인들이 굴복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였다. 한 예로 베를린은 1945년 4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도시의 기능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독일의 도시들 역시 폭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후에도 완전히 기능이 마비된 곳은 드레스덴 정도였다. 이 폭격에는 1300대의 중폭격기가 동원되어 3900톤의 소이탄을 투하하였다. 이 폭격으로 엘베강의 플로렌스Elbflorenz로 알려진 드레스덴은 완벽하게 초토화되었다.

1945년 2월 16일 대규모 공습으로 파괴된 드레스덴은 전후에도 도시의 기능이 재개되지 못하였다. 나머지 도시와 공장지역은 5개월 정도면 대략 80%의 회복율을 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독일의 모든 지역은 철저하기 해리스의 폭격으로 유린되었다. 이 결과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하였을 때 독일의 모든 도시의 주민들은 자신들이 다시 시작할 수단이 거의 남아있지 못했다. 만약 점령 연합군이 이에 대한 신속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그 모진 폭격에서 살아남았던 주민들 대다수가 굶주려 죽었을 것이다. 그만큼 해리스의 폭격은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이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인들은 차분히 자신들이 한 일을 반추反芻해 보았다. 결론은 한가지였다. ‘물론 독일인이 그 짓을 시작했지만, 우리는 악마를 본받지 않는다’가 그것이었다. 이런 양심의 성찰 때문이었을까? 해리스는 전쟁이 끝나고 다른 영국군 주요 지휘관에게 주어진 작위를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휘하의 승무원들은 종군휘장을 받지 않았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적과 똑같은 수준으로 전락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한 일에 정당방위라고 항변하기도 했지만 분명한 것은 결코 정당한 행위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영국은 승리했지만 그 승리의 뒤편에는 쓰라린 상처가 존재했고, 그 상처는 언제든지 자신들을 아프게 할 것이었다.

전쟁이 종결된 뒤에 해리스의 이런 판단이 과연 적절하였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전쟁 중의 전략폭격의 당위성에 대해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조차도 해리스의 이런 무차별적인 폭격에는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다는 점이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해리스의 이런 행위는 전략적인 효과보다는 적에 대한 철저한 증오심에서 나온 행위로 보고 있다. 해리스의 폭격에 의해 독일인 50만이 사망하고 영국공군 1만 5천명이 전사하였다.

이런 해리스의 동상을 영국이 굳이 독일의 반대를 무시하면서까지 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점점 쇠락해가는 제국의 위상은 독일의 통일로 더욱 유럽에서 위축되어 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유럽과 세계 무대에서 점점 커져가는 독일의 모습 앞에 점점 작아져 가는 영국의 속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은 아닌지..

존키건, 유한수번역, 2차세계대전사, 청어람미디어, 2004/ 이원복, 현대문명진단2, 조선일보사,1993참조

by doldom | 2012/01/24 11:41 | 寫眞으로 본 風景 | 트랙백

부활절 봉기Easter Rising:

부활절 봉기 주동자 15명을 처형한 킬메인햄 교도소의 처형 장소이다. 십자가가 세워진 곳에 주동자들이 세워졌고 그 앞에 총살대가 위치하였다.

5월 3일: 페트릭 피어스Patrick Pearse, 토마스 맥도너프Thomas MacDonagh, 토마스 클라크Thomas J. Clarke

5월 4일: 죠셉 플른켓Joseph Plunkett, 윌리엄 피어스William Pearse, 에드워드 데일리Edward Daly, 마이클 오한라한Micheal O'Hanrahan

5월 5일: 존 맥브라이드John MacBride

5월 8일: 에몬 센트Eamonn Ceannt, 마이클 말린Micheal Mallin, J.J.호튼J.J. Heuston, 코넬리우스 콜버트Cornelius Colbert

5월 12일: 제임스 코널리James Connolly , 숀 맥디어마다Sean MacDiarmada


아일랜드 인들에게 에이리 아마크 나 카스카Éirí Amach na Cásca로 불리는 부활절 봉기는 지배자였던 영국정부가 긁어 부스럼을 만든 격이었다. 1916년 부활절 아침에 더블린Dublin에서 시작된 작은 소요는 이후 아일랜드가 독립하는 단초가 된다.

부활절 아침 36살의 페트릭 핸리 피어스Patrick Henry Pearse가 중앙우체국 계단에서 아일랜드 인들이 영국에 대항하여 거국적으로 일어날 것을 외치는 연설을 하였다. 피어스는 아일랜드 자유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영국 통치의 종식을 선언하였다. 여기까지는 하나의 헤프닝이었다. 더블린 시민들은 퍼스의 이 연설을 외면하였던 것이다. 퍼스의 동료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도시의 중심부를 장악하였다. 이제야 영국 당국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아일랜드 인들이 영국의 지배에 분개하고 있었지만 신페인Sinn Fein과 호전적인 군사기관-퍼스가 소속되어 있는-아일랜드 공화국 동지회Irish Republican Brotherhood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 정부는 이 반란을 진압하면서 부활절 봉기를 신페인이 주도한 것으로 오해하였다. 이 결과 신페인에 대한 아일랜드 인들의 호감도가 상승하였다.

사실 더블린의 시민들은 부활절 아침의 이 소동을 냉정하게 혹은 염려스런 눈으로 지켜 보았다. 그리고 영국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 봉기를 진압한 뒤에 수백 명의 동조자들을 체포하였을 때는 안도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당시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대륙에서 목숨을 잃고 있었다. 아일랜드도 약 6만 명의 부모와 형제들이 대륙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아일랜드 인들과 더블린 시민들은 폭력이나 전쟁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기에 IRB의 부활절 봉기는 환영받을 분위기가 아니었다.

사실 IRB는 그동안 아일랜드 인들이 소망했던 것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표출한 것에 불과하였다. 아일랜드 인들은 오래 전부터 영국 정부에게 자신들의 자치를 요구하였고, IRB는 이 요구를 조금더 과격하게 요구한 것뿐이었다. 이들 봉기자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격렬한 군사적 폭력이 수반되었지만 그것은 불가피한 것으로 양측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일랜드 인들은 이들 봉기자들이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벌금형 정도를 받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런던의 정부는 1916년 유럽 대륙에서 군사적 역전을 시도하고 있었기에 이들 반란자-영국의 입장에서-들에 대해 본보기를 보여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경직된 사고가 결국 영국정부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이어지고 말았다. 런던 당국은 이들 체포된 반란자들에게 전시법을 적용하여 군사재판에 회부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부활절 봉기는 1916년 4월 24일부터 30일에 걸쳐 더블린 시내에서 일어난 무력 충돌이었다. IRB는 많아야 3천 명 내외의 조직원을 동원한 반명 영국은 1만 6천 명의 군인과 1천 명의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봉기를 진압하였다. 진압의 결과는 IRB는 64명의 사망자와 다수가 부상당하였다. 반면에 영국측은 132명의 사망자와 39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리고 정부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더블린의 시민 254명이 전투의 와중에 사망하였고, 2,217명이 부상당하였다.

4월 24일 정오가 지난 시각에 봉기자들은 중앙우체국을 완전 점거한 다음 건물 옥상에 계양되어 있던 영국 깃발을 끌어내리고 아일랜드의 삼색기-가톨릭을 상징하는 녹색과 북부의 개신교를 상징하는 오랜지색과 이들을 분리하는 흰색으로 구성되었다-와 녹색 바탕에 황금색 하프가 그려진 깃발이었다. 이 깃발 아래서 피어스는 아일랜드 공화국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선포하였다. 한 시간 후에 영국군 중대병력이 중앙우체국으로 진입했으나 4명의 전사자를 남겨놓은 채 후퇴하였다. 이제 더블린은 어느 권력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오후 늦게부터 부랑자들의 약탈이 시작되었다. 밤이 되자 부랑자들은 건물에 방화를 시작하였고 이 불빛이 어둔 밤하늘을 밝혔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우체국 안에서 제임스 코널리James Connolly는 자신들이 승리했음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이 시각 영국은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이들을 분쇄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화요일부터 반격을 시작하였다. 수요일에는 영국해군의 포함인 헬가호가 강을 따라 올라와 포격을 시작하였다. 목요일이 되자 포격을 더욱 심해졌고 영국군의 9파운드 포가 우체국을 포격하기 시작하였다. 금요일 우체국 건물 천장이 무너져 내려앉았다. 토요일이 되자 봉기를 일으킨 IRB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영국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봉기를 진압한 영국의 조치는 신속하였다. 주동자 15명에 대해 군사법정을 열고 5월 초 주동자 15명을 킬메인햄 교도소Kilmainham Gaol에서 총살형에 처하였다. 조지 버나드 쇼Georgr Bernard Shaw는 이 신속한 만행을 보고 ‘그 죄수들을 성인聖人으로 추앙시켰다’고 하였다. 사실이 그랬다. 아일랜드는 아주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IRB는 아일랜드 전역으로 퍼져가는 분노를 효율적으로 이용하였다. 아일랜드 이민이 많이 거주하는 미국이 영국 정부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영국은 1917년 정치범들에 대한 대사면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었다. 영국이 신속하게 처형한 15명의 지도자들의 무게가 그만큼 엄청났던 것이다. 이들의 처형으로 영국은 아일랜드에서 정당한 정당이 존속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윈스터 처칠은 ‘싸움터 위의 잔디는 빨리 자라지만, 처형대 위의 잔디는 결코 자라지 않는다’고 했다.

이들 처형된 사람들의 뒤를 이은 차세대 지도자는 정치가라기 보다는 투사들이었다. 드 발레라, 아서 그리피스, 마이클 콜린스 등이 신페인 당을 이끌었다. 이들은 영국의 지지부진한 협상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영국이 주저한다면 무장 투쟁을 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1919년 마이클 콜린스는 군사적 단체인 IRA를 조직하여 영국과 제한적인 전투에 돌입하였다. 마이클 콜린스는 1916년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았다. 그는 전면적인 격돌보다는 소규모 게릴라전을 통해 영국의 진을 빼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의 소규모 부대는 매복, 기습, 도주를 반복하였다. 그리고 영국의 협조자와 영국관리들을 암살함으로서 공포감을 조성하였다. 이런 전술을 바탕으로 결국 아일랜드는 1921년 영국-아일랜드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으로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의 얼스터지방과 영연방내의 국가로 독립하는 아일랜드로 나누어져 독립하게 된다. 이 조약에 적극적이었던 아일랜드의 군사지도자 마이클 콜린스는 자신의 지인에게 ‘나는 오늘 나의 사형집행장에 서명했다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활절 봉기에서 아일랜드 독립까지 몇 년 간의 숨가쁜 시간표의 시작은 바로 킬메인햄에서의 총소리였던 것이다.

by doldom | 2012/01/13 11:11 | 寫眞으로 본 風景 | 트랙백

대진경교류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頌幷序:

 

大秦寺僧景淨述

 

粵若。常然眞寂。先先而無元。窅然靈虛。後後而妙有。總玄摳而造化。妙衆聖以元尊者。其唯我三一妙身無元眞主阿羅訶歟判。十字以定四方。鼓元風而生二氣。暗空易而天地開。日月運而晝夜作。匠成萬物然立初人。別賜良和令鎭化海。

渾元之性虛而不盈。素蕩之心本無希嗜。洎乎娑殫施妄。鈿飾純精。間平大於此是之中。隙冥同於彼非之內。是以三百六十五種。肩隨結轍。競織法羅。或指物以託宗。或空有以淪二。或禱祀以邀福。或伐善以矯人。智慮營營。恩情役役。茫然無得。煎迫轉燒。積昧亡途久迷休復。

於是我三一分身景尊彌施訶。戢隱眞威。同人出代。神天宣慶。室女誕腥於大秦景宿告祥。波斯睹耀以來貢。

圓二十四聖有說之舊法。理家國於大猷。設三一淨風無言之新敎。陶良用於正信。制八境之度。鍊塵成眞。啓三常之門。開生滅死。懸景日以破暗府。魔妄於是乎悉摧。棹慈航以登明宮。含靈於是乎旣濟。能事斯畢。亭午昇眞。經留二十七部。張元化以發靈關。法浴水風。滌浮華而潔虛白。印持十字。融四照以合無拘。

擊木震仁惠之音。東禮趣生榮之路。存鬚所以有外項削頂所以無內情。不畜臧獲。均貴賤於人。不聚貨財示罄遺於我。齋以伏識而成。戒以靜愼爲固。七時禮讚。大庇存亡。七日一薦。洗心反素。眞常之道。妙而難名。功用昭彰

强稱景敎。惟道非聖不弘。聖非道不大。道聖符契。天下文明太宗文皇帝。光華啓雲明聖臨人。大秦國有上德。曰阿羅本。占靑雲而載眞經。望風律以馳艱險。貞觀九祀至於長安帝使宰臣房公玄齡總仗西郊賓迎入內。翻經書殿。問道禁闈。深知正眞。特令傳授。

貞觀十有二年秋七月。詔曰道無常名。聖無常體。隨方設敎。密濟群生。大秦國大德阿羅本。遠將經像來獻上京。詳其敎旨。玄妙無爲。觀其元宗。生成立要。詞無繁說。理有忘筌

濟物利人。宜行天下。所司卽於京義寧坊造大秦寺。一所度僧二十一人。宗周德[■/(口*口)/亡]。靑駕西昇。巨唐道光。景風東扇。旋令有司將帝寫眞轉摸壁。天姿汎彩。英朗景門。聖跡騰祥。永輝法界

案西域圖記及漢魏史策。大秦國南統珊瑚之海。北極衆寶之山。西望仙境花林。東接長風弱水。其土出火綄布․返魂香․明月珠․夜光璧。俗無寇盜。人有樂康。法非景不項主非德不粒土宇廣[澗-日+舌]。文物昌明。

高宗大帝。克恭纘祖。潤色眞宗。而於諸州各置景寺。仍崇阿羅本爲鎭國大法主。流十道。國富元休。寺滿百城。家殷景福。

聖曆年。釋子用壯。騰口於東周。先天末。下士大笑。訕謗於西鎬。有若僧首羅含․大德及烈․並金方貴緖․物外高僧。共振玄網。俱維絶紐

玄宗至道皇帝。令寧國等五王親臨福宇建立壇場。法棟暫橈而更崇。道石時傾而復正。天寶初。令大將軍高力士送五聖寫眞寺內安置。賜絹百匹。奉慶睿圖。龍髥雖遠。弓劍可攀。日角舒光。天顔咫尺。三載大秦國有僧佶和。瞻星向化。望日朝尊。詔僧羅含僧普論等一七人。與大德佶和。於興慶宮修功德。於是天題寺牓。額戴龍書。寶裝璀翠。灼爍丹霞。睿扎宏空。騰淩激曰。寵[來/貝]比南山峻極。沛澤與東海齊深。道無不可。所可可名。聖無不作。所作可述

肅宗文明皇帝。於靈武等五郡。重立景寺。元善資而福祚開。大慶臨而皇業建

代宗文武皇帝。恢張聖雲從事無爲。每於降誕之辰。錫天香以告成功。頒御饌以光景衆。且以美利故能廣生。聖以體元故能亭毒

我建中聖神文武皇帝。披八政以黜陟幽明。闡九疇以惟新景命。化通玄理。祝無愧心。至於方大而虛。專靜而恕。廣慈救衆苦。善貸被群生者。我修行之大猷。汲引之階漸也。

若使風雨時。天下鼎人能理。物能淸。存能昌。歿能樂。念生響應。情發目誠者。我景力能事之功用也。大施主金紫光祿大夫。同朔方節度副使。試殿中監。賜紫袈裟僧伊斯。和而好惠。聞道勤項遠自王舍之城。聿來中夏。術高三代。藝博十全。始效節於丹庭。乃策名於王帳。中書令汾陽郡王郭公子儀。初總戎於朔方也肅宗俾之從邁。雖見親於臥內。不自異於行間。爲公爪牙。作軍耳目。能散祿賜。不積於家。獻臨恩之頗黎。布辭憩之金罽。或仍其舊寺。或重廣法堂。崇飾廊宇。如翬斯飛。更效景門。依仁施利。每歲集四寺僧徒。虔事精供。備諸五旬。餧者來而飯之。寒者來而衣之。病者療而起之。死者葬而安之。淸節達娑。未聞斯美。白衣景士。今見其人。願刻洪碑。以揚休烈。

詞曰眞主無元。湛寂常然。權輿匠化。起地立天。分身出代。救度無邊。日昇暗滅。咸證眞玄

赫赫文皇。道冠前王。乘時撥亂。乾廓坤張。明明景敎。言歸我唐。翻經建寺。存歿舟航。百福偕作。萬邦之康

高宗纂祖。更築精宇。和宮敞朗。遍滿中土。眞道宣明。式封法主。人有樂康。物無災苦

玄宗啓腥克修眞正。御牓揚輝。天書蔚映。皇圖璀璨。率土高敬。庶績咸熙。人賴其慶

肅宗來復。天威引駕。聖日舒晶。祥風掃夜。祚歸皇室。祅氛永謝。止沸定塵。造我區夏

代宗孝義。德合天地。開貸生成。物資美利。香以報功。仁以作施。暘谷來威。月窟畢萃

建中統極。聿修明德。武肅四溟。文淸萬域。燭臨人隱。鏡觀物色。六合昭蘇。百蠻取則。

道惟廣兮。應惟密强。名言兮演三一主能作兮臣能述。建豐碑兮頌元吉

大唐建中二年歲在作噩太蔟月七日大耀森文曰建立

時法主僧寧恕知東方之景衆也

朝議郎前行台州司士參軍呂秀巖書

助撿挍試太常卿賜紫袈裟寺主僧業利

撿挍建立碑僧行通

僧靈寶僧內澄僧光正 僧和明僧立本僧法源 僧審愼僧寶靈僧玄覽 僧景通老宿耶俱摩僧明一 僧保國僧志堅僧義濟 僧玄德僧利用僧元□ 僧奉眞僧至德僧和光 僧景福僧太和僧崇德 僧德建僧去甚僧廣德 僧福壽僧□□僧寶達 僧□明僧和吉僧□□ 僧遙□僧日進□□輪 僧[這-言+(衣-■)]和僧崇敬僧惠通 僧□□□居信僧文貞 僧文明僧昭德僧曜原 僧仁□僧玄眞僧明泰 僧利□僧敬德僧元□ 僧乾□僧守一僧光□ 僧聞順僧普濟僧凝□ 僧沖和僧英德僧靈德 僧靈壽僧還淳□敬眞

後一千七十九年咸豐己未武林韓泰崋

來觀幸字畫完整重造碑亭覆焉惜故友

吳子苾方伯不及同遊也爲悵然久之

 

아, 항시 참眞이시고 정숙하시어 태초부터 계시니 시원始原이 없고, 심원하시고 영통靈通하시어 영원히 계시니 신묘영철神妙英哲하시며, 신비의 추기를 총람하시어 창조화육하시고, 중인과 성자 모두에게 영묘를 부여하시는 본래의 지존자 이시며, 유일한 삼위일체의 묘신其唯我三一妙身이시며 영원자존하시는 참된 주는 오로지 아라가阿羅訶YHWH야훼Alaha,Alohe이시다. 십자가로 사방을 정하시고 근본인 영력을 고무하시어 양성을 산생시키시었다. 어두운 하늘이 바뀌어 천지가 열리고 일월이 움직여 주야가 작동하듯 주께서는 만물을 가꾸어 이룩되게 하시고 최초의 인간을 창조하시었다. 특히 인간에게 양지와 천화를 하사하시어 보옥진기가 바다처럼 성하게 하시었다.

원래 인간의 크고 원만한 본성은 겸허하여 교만함이 없었고, 소박하고 넓은 마음은 갈구나 욕심이 없었으나 사탄娑殫이 미망迷妄을 주어 시행케하므로 순진한 마음이 허위로 꾸며져 신과 평등하다거나 오히려 더 위대하다는 자족망상自足妄想으로 이간離間되고, 신과 같이 심원하다는 비의非義로 원격遠隔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365종의 인간이 나타나 각자 제 길을 따라 결합하게 되었고, 서로가 앞을 다투어 법망을 만들었나니 혹자는 서물庶物을 종주宗主로 지정해 신앙하고, 혹자는 기도와 제사로 복을 받고자 하며, 혹자는 위선을 자긍自矜하여 타인에게 교만하니 모두가 간지奸智와 사려思慮로 전전긍긍하고 사색과 감정으로 동분서주하지만 막연할 뿐 소득이 없다. 급기야는 초조함에 짓눌려 소진燒盡해 버리고 암매暗昧가 쌓이는 속에 갈 길을 잃고 영원히 혼미에 빠져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우리의 삼위일체의 분신分身인 경대지존景大至尊하신 메시아彌施訶께서 참된 위엄을 감추시고 인간과 동일한 육신으로 강림同人出代하시고, 천사가 경사를 선고하시사 처녀室女가 대진에서 성주聖主를 낳으시었다. 밝은 별빛이 상서를 고하듯 페르시아인波斯들이 서광에 인도되어 내공來貢하였다.

그이는 24성聖이 설한 구약 율법舊法을 완성하시어 나라와 가정에 대도大道를 마련하시고 삼위일체의 정화와 형언할 수 없는 신교新敎를 설파하시었다. 그이는 양심을 도야케 하여 바른 믿음을 갖게 하시고 천국 팔복八境之度의 법도를 제정하시어 하찮은 속세를 연마하여 참되게 하시고 삼상三常;信望愛의 문을 계도하여 사멸死滅을 멸해 영생토록 하시고 밝은 햇빛을 비추어 어두운 곳을 파하시니 마귀의 미망은 좌절되고 말았다. 자비의 방주方舟를 요동시켜 인간을 천궁天宮에로 오르게 하시니 영혼을 가진 자 모두 구원받게 되었다. 그이께서 이러한 일을 마치시니 마냥 정오에 진리가 떠오르는 것만 같다. 그이께서는 성경27부를 남기시고 조화造化를 펼치시어 영혼의 문을 열고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헛된 정욕을 씻어버림으로써 결백한 인격을 갖추게 하시고, 인출印出한 십자가로 사방을 조명하시어 구애 없이 모두를 합치게 하시었다.

목탁木鐸을 두드림은 은혜를 전파하는 복음이고, 동쪽을 향해 예배함은 영생영화永生榮華의 길로 나아감이고, 수염을 기름은 외모를 보존함이고, 머리를 삭발함은 내정內情이 없음을 나타냄이다. 노비를 두지 않음은 인간이 귀천 없이 평등함을 말함이고, 재화를 축적하지 않음은 사재私財를 남기지 않도록 함이다. 정결淨潔,齋은 독거獨居와 명상으로 이루어지고 계율은 정숙과 근신으로 고정되나니 일곱 시마다 예찬을 드려 산 자와 죽은 자를 비호하고 7일마다 한 차례씩 예물을 올린다.

항시 마음을 씻어 정결하게 하는 이 참된 길은 신묘하여 이름하기 어려우나 그 효용이 밝게 나타나므로功用昭彰 경교라 칭하게 되었다.

무릇 도道란 성자聖者 없이는 홍통弘通될 수 없고, 또한 성자도 도 없이 위대해질 수 없을진대, 도와 성자가 상호 계합契合함으로써 천하는 비로소 문명하게 된다. 태종 황제께서 나라를 빛내시고 국운을 개척하시며 명철한 성인으로 백성을 다스릴 즈음에 대진에 아라본阿羅本Alopon이란 대덕이 있어 청운의 꿈을 안은 채 참된 경전을 가지고 바람의 조화를 기대하며望風律 험로를 달려 정관9년 장안에 도착하니 황제는 재상 방현령房玄齡과 의장대를 서교에까지 보내 융숭하게 궁내로 영입하고 궁내에서 성경을 번역하도록 하시었다. 황제는 내전에서 그 도를 물어 참됨을 깊이 인지하시어 전수傳受토록 특명을 내리시었다.

정관貞觀 12년 가을 7월에는 조서를 내려 아뢰시기를 도에는 정해진 이름常名이 없고 성자에게는 정해진 예의常體가 없으니 방법에 따라 설교하여 중생을 면밀히 제도密濟群生할지어다라고 하였다. 대진국의 대덕 아라본이 멀리서 성경과 성상聖像을 가지고 경사京師에 와 헌상하므로 그 교지를 상고한즉 신묘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또 근본 교리를 살펴보니 생성에 관한 요령이 확립되고 경설經說에는 번잡함이 없으며 교리는 만사를 잊게한다理有忘筌.

만물을 제도하고 인간에 대한 이로움을 천하에 실행함이 마땅하니 유사有司는 즉각 장안 의녕방義寧坊에 대진사 1소를 건립하고 승 21명을 상주케 하였다. 비록 종주宗主였던 주가周家의 도덕은 상실되어 청우靑牛를 타고 서천西天으로 올라가 버렸으나, 당唐의 장도壯途는 빛나고 경교의 바람은 동방에서 일어났다. 유사에게 명하여 황제의 사진을 그려 사원 벽에 걸어놓으니 모습은 더더욱 빛나고 영채英彩는 경교를 비춰주니 성왕의 족적은 상서롭기만 하여 전우주法界를 영원히 빛내일 것이다.

서역도기西域圖記와 한漢, 위魏 제국의 사적에 의하면 대진국은 남으로는 산호의 바다를 거느리고, 북으로는 보물이 많은 산에 이르며, 서로는 꽃과 나무가 우거진 선경仙境을 바라보고, 동으로는 바람이 세차고 물이 적은 곳에 접해 있다. 그 땅에서는 화포火布와 환혼향還魂香, 명월주明月珠, 야광벽夜光璧이 산출되고 세간에는 도적이 없으며, 사람들은 안락평강安樂平康하고, 종교는 경교만이 행해지고 있으며, 군주는 유덕자有德者가 아니고서는 옹립되지 않으며, 영토는 광활하고 문물은 번창하다.

고종高宗 대제大帝는 조종祖宗의 황통皇統을 고스란히 계승하여 이 참종교眞宗를 윤택하게 하시었고 모든 주州에 각각 경교사景敎寺를 두도록 하고 아라본을 진국대법주眞國大法主로 모시도록 하시니 경교는 십도十道에 퍼지고 나라는 부유해지고 백성은 편안해졌으며 사원은 수많은 성읍에 충만하여 가가호호는 큰 복이 은성殷盛하였다.

성력聖曆 연간 불교釋子가 동주東周에서 기세를 올렸고, 선대의 천자天子 말년에 서호西鎬에서 천민賤民,下士들이 경교를 크게 비웃으면서 흉보고 헐뜯었다. 그러나 승수僧首 나함羅含Lohan;Abraham과 대덕大德 급열及烈Cjilieh;Cyiacus 그리고 금방金方의 귀족들과 세속을 떠난 고승들이 공히 현묘한 강령을 진작시키고 함께 끊어진 유대를 다시 이으시었다.

현종玄宗 황제는 영국寧國 등 오왕五王들에게 명하여 행복의 집福宇에 친히 왕림하시어 제단을 세우도록 하시니 잠시 휘어졌던 법의 기둥은 더 높이 솟았고 일시 기울어졌던 도의 초석은 다시 바로 놓이게 되었다. 천보天寶 초 대장군 고력사高力士에 명하여 오대 성왕의 사진을 사내寺內에 안치토록 하시고 비단 100필을 하사하시었다. 뛰어난 계책睿圖을 받들고 경하하니 비록 성왕의 수염龍髥은 보기에 멀다 해도 궁검弓劍은 손에 닿을 듯하며, 햇빛이 퍼지니 성왕의 얼굴은 지척에 있는 듯하다. 3년 대진국 승 길화佶和는 별을 우러러 북상北上하고 해를 바라보며 지존을 따랐다. 승 나함과 승 보론普論Paul 등 17명에게 조서를 보내 대덕 길화와 함께 흥경궁興慶宮에서 공덕을 연수케 하고는 사寺의 제명題銘을 친히 쓰시어 정문에 걸어놓고 보옥으로 장식하니 붉은 노을처럼 작열하고 성왕이 명찰名札이 하늘 높이 걸려 있으니 빛남이 밝은 해를 능가한다. 황제의 성덕은 남산南山보다 높고 넘쳐흐르는 덕택은 동해와 같이 깊다. 무릇 도에는 불가함이 없으니 그 가可함으로 이름지어질 것이고, 성황은 하지 못하심이 없으니 그 하심이 기록될 것이다.

글이 밝으신 숙종肅宗 황제께서는 영무靈武 등 5군에 경교 사원을 더 지으시니 원래의 착함이 더 쌓여서 복문福門이 열리고 큰 경사를 맞이하시어 마침내 황제의 위업이 이룩되었다.

문무에 밝으신 대종代宗 황제께서는 성운聖運이 널리 퍼지어 만사가 형통하시었다. 해마다 성탄절에는 향품香品을 하사하시어 성공을 기렸고 어찬御饌을 베풀어 경교도들을 환대하시었다. 하느님은 아름다움과 이로움으로 능히 삶을 넓히시고 성왕은 근본元을 체현하므로 능히 화육化育,亭毒하실 수 있다.

현 건중建中 연간 문무를 겸비하신 성신황제聖神皇帝께서는 8수修의 선정善政을 펴시어 암우暗愚와 현명賢明을 가려내시고 9조條의 법규를 천명하시어 경교의 사명惟新景命을 새로이 하시고 현묘한 도리를 통달하시어 비행非行을 근절하시었다. 그의 마음은 크면서도 겸허하고 고요하면서도 너그러워 넓은 자비로 고생하는 중생을 구제하시니廣慈救衆苦 백성들에게 선덕을 베푸는 것은 수행의 대도大道 ,大猷이며 그들을 인도하는 한 단계階漸다.

비바람이 제때에 있고 천하가 안정되어 사람은 잘 다스려지고 문물은 청신淸新하며 산 자는 번창하고 죽은 자는 극락영생하며 생각念은 향응響應하듯 일치하고 정감은 성실함에서 생기나니, 이는 가히 우리 경교의 뛰어난 재능의 효험效驗이라 할 것 이다.

대시주금자광록대부大施主金紫光祿大夫이며 동삭방절도부사同朔方節度副使이고 시전중감試殿中監이며 자색가사紫袈裟를 하사받은 승 이사伊斯는 천성이 화평하고 시혜施惠를 즐기며, 도리를 청문聽聞하기만 하면 그대로 근행勤行하곤 하였다. 그는 멀리 왕사王舍의 성읍으로부터 마침내 내화來華를 하였으니 학술은 3대를 능가할 정도로 높고 예능은 완전무결할 정도로 넓었다. 당초 조정에서 충절을 바치니 기장記帳에 이름이 수록되기에 이르렀고, 중서령中書令 분양왕汾陽王 곽자의 공이 처음 삭방朔方에서 군사를 통솔할 때 숙종은 그로 하여금 곽자의를 호종扈從케 하시었다. 비록 그는 침소에 드나들 정도로 공과 친근하였지만 진중에서는 별상別狀을 자제하고 공의 손발이 되고 군의 이목耳目이 되어 녹祿과 하사품을 분급分給하니 가재家財 축적이란 없었으며, 은사恩賜의 주옥珠玉마저 되레 헌상하고 후무고사休務告辭로 받은 황금과 모직은 보시布施로 하였다. 또한 낡은 사원을 증축하여 법당을 넓히고 회랑과 처마를 숭엄하게 꾸며 마치 훨훨 나는 것만 같았다. 더욱이 이사는 경교에 몸바쳐 인仁으로 시은施恩하였으니 해마다 4사寺의 승도들을 모아 경건하게 행사하고 정성 들여 공양함이 50일이나 걸리곤 했다. 굶주린 자가 오면 밥을 먹이고 헐벗은 자가 오면 옷을 입혀 주며, 환자는 치료하여 회복시키고 사망자는 장례를 치러 안식하게 하였으니 청절淸節하다고 하는 사람들마저도 이러한 미덕을 들어본 바 없는데, 작금 평범한 경교 신도가 바로 그러한 사람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큰 비를 세워 삼가 다음의 송사頌辭로 미덕과 영광을 선양하나이다.

참된 주는 시원이 없나니 항시 정숙하고 자약自若하시며, 개벽開闢을 고안考案하고 화육化育하시며, 땅을 일으키고 하늘을 세우시었도다. 분신으로 강림하시어分身出代 제도함이 끝없으니 마냥 밝은 해가 떠 어둠이 가셔지듯 하나니, 이 모두가 참된 현묘玄妙를 증명함이라 할 것이다.

문덕文德이 혁혁하신 황제께서는 선대보다 탁월하시어 적시에 난을 평정하시고 하늘과 땅을 넓히시었다. 밝고 밝은 경교를 우리 당에 들어오게 하시고 성경을 번역하며 사원을 짓게 하시어 산 자와 죽은 자의 방주方舟로 삼으시니 만복萬福이 함께 이루어지고 만방萬邦이 평강平康하게 되었나이다.

고종高宗께서도 선업先業을 계승하시어 정교한 옥사屋舍를 건립하시니 궁전에 감도는 명랑함이 온 강토에 가득하고 참된 도가 명확하게 밝혀졌으며, 법주法主를 공식 임명하시니 사람들은 안락하고 평강하며 만물은 재앙과 고난이 없게 되었나이다.

현종玄宗께서는 신성神聖을 깨닫고 참된 정도正道를 닦아 수행하시니 황제의 방자牓子는 찬연히 빛나고 어서御書는 휘황찬란하며 초상은 주옥같이 빛나니 백성은 그이를 높이 공경하고 그이의 많은 공적은 한결같이 빛을 발하며 사람들은 그이의 경복慶福을 믿었나이다.

숙종肅宗께서 즉위하시니 천자의 위업은 고양되고 성자聖子는 일륜日輪처럼 마음을 펼치니 상서로운 바람은 어둠을 쓸어버리고 만복은 황실로 돌아오니 재앙은 영원히 사라졌나이다. 황제께서는 온갖 소요를 진정시키고 우리 중화中華 전역을 재건하시었나이다.

대종代宗께서는 인효仁孝 공의公義하시어 성덕盛德이 천지에 가득하시니 시물施物로 삶을 이루게 하시고 물자를 효용效用하시며, 향화香火로 공덕을 보상하시고 인애仁愛로 시제施濟를 행하시었나이다. 이에 태양이 동녘을 비춰 위덕威德을 가져왔고 달이 서녘에서 원만히 지었나이다.

건중황제建中皇帝께서 등극하시니 선조의 덕을 사모하시어 그를 기술하시고 무용武勇으로 사해四海를 숙청肅淸하시며 문치文治로 만방을 청신하게 하시고, 촛불로 사람들의 어두운 곳을 발게 비춰주시고 거울로 사물의 모습을 관찰하시니 천지사방六方이 밝게 소생하고 수많은 만인蠻人들이 이를 본받았나이다.

도道란 광대무한廣大無限함이니 그 감회 실로 깊을지어다. 이에 굳이 그 명칭을 언급하고 삼위일체를 널리 전하노라. 주께서는 만능하시고 신臣은 그를 기술할 수 있으니, 여기 큰 비를 새워 대길大吉,元吉을 삼가 송축頌祝하나이다.

대당大唐 건중建中 2년 신유년辛酉年 1월 7일

일요일大耀森文曰에 건립하다.

차시此時의 감독은 승僧 영서寧恕이니,

그는 동방의 경교도들을 알고 있다.

조의랑朝議郞 전행前行 대주사사참군

여수암呂秀巖 서書

조검교시태상어사자가사사 주승 업리主僧業利

검교건립비 승 행통僧行通

승 영보僧靈寶승 내등僧內澄승 광정僧光正 승 화명僧和明승 입본僧立本승 법원僧法源 승 심진僧審愼승 보령僧寶靈승 현람僧玄覽 승 경통僧景通노숙야구마老宿耶俱摩승 명일僧明一 승 보국僧保國승 지견僧志堅승 의제僧義濟 승 현덕僧玄德승 이용僧利用승 원?僧元□ 승 봉진僧奉眞승 지덕僧至德승 화광僧和光 승 경복僧景福승 태화僧太和승 숭덕僧崇德 승 덕건僧德建승 거필僧去甚승 광덕僧廣德 승 복수僧福壽승??僧□□승 보달僧寶達 승 ?명僧□明승 화길僧 和吉승 ??僧□□ 승 요?僧遙□승 일진僧日進??륜□□輪 승 ?화僧[這-言+(衣-■)]和승 숭경僧崇敬승 혜통僧惠通 승??僧□□?거신□居信승 문정僧文貞 승 문명僧文明승 소덕僧昭德승 요원僧曜原 승 인?僧仁□승 현진僧玄眞승 명태僧明泰 승 리?僧利□승 경덕僧敬德승 원?僧元□ 승 건?僧乾□승 수일僧守一승 광?僧光□ 승 문순僧聞順승 보제僧普濟승 응?僧凝□ 승 충화僧沖和승 영덕僧英德승 영덕僧靈德 승 영수僧靈壽승 환순僧還淳?경진□敬眞

後一千七十九年咸豐己未武林韓泰崋

來觀幸字畫完整重造碑亭覆焉惜故友

吳子苾方伯不及同遊也爲悵然久之 심

 

해설:

이 경교비에 나타난 용어는 불교, 유교, 도교의 대응술어對應述語로 적고 있다. 다음은 그 예이다.

삼위일체三位一體는 삼일묘신三一妙神으로, 천사天使는 신천神天으로, 육신강림肉身降臨은 동인출대同人出代 혹은 분신출대分身出代로, 동정녀童貞女는 실녀室女로, 팔복八福은 팔경八境으로, 부활승천復活昇天은 정오승진亭午昇眞으로, 구원救援은 제도濟度로, 종교宗敎 혹은 경교景敎는 법法으로, 주교主敎 혹은 감독監督은 법주法主로, 하느님은 건乾으로, 사원寺院은 법당法堂으로, 천지天地는 육합六合으로, 신망애 삼덕信望愛三德은 삼상三常으로, 칠일예배七日禮拜는 칠일일천七日一薦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용어의 혼용이나 차용으로 사경사불似經似佛 또는 불교의 옷을 입은 기독교라는 평판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경교비 역시 하단을 구성하는 거북 좌대와 연꽃, 여의주는 불교에서, 상단의 십자가는 경교, 그리고 십자가를 둘러싼 비천상과 구름은 도교에서 빌려온 것이다. 경교의 이러한 타협성은 미사 전례 중에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성체와 성혈을 거양하면서 종을 치는 대신 목탁을 두드리고, 사원 안에 인물 초상화를 걸어놓고 조상을 숭배하는 절충주의를 선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절충주의는 가톨릭이나 정교회에서는 금기시하는 것이었다.

중국에 전래된 경교의 가장 취약점은 토착화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경교비 3면에 기록된 76명의 사제 전원이 한문으로 된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토카라吐火羅나 페르시아에서 온 전도사들이란 점이다. 경교를 전래한 아라본으로부터 경교비가 세워진 시기까지 무려 150년이 지난 시점에서 당나라 사람으로 경교의 사제가 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점은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당시 수만 명의 신도를 거느린 경교였지만 당나라 사람으로 경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대부분은 서역에서 온 상인들이나 군인이 경교를 믿었다고 한다. 게다가 전교의 필수인 경전의 번역사업 또한 부진하였다. 경교의 이런 현상은 중국인들의 현세적인 종교관이나 인생관과는 많은 차이점을 보였기 때문에 경교의 중국인에 대한 선교는 한계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수일, 문명교류사연구, 사계절, 2002년, pp77-108>

 

경교景敎의 출현 배경:

경교景敎는 5세기 초 동방교회의 수위권을 둘러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좌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좌의 격렬한 권력투쟁과 그들을 떠받치고 있던 안티오키아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대립에서 시작되었다. 428년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키릴루스를 공격함으로서 양 진영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키릴루스와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 位格의 철저한 단일성과 신성을 주장하였다. 로고스가 人性을 마치 옷처럼 취했다는 것이다. 인성이 신성 안으로 스러져 ‘단일한 본성’ 즉 신성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으로 이 설을 단성설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마리아를 ‘하느님을 낳으신 분theo-tokos’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설은 좀 더 경건하고 민중들에게 친근한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와 안티오키아 학파는 본질의 단일성을 말하려 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구별을 철저히 고수했다. 이들이 이런 주장을 고수한 이유는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간성이 보장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마리아를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 대신에 ‘하느님을 낳으신 분’으로 부르는 것은 실제적인 복음 선포에서 웃음거리만 된다고 생각하였다. 네스토리우스의 추종자들이 주장한 이 설은 학문적으로 좀 더 확실한 해결책으로 여겨졌다.

이 둘의 주장은 타협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인 키릴루스에 의해 틀어지게 된다. 철저한 권력 정치가였던 키릴루스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선동과 조작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431년 키릴루스는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던 에페소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의 네스토리우스 총대주교가 도착하기도 전에 네스토리우스와 안티오키아 학파의 신학을 단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공의회에서 키릴루스의 단성설 그리스도론에 입각하여 마리아의 칭호도 ‘그리스도를 낳으신 분’이 아니라 ‘하느님을 낳으신 분’으로 확정하였다. 여기서 정해진 이 교의는 오늘날까지 교회의 교의로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키릴루스의 이런 행위에 네스토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역단죄逆斷罪와 역파문逆破門으로 응수하였다. 이에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3년 에페소에서 공의회를 열어 양측의 연합을 독촉했지만 실패하였다. 그리고 449년 에페소에서 다시 공의회가 열렸는데 이 공의회에서 키릴루스의 후계자이면 그에 못지 않은 권력욕을 가진 후임자 디오도쿠루스가 수도자를 선동하여 공의회 교부들을 폭행하고 안티오키아 학파의 주요 신학자들을 파면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보고를 받은 로마의 레오 교황은 이 공의회를 ‘강도들의 시노드’라고 지칭하였다고 한다.

이제 콘스탄티노플의 네스토리우스는 완전히 몰락한 것으로 보여졌다. 하지만 정치적 변화로 인해 상황이 반전되었다. 콘스탄티토플의 새로운 여제로 등극한 플케리아는 독단적이던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디오스쿠루스를 파면하기로 결심하고 451년 칼케돈에서 새로운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431년의 에페소 공의회만을 보편 공의회로 인정하였다. 칼케돈 공의회는 4차 보편 공의회로 꼽힌다. 여기서 디오스쿠루스는 굴욕적인 심리를 거쳐 파면되었다. 황제는 이 사건을 거치면서 공의회를 통해 자신의 언명을 공의회에 명령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 결과 키릴루스의 입장도 네스토리우스의 입장도 아닌 서방의 교부들인 테르툴리아누스, 노바티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의 서방 라틴 그리스도론이 부각되었다.

‘동일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 있어서도 완전하시고 인성에 있어서도 완전하시며, 참 하느님이요 참 인간이시다.’ 동일한 그분은 ‘신성을 따라서는 성부와 본질이 같으시고, 인성을 따라서는 우리와 본질이 같으시다.’ 그러므로 ‘동일한 그리스도는... 두 본성 안에서 뒤섞이지도 뒤바뀌지도 나누어지지도 갈라지지도 않고 존재하신다.’ 이 유명한 네 수식어는 알렉산드리아의 급진파-뒤섞이지도 뒤바뀌지지도 않음-와 네스토리우스-나누어지지도 갈라지지도 않음-를 다 함께 겨냥하고 있었다. 이 공의회는 라틴 그리스도론에 의해 꼴지어진 정식들을 받아들인 셈이 되었다. 그러나 칼케돈 공의회는 새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의 거룩한 교회에게 옛 로마와 동등한 수위권을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전통적인 다섯 총대주교좌 제도가 확립되었다. 그 서열은 로마-새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이 꼴찌라는 점이 의외이긴 하지만 이 틀은 앞으로도 그대로 유지되게 된다.

칼케돈 교의를 둘러싼 그리스도론 논쟁은 이후 정치 외교와 깊이 연관되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갈라지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서방 신학에 의해 꼴지어진 칼케돈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는 ‘칼케돈을 부인하는 교회들-이집트의 콥트교회, 시리아의 네스토리우스 교회, 아르메니아 교회, 게오르그 교회-이 존재하게 된다.

<한스 큉/이종한역, 그리스도론, 분도출판사, 2005년, pp252-263>

이 가운데 네스토리우스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박해를 피해 시리아, 페르시아를 거쳐 중국에까지 진출하였다.

by doldom | 2012/01/05 20:06 | 中世資料 | 트랙백

중세의 가격표⑵:

③도서圖書 및 교육敎育

수도원

연간 2파운드 가량

1392-1393년 경

기숙사비(클로이든)

주 당 2실링

1394년 경

교습료(클로이든)

연간 13실링 4펜스

기숙사비(옥스포드)

연간 104실링

1374년 경

제복비용(옥스포드)

연간 40실링

교습료(옥스포드)

연간 26실링 8펜스

대학 최소 비용

연간 2-3파운드

14세기 후반

상류층 학생

연간 4-10파운드

펜싱 교습료

한달 10실링

16세기

책 7권

5파운드 가량

1479년 경

책 126권

113파운드

1397년 경

책 대여 비용

pecia당 .5-1펜스

13세기 중반


※주 당 2실링이란 기숙사비는 엄청 비싼 금액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주 당 2실링으로 1년 52주를 계상하면 104실링이 나온다. 20실링이 1파운드이니까 대략 5파운드의 계산이 나온다. 이것은 대학 최소 비용인 년 간 2-3파운드보다 비싼 비용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라 할 수 있다.

※pecia란 책을 복사하는 단위를 말한다. pecia는 1줄 32자로 된 62줄 16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1pecia는 31,744자의 글자 혹은 7,500-8,000단어가 들어간다. 대여기간은 대략 1년 정도로 추측된다. 여기서 책을 대여하는 것은 연구의 목적이 아니라 필사가 목적이다. 그러므로 대여의 가치를 정할 때는 책의 내용이 아니라 부피를 측정했다. pecia는 책의 양을 재는 단위로 보면 된다. 참고로 중세 시대 성경을 필사하는데 대략 15개월 정도 소요되었다고 한다.

④건축분야

년간 가계세(런던브릿지):138채의 상가

160파운드 4실링

1365년 경

선술집 가계세(런던:권리세 포함)

200파운드

1365-1375년 경

오두막 대여료

5실링

14세기 경

숙련장인 공방의 대여료

20실링

가계 대여료

연 2-3파운드

오두막(헛간1, 방2)

2파운드

14세기 초반

요크의 연립주택

최고 5파운드

공방(가계,작업장,숙소 포함) 기와지붕으로된 2-3건초

10-15파운드

꾸며지지 않은 검소한 홀과 침실

12파운드

1289년 경

상점

33-66파운드

14세기 초반

안마당이 있는 집

90파운드 이상

런던의 금세공점(홀,부엌,식품저장실,침실 2)

136파운드

11365년 경

기와지붕의 커다란 헛간

83파운드

1309-1310년 경

30피트의 문루와 헛간,도개교의 계약서

5파운드 6실링 8펜스+작업복

1341년 경

총 견적

16파운드

40*18피트의 석재문루(석재가격 제외)

16파운드 13실링 4펜스

1313년 경

석재포함 총견적

30파운드

성벽의 탑

333파운드, 395파운드

14세기 후반

테터셔의 성과 대학

13년간 연450파운드

1434-1446년

글로스터 대수도원의 익랑

781파운드

1368-1373

성당의 석재공사(탑이 없는 125피트 건물)

계약서 상 113파운드

13세기


※종종 연간 대여료 20실링에 주 당 1펜스 씩 십일조가 부과되기도 했다.

※992-994년 Langearis의 타워를 짓는데 들어간 자재비와 인건비의 견적이다. 건물의 크기는 17.5m x 10 m이고 높이는 16m (3층)이었으며 벽은 1.5m 두께에, 두 외벽 사이에 잡석을 채워 시공하였다.

 

석회암: 약 1050 평방미터, 또는 2,600,000kg

목재: 47.5 평방미터, 또는 34,600kg

못: 3,400개, 또는 50kg

mortar(중세의 시멘트): 350 평방미터

mortar 만드는데 들어간 내용:

모래: 225 평방미터, 또는 360,000kg

석회암: 40 평방미터, 또는 160,000kg

green wood: 540 평방미터, 혹은 286,000kg

인건비, 작업 일자로 평균 환산하면:

조달: 14,250

운송: 2,880

노동력:

잡부: 63,500

석공: 12,700

대장장이: 1,600

⑤의류

유행하는 겉옷,제복

10파운드- 50파운드까지

14세기 후반

상류층의 신발

4펜스

1470년대

상류층의 부츠

6펜스

상류층의 지갑

1.5펜스

상류층의 모자

10펜스,1실링2펜스

장인의 소매없는 상의와 특제 겉옷

3실링

1285-1290년 경

지방 행정관의 암갈색 예복

6실링 4펜스

1349-1352년 경

지방 행정관의 붉은색 예복

5실링 3펜스

부유한 소작농의 린넨 슈미즈

8펜스

1313년 경

신발

6펜스

털옷

3실링

겉옷 튜닉

3실링

린넨 의류

1실링

모피 겉옷

6실링 8펜스

토지가 없는 농노의 튜닉

1펜스-6펜스

14세기 중반 경

소작농 튜닉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옷감

8펜스-1실링3펜스/yard

14세기 초반 경

좋은 품질의 모직물

5실링/y

1380년 경

황갈색과 적갈색의 고급천

6실링/y

1479-1482년 경

비단

10실링-12실링/y

15세기 경

의복에 입는 모피제품

의복값에 2-3파운드 더함

15세기 경

영주가 공급하는 향사의 연간 의복비용

2실링11펜스/y

1289-1290년 경

자유민

2실링/y

하급시종

1실링7펜스/y


* 느슨한 튜닉 한 벌을 만드는데 대략 2.25-2.5 야드의 천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14세기 후반에, 더블릿이라고 알려진 짧고 안감을 댄 튜닉이 등장하면서 옷의 장식성이 강화되고 화려해져서 더블릿 한 벌을 만드는데 대략 4 야드의 천이 필요했다.

 

by doldom | 2012/01/01 20:54 | 中世資料 | 트랙백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