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세귀르Montségur:1243-1244(4) 中世資料



몽세귀르 함락과 이후

1243년 베지에 공의회의 결정으로 몽세귀르의 박멸이 결정된 이후 알비 십자군은 카타리파의 근거지인 몽세귀르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물론 1241년에도 툴루즈 백작 라몽 7세가 프랑스 국왕과 가톨릭 교회의 압력으로 몽세귀르 성채를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시 몽세귀르 성채에는 500여 명의 카타리파가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교회에서 파견한 종교 심문관인 귀욤 아르날William Arnald과 에티엔 드 상 티에리Stephen de Saint-Thibéry가 몽세귀르에서 파견한 50명의 무리에게 아비뇨네Avignonet에서 종자들과 함께 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국왕은 이단의 근거지인 이 요새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1243년 세네샬 휴 드 아르키Hugues des Arcis가 인솔하는 1만 명의 국왕 군대가 몽세귀르로 접근하였다. 몽세귀르 성채에는 1백 명의 전사들과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완덕자Parfait와 난을 피해 성에 피신해 온 민간인이 있었다. 카타리파 전사들의 사령관은 라몽 드 페레유Raymond de Péreille였다. 그는 미레포와의 피에르 로제Pierre-Roger de Mirepoix의 사촌이었다. 난민의 대다수는 카타리파 신도Credentes였다. 이들은 대부분 성채 밖에 있는 산속 동굴과 움막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알비 십자군 사령관 휴 드 아르키는 성채를 공략하기 전에 먼저 성으로 반입되는 식수와 물품을 차단하기 위해 성채 주변을 포위하였다. 방어자들 역시 자신들의 공급원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방어자들은 다행스럽게도 다수의 지역 주민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소수의 증원 병력이 도착하였다.

몽세귀르Montségur는 라틴어 몽스 세큐루스mons securus에서 유래由來하였다. 뜻은 안전한 언덕/산이란 의미이다. 이 단어가 오크어로 흘러가 몽 세귀르mont ségur가 되었다. 몽세귀르는 카르카손 남서쪽 80에 위치해 있는데 랑그독 Languedoc과 미디 피레네Midi-Pyrénées 지역의 중간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1204년 몽세귀르는 피레네 산맥 남쪽 국경의 방어를 위해 요새화되었다. 해발 1,200m 산꼭대기에 건설된 몽세귀르 성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채城砦가 되었다. 몽세귀르 성은 랑그독 언어로 포그pog라고 부르는 암반 위에 건설하였다. 포그란 단어는 산꼭대기peak, 언덕hill, 산맥mountain을 의미한다.

알비 십자군에게 가장 극렬하게 저항한 세력은 툴루즈 백작이었다. 1215년경이 되면 랑그독 지역의 대부분이 국왕의 군사들에게 점령되고 남은 것은 이 지역 최대의 대귀족인 툴루즈 백작뿐이었다. 툴루즈 가문은 초기 프랑스의 여섯 귀족 가문 가운데 하나로서 랑그독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가문이었다. 초기 여섯 가문은 다음과 같다. 노르망디 공작Duke of Normandy, 아키텐 공작Duke of Aquitaine은 기엔 공작Duke of Guyenne으로도 불린다. 부르고뉴 공작Duke of Burgundy, 플랑드르 백작Count of Flanders, 샹파뉴 백작Count of Champagne 그리고 툴루즈 백작이다. 이들 외에 렝스 대주교-공작Archbishop-Duke of Reims, 랑의 주교-공작Bishop-Duke of Laon, 랑그르 주교-백작Bishop-Duke of Langres, 보베의 주교-백작Bishop-Count of Beauvais, 살롱의 주교-백작Bishop-Count of Châlons, 노이용의 주교-백작Bishop-Count of Noyon을 합하여 12 귀족이라고 부른다. 이 가운데 랭스 대주교-공작이 가장 수위에 위치한다.

거대한 석회암 암벽으로 보호되어 있는 성채를 공격하는 일은 어려운 과정이었다. 성채로 통하는 좁은 통로를 이용하여 공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네샬 휴 드 아르키는 여러 차례 공격을 가하였지만 성채 가까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휴 드 아르키는 산악지방인 바스크 출신의 용병을 고용하여 성채 공격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산악지방 출신의 바스크 용병들은 성채 동쪽면의 안전한 지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곳에 성벽을 공략할 수 있는 공성기와 투석기를 설치할 수 있게 되면서 공격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성벽 바깥과 동굴에서 생활하고 있던 난민들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격자들은 외보外堡barbican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하였는데 아마도 내부의 배신자가 알려준 것으로 보인다.

12443월 투석기가 성채 가까이 접근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 안쪽 거주 지역으로 바위덩어리를 쏘아 댔다. 성안의 방어자들은 외보에 들어온 공격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공격을 했지만 실패하였다. 외보 탈환에 실패한 방어자들은 세네샬 휴 드 아르키에게 투항의 신호를 보냈다. 휴 드 아르키는 협상을 신속하게 마무리 지었다. 그만큼 몽세귀르 성채 공격이 힘들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협상내용은 카타리파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주로 완덕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속하게 성을 떠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2주간의 휴전이 선언되었다. 성에 남은 카타리파 신자들은 2주 동안 기도와 금식을 하면서 보냈다. 이들은 카타리파의 의식인 콘솔라멘툼consolamentum/오크어로 콘솔라망consolament을 받았다. 카타리파의 콘솔라멘툼은 세례인 동시에 종부성사이며 완덕자들에게는 서품식이 된다. 콘솔라멘툼은 죽음에 임박해서 행해진다. 의식은 요한복음을 낭독하고 기도문 복되도다, 성부를 경배합니다Benedictus, Adoremus pater’를 암송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일 죽어가는 카타리교도가 콘솔라멘툼을 받은 후에 회생한다면 완덕자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카타리파 교도들은 일생을 통해 단 한번의 콘솔라멘툼을 받게 되는 데 그것은 죽음에 임박해서이다. 카타리파들은 그들의 예배 장소가 따로 없었다. 카타리 교도들은 가르침의 장소인 그들의 집이 있을 뿐이었다. 이 만인의 집은 개방되었으며 특별한 장식이나 조각이 없었다.

1244316210명에서 215명 사이의 카타리 교도들이 카타리파 주교 베르트랑 마트리Bishop Bertrand Marty의 인도 아래 성을 떠나 아래로 내려왔다. 이들은 화형주火刑柱도 원하지 않았다. 이들 모두는 자발적으로 장작더미 속으로 들어가 똑바로 선 채로 불길 속에 자신을 맡겼다. 이들이 화형된 후 성 안의 나머지 사람들은 떠나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들 가운데는 성의 방어 사령관이었던 라몽 드 페레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로 여기에 전설이 개입하게 된다. 카타리 교도들이 투항하기 전에 몇몇 완덕자들이 카타리파의 보물과 서적을 가지고 성을 탈출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1249년 툴루즈 백작 라몽 7세가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파리 조약에 따라 루이 9세의 동생인 푸아티에의 알퐁스가 툴루즈 백작의 작위를 승계하였다. 이로서 프랑스 남부 지역은 외형적으로 평화를 찾게 되었다. 로마 교회와 프랑스 왕은 자신들이 의도했던 바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카타리 이단은 완전히 근절된 것이 아니었다.

1256년 카타리파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케리비 성Château de Quéribus이 함락되었다. 코르비에르 산맥 Corbières mountains 해발 728미터 정상에 서있는 이 성은 카타리파의 마지막 근거지였다. 이 성은 몽세귀르가 함락되자 생존한 카타리파들이 아라곤 국경 근처인 이곳으로 모여와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255년 프랑스 군대가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몰려오자 카타리 교도들은 싸움을 하지 않고 스페인의 아라곤과 북부 이탈리아의 피에몬테Piemonte 지역으로 도피하였다. 이 지역은 카타리 신앙에 관대한 지역이었다. 또한 이 지역은 옥시탄 언어Occitan language 사용권이었다. 케리비 성은 이른바 카르카손의 다섯 아들들Five Sons of Carcassonne 가운데 하나인 성이었다. 이 다섯 성은 아귈라Aguilar, 페이르페르튀즈Peyrepertuse, 테름므Termes와 퓔오렝Puilaurens이다. 이들은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국경을 방어하는 중요한 다섯 성채였다. 1659년 피레네 조약Treaty of the Pyrenees으로 국경선이 이동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루시옹Roussillon과 페르피냥Perpignan을 얻으면서 국경선이 남으로 이동하였다.

케리비 성의 함락으로 남 프랑스의 고지대와 오크 지역의 영주들의 영지를 장악함으로서 프랑스 왕은 비로소 이 지역의 패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270년 성왕 루이Saint Louis가 사망하였다. 1226년 즉위하여 44년간 프랑스를 다스렸던 루이 9세는 부친으로부터 경건한 신앙심과 격렬함을 물려받았다.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십자군도 2번이나 참전한 루이 9세는 존엄왕 필립이 추구했던 강력한 프랑스를 위해 헌신하였다. 루이 9세가 사망했을 때 그는 자신이 상속받은 것보다 훨씬 위대한 왕권을 아들에게 물려주었고, 이때부터 카페 왕가의 왕은 세습 군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왕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최고회의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 무엇이든지 집행할 수 있는 신의 직계 대표자로 생각하게 하였다.

1271년 툴루즈 백작 푸아티에의 알퐁스가와 툴루즈 백작의 무남독녀인 잔느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랑그독은 합법적으로 프랑스 왕의 영지로 귀속되었다.

1275년 경이 되면 프랑스에서는 더 이상 카타리파 주교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교회와 프랑스 왕의 합작으로 시작된 알비 십자군 운동은 서로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군사적 권한이 없는 교회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나 독일 제후, 프랑스 왕이나 잉글랜드 왕, 로렌 공작이나 부르고뉴 공작의 군사력을 이용해 프랑스 남부의 카타리파를 일소하였다. 반면 프랑스 왕은 교회와 합작으로 프랑스 남부를 자신의 영지로 삼을 수 있었다. 대신 프랑스 남부는 사회적 대청소를 당함으로서 독립적인 지위를 영원히 상실하였다. 이 알비 십자군이 프랑스 남부에는 재앙이었을지 모르지만 중세사회를 재건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교회는 40일 간 이교도와 싸우는 십자군 봉사를 한다면 모든 죄를 용서한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였다. 이 제안은 그동안 교회의 가르침을 어긴 영주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즉 교회는 군사력을 제공받는 대신 죄의 용서를 통해 봉건영주들의 사회적 명망과 위신을 회복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이런 교회의 파격적인 제안에 응한 사람들은 중세의 봉건제도 속으로 안착을 하였다. 반면 이를 거부한 영주들은 교회의 반대편에 있어야만 했다. 이는 종교가 근간인 사회에서 큰 약점일 수밖에 없었다.

알비 십자군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프랑스의 필립 2세는 성직자와 부르주아 계층과 손을 잡은 최초의 국왕이었다. 프랑스 국왕은 철저한 실리 계산을 통해 알비 십자군을 조직한 반면 프랑스 국왕의 목표가 된 툴루즈 백작이나 아라곤 국왕은 카타리파 교도가 아님에도 북부 프랑스의 군대가 남쪽으로 진격함에 따라 이에 대한 반발로 카타리파에 가담하여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남부의 카타리파를 응징하면서 이단심문을 동원하여 개인에게 주어진 신앙의 자유를 말살시켰다. 1229년부터 로마교황청은 중요한 도시마다 도미니코회 수도자 2명으로 구성된 법정을 2명의 심문관들은 이단의 색출을 위해 일반조사와 개인소환이란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였다. 일반조사란 지역 주민 전체를 모이게 한 다음 개인적으로 공술서를 쓰게 하는 것이었다. 개인소환이란 용의자를 법정에 소환하여 엄격한 선서를 하게 한 다음 개인이 알고 있는 이단에 관한 모든 것을 진술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가혹한 물리적 방법이 사용되었음은 불문가지이다.

1321년 이탈리아에서 최후의 카타리파 주교가 체포되었다. 이탈리아 지역의 카타리파는 프랑스보다 더 오래 존속했지만 이를 기점으로 더 이상 카타리파는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1326년 카르카손에서 프랑스 최후의 카타리파 교도가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몽세귀르Montségur:1243-1244(3) 中世資料

몽세귀르Montségur 전야前夜

1209년 시몽 드 몽포르Simon IV de Montfort가 이끄는 알비 십자군이 랑그독 지역을 침입하여 베지에와 카르카손을 함락시키고 1244년 몽세귀르가 함락될 때까지 기간은 프랑스 남부지역에서 카타리파가 근절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덤으로 프랑스 남부지역 고유문화도 함께 사라졌다.

카르카손이 허무하게 함락된 이듬해 시몽 드 몽포르는 미네르브Minerve를 공격하였다. 미네르브는 몽타뉴 누아르Montagne Noire와 카날 드 미디Canal du Midi 사이에 있는 카타리 교도의 도시로 이 전해 베지에 학살 소식을 들은 카타리 교도들이 피난 온 도시였다. 알비와 카르카손의 자작이 된 시몽 드 몽포르는 6주 동안 이 마을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시몽 드 몽포르는 4대의 투석기를 동원하여 3방면에서 미네르브를 공격하였다. 세스Cesse 강 골짜기 위에 자리잡은 미네르브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 마을은 이중의 성으로 둘러싸여있었고 미네르브 자작 귀욤Viscount Guilhem of Minerve의 지휘 아래 2백 명의 용맹한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다. 미네르브가 함락된 것은 이 요새로 흘러들어가는 식수원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미네르브가 항복하였을 때 가톨릭으로 개종改宗을 거부하는 카타리 교도 140명이 화형 당하였다.

미네르브의 이단을 척결한 시몽 드 몽포르는 카타리 교도의 성으로 알려진 남쪽의 테름므 성Château de Termes으로 방향을 틀었다. 카타리 교도인 라몽Ramon de Termes이 소유한 이 성은 가파른 벼랑 위에 건설되었다. 삼면이 절벽으로 방어되는 요새인 이 성은 시몽 드 몽포르가 4개월 간 포위공격을 시도한 끝에 함락시켰다. 이 성은 공격자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지만 건조한 여름과 가을을 지탱할 식수 저장 물탱크가 비게 되면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후일담으로 시몽 드 몽포르가 사망한 뒤 이 성의 전 소유주인 라몽이 성을 다시 찾으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 성은 프랑스 왕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랑그독 지역을 지배하던 툴루즈 백작은 852년부터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던 루아르그 백작Counts of Rouergue의 방계 가문으로 툴루즈에 자리 잡고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툴루즈를 통치하였다. 툴루즈 백작의 시작은 프랑크 왕국의 봉신封臣이었으나 얼마 안가 독립된 세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툴루즈 백작 가문은 쿼시Quercy, 루아르그Rouergue, 알비Albi와 님Nîmes 때로는 셉티마니아Septimania와 프로방스 Provence까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들의 선조 가운데 라몽 4세 백작Count Raymond IV은 십자군에 참가하여 트리폴리 공국County of Tripoli을 세우기도 하였다. 툴루즈 백작 가문의 전성시대는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친 시기였다. 알비 십자군이 결성되어 이 지역을 공격하자 1229년 프랑스 국왕에게 굴복하였다. 워낙 저항이 격렬하였기에 프랑스 국왕이 이 지역을 실질적de facto으로 지배한 것은 1271년부터이다. 당시 알비 십자군에 대항하여 싸운 남부의 대귀족은 툴루즈 백작, 카르카손의 트랑카벨Trecavel 가문, 푸아 백작count of Foix , 코맹주 백작Counts of Comminges과 베아르 자작viscounts of Béarn 등이다.

알비 십자군이 랑그독 지역을 공격하자 툴루즈 백작 라몽Raymond VI, Count of Toulouse은 격렬히 저항하였다. 라몽 6세의 외조부는 프랑스의 루이 6세이고 외삼촌은 프랑스의 루이 7세였다. 1194년 부친의 뒤를 이어 툴루즈 백작의 작위를 승계한 라몽은 방대한 영지를 소유한 만큼 통제에도 문제가 있었다. 라몽은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바쳐야할 의무를 지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봉신으로 프로방스를 소유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헨리 2세는 부인을 통해 아키텐을 지배하면서 툴루즈 백작 기욤William IV, Count of Toulouse의 딸이며 할머니인 필리파 Philippa of Toulouse를 통해 툴루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였다. 아라곤의 알퐁소Alfonso II of Aragon는 아라곤의 새로 재정복한 영토를 식민지화하면서 이곳으로 이민을 장려하면서 랑그독 지역의 일에 간섭하였다.

툴루즈에서 라몽은 정치적 자치를 유지하면서 세금을 면제받고 자치 영토에 대한 그의 보호는 확대되었다. 당시 이 지역에는 카타리파가 많았지만 라몽은 이들에 대해 별다른 제제制裁를 가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태도는 교회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라몽은 카타리 이단을 믿지는 않았지만 카타리 이단에 대해 크게 억압하지도 않았다. 이는 그가 처한 정치적 상황에 따른 대처 방식이었다.

1213년 툴루즈 근처인 뮈레Muret에서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알비 십자군과 아라공의 왕이며 바르셀로나 백작인 페드로 2Pedro II de Aragón가 이끄는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페드로 2세가 전사하였다. 시몽 드 몽포르는 랑그독 지역을 침입하여 카타리 교도를 물리치면서 이 지역을 프랑스 왕에게 귀속시켰다. 오크 문명은 12세기 남프랑스와 스페인 북동지역, 이탈리아 서부지역에서 번성하였다. 이 지역은 랑그독Laguedoc, 아키텐l’Aquitaine, 가스코뉴Gascogne, 오베르뉴‘Auvergne, 리무쟁Limousin, 도피네Dauphiné, 카탈루냐Catalogne, 이탈리아 알프스 지역을 아우른다. 시몽 드 몽포르가 툴루즈 지역을 침입하자 툴루즈 백작 라몽은 쫓겨났다. 이에 라몽 6세는 자신의 매형인 아라공 왕 페드로 2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페드로 2세는 이를 받아들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툴루즈 근교의 뮈레에서 시몽드 몽포르와 결전을 치뤘다. 페드로 2세는 우월한 병력을 유지하였음에도 패배하였고 자신도 목숨을 잃었다. 이 전투는 알비 십자군이 치룬 마지막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성 도미니코는 십자군을 위해 묵주기도를 받쳤다고 한다.

1215년 라테라노 총 공의회에서 이단 심문령을 채택하였다. 이 공의회에는 70명의 총대주교와 대주교, 4백 명의 주교들, 8백 명의 사제들과 수도원장과 평신도들이 참여하였다. 이 총 공의회에서 그리스도 국가에 대한 교황의 지도권이 선언되었다. 총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성변화聖變化 교리가 채택되었다. 성변화란 미사 중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성별하여 거양擧揚하는 순간,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이다. 두 번째는 서방교회가 동방교회에 우선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서방 교회가 전 세계 그리스도교의 대표자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세 번째는 세속권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주교는 정기적으로 자신의 관할구管轄區를 사목방문하도록 명시하였다. 네 번째는 사제들의 도덕성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교황은 사제의 독신을 지지하고 음주와 도박, 사냥과 사치를 금하였다. 다섯 번째는 성직세습을 금지하였다. 여섯 번째는 평신도는 일년 한번은 사제에게 고백성사를 보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사제는 신자들이 이단에 빠졌는지 알아보게 하였다. 일곱 번째는 교회가 이단으로 판정한 사람은 세속 군주의 법정에 넘겨 재판을 받도록 하였다. 교회가 이단으로 확정한 사람을 세속 군주가 처벌하지 않으면 파문하고 그래도 저항하면 교황은 군주의 신민들이 저항하도록 명령을 내릴 수 있게 하였다. 절대권력을 누리던 이노켄티우스 3세는 총 공의회 이듬해인 1216년 사망하였다. 그의 후임으로 호노리우스 3세가 선출되었다.

1218년 알비 십자군의 군사적 지도자인 시몽 드 몽포르가 툴루즈를 공격하다 사망하였다. 시몽 드 몽포르는 1213년 뮈레 전투에서 승리한 후 랑그독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시몽 드 몽포르는 툴루즈 백작, 베지에와 카르카손 자작으로 임명되었지만 영주민들은 시몽 드 몽포르를 자신들의 영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툴루즈의 시민들은 1217년 전 툴루즈 백작 라몽 6세의 아들이며 정당한 상속자였던 라몽 7세에게 툴루즈의 성문을 열어주었다. 시몽 드 몽포르는 반란의 싹을 잠재우기 위해 저항의 머리인 툴루즈를 점령하려 하였다. 121710월 시몽 드 몽포르는 툴루즈를 되찾기 위해 포위 공격을 시작하였다. 아홉 달 동안 툴루즈를 공격했지만 시몽 드 몽포르는 이 도시를 점령할 수 없었다. 운명의 날인 1218625일 공격을 독려하던 시몽 드 몽포르는 성 안에서 발사한 투석기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 즉사하였다. 그의 죽음을 기록한 연대기 작가에 의하면 날아오는 커다란 돌멩이에 맞아 눈과 뇌장腦漿, 치아, 이마, 턱 등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피와 더러움으로 얼룩진 채 땅에 떨어져 즉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점령했던 카르카손의 주교좌主敎座 성당인 생 나자레Saint-Nazaire에 묻혔다. 시몽 드 몽포르의 시신은 후에 아들인 몽포르 라모리Montfort l'Amaury가 이장하였다. 카르카손 주교좌 성당에는 시몽 드 몽포르가 묻혔던 자리에 묘지석이 붙어있다. 시몽 드 몽포르가 죽음으로서 알비 십자군은 정열적이고 탐욕스러운 위대한 군 지휘관을 잃었다. 이 죽음으로 알비 십자군은 5년 동안 소강상태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프랑스의 사자왕 루이Louis VIII the Lion1219년부터 1226년 계속된 군사작전 역시 실패하였다. 사자왕 루이는 툴루즈 백작 라몽 6세의 복귀를 허락하고 그의 아들 라몽 7세를 후계자로 인정하였다. 툴루즈 백작 라몽 6세는 그의 통치 지역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사자왕 루이는 1223년 즉위하여 1226년 사망하였다. 그는 부친인 존엄왕 필립Philip Augustus을 대신하여 알비 십자군에 참가하였다.

1221년 카타리 파 이단과 격렬하게 투쟁한 도밍고 데 구스만Dominic de Guzmán 수도자가 사망하였다. 그는 123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성 도미니코의 후계자들은 앞으로 중세 유럽에서 이단 심문관으로 활약하게 된다.

1222년 푸아Foix 백작 라몽 로제Raymond-Roger와 툴루즈 백작 라몽 6세가 사망하였다. 라몽 6세의 뒤를 이어 라몽 7세가 작위를 승계하였다. 툴루즈는 여전히 이단인 카타리파에 관대한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1223년 프랑스의 존엄왕 필립이 사망하고 왕세자인 사자왕 루이가 즉위하였다. 공식적인 이단 심문소가 설립되었다. 이는 교회와 세속의 왕권이 이단에 강력하게 대응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카타리파의 중심지역인 랑그독 지역으로 이단 심문관들이 파견되어 지역의 영주들과 마찰을 빚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지역의 영주들에게 이단에 강력하게 대응할 것을 요구하였다.

1224년 알비 십자군은 툴루즈에서 일시 퇴각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강력한 요구와 프랑스 왕국의 이익을 위해 새로 즉위한 사자왕 루이가 군대를 이끌로 툴루즈 원정을 실행하였다. 툴루즈가 완강히 저항하자 1226년 교회는 툴루즈 백작 라몽 7세를 파문하였다. 이듬해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사망하고 그레고리우스 9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레고리우스 9세는 강력한 교황이었던 이노켄티우스 3세 교황의 조카로 도미니코 수도회에 이단 심문권을 부여한 인물이다. 도미니코 수도자들이 가진 종교재판의 막강한 권리-사도적 권한-는 주교들의 권한과 마찰을 빚어 불만을 야기하였지만 교황은 도미니코 수도회를 끝까지 옹호하였다.

1227년 카타리파 주교 카스트르의 귈라베르Guilhabert de Castres는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카타리파가 장악하고 있던 성 가운데 하나인 샤토 드 피우스Château de Pieusse에서 일 백 여명의 카타리파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카타리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라세스Razes의 주교직을 설정하기로 결의하였다. 십자군 초기에 아젱Agen, 롱베르Lombert, 생 폴Saint Paul, 카바레Cabaret, 세르비앙Servian, 몽세귀르에 6명의 주교가 있었다.

1229년 툴르즈 백작 라몽Raymond VII, Count of Toulouse과 프랑스 국왕 루이 9Louis IX of France는 파리 근교 모Meaux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루이 9세는 후일 교회로부터 시성諡聖되어 성루이라고 불린다. 당시 루이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모친인 카스티야의 블랑쉬 Blanche of Castile가 조약 체결에 크게 관여하였다.

툴루즈 백작 라몽과 루이 9세는 모에서 만나 1209년에 시작된 알비 십자군의 공식적인 종결에 동의하였다. 두 사람은 라몽의 딸 조안Joan, Countess of Toulouse과 루이 9세의 동생인 푸아티에의 알퐁소Alphonse, Count of Poitiers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하였다. 툴루즈 백작 라몽의 유일한 후계자인 딸 조안과 결혼할 알퐁소는 주레 욱소리스Jure uxoris가 되면서 라몽이 사망하면 조안의 남편으로서 툴루즈의 지배자가 됨을 의미하였다. 이 조약을 체결하면서 라몽은 자신의 영지 가운데 동쪽 지방을 루이에게 프로방스 지역은 교황에게 양도하였다. 이 협약으로 옥시탄Occitania 지역의 정치적 자치가 종언을 고하였다. 옥시탄 지역은 오크어Lenga d'òc를 사용하는 지역을 말한다. 오베르뉴, 가스코뉴, 랑그독, 리무쟁, 프로방스 등지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프랑스어의 yes”를 오크oc로 말하느냐 오일oil로 말하느냐에 따라 오크어와 오일어로 구분된다. 라몽 백작은 자신의 영지 반을 루이에게 양도하게 되었고 나머지 영지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권리를 보유하게 되었다. 라몽이 사망한 뒤에 그의 영지는 사위인 알퐁소가 차지하고, 알퐁소가 사망하면 프랑스 국왕에게 영지가 귀속되게 되었다. 그리고 툴루즈의 성채城砦는 순차적으로 해체하고, 카타리파에 대한 정치적 보호도 철회하도록 하였다. 이 결과 이 지역의 카타리파들은 정치적 보호 세력을 잃게 되었다. 파리 조약의 결과 수 세기 동안 옥시탄 지역에 인정되었던 정치적 자치가 사라지고, 카타리파의 보호막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프랑스 왕이었다. 그는 이 지역까지 자신의 통치권을 확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1232년 파리 조약 이후 남부 프랑스에서 카타리 이단에 대한 대대적인 척결작업이 전개된다. 이에 위기를 느낀 카타리파는 주교 카스트르의 귈라베르Guilhabert de Castres의 주도하에 몽세귀르Montségur로 들어가 거점을 형성하였다. 몽세귀르의 성채는 1204년 몽세귀르의 영주인 라몽 드 페레유Raymond de Péreille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몽세귀르는 카르카손 남서쪽 80에 위치해 있는데 랑그독 Languedoc과 미디 피레네Midi-Pyrénées 지역의 중간에 위치한 요충지로 피레네 산맥 남쪽 국경의 방어를 위해 요새화되었다. 해발 1,200m 산꼭대기에 건설된 몽세귀르 성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채城砦가 되었다. 몽세귀르 성은 랑그독 언어로 포그pog라고 부르는 암반 위에 건설하였다. 포그란 단어는 산꼭대기peak, 언덕hill, 산맥mountain을 의미한다. 몽세귀르Montségur는 라틴어 몽스 세큐루스mons securus에서 유래由來하였다. 뜻은 안전한 언덕/산이란 의미이다. 이 단어가 오크어로 흘러가 몽 세귀르mont ségur가 되었다.

재건축된 몽세귀르 성은 카타리파 이론가이며 주교인 카스트르의 귈라베르에 의해 카타리파의 본거지이며 종교의 중심지가 탈바꿈하였다. 1165년에 카스트르에서 태어난 귈라베르는 1193년 판야우스Fanjeaux에서 카타리파를 지도하였다. 1209년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의 무자비한 카타리파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자 귈라베르는 카타리파 성직자들을 안전한 샤토 드 몽세귀르로 철수시켰다. 귈라베르는 1223년과 1226년 사이에 카타리파 교회의 툴루즈 주교이자 가장 높은 지도자인 완전한 자Parfaits가 되었다. 그는 교황청과 카타리파 간에 신학적 논쟁이 시작되었을 때 카타리파를 대표하여 논쟁을 주도하였다. 1206년 몽레알Montreal에서 마지막 신학적 토론과 1207년 알비 십자군이 시작될 중간 시기에 귈라베르와 성 도미니코가 조우遭遇한 것으로 보인다.

귈라베르는 1229년부터 1232년까지 샤토 뒤드 베주 Château du Bézu에 상주하면서 박해와 위협 속에서도 랑그독 지역의 성과 마을을 사목 방문 하였다. 1232년 귈라베르는 몽세귀르의 영주인 라몽 드 페레유에게 의탁하였고, 라몽은 귈라베르에게 몽세귀르 성의 소유를 허락했으며 그곳에 카타리파 교회의 주교좌domicilium et caput가 자리잡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몽세귀르에 카타리파의 지도자들과 난민들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귈라베르는 1240년 사망하였고 후임으로 베르트랑 마르티Bartrand Marti가 주교직을 승계하였다.

1241년 툴루즈 백작 라몽 7세는 몽세귀르 성채를 공략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듬해 라몽 7세는 또 다시 프랑스 국왕에 대항하여 반란을 시도하였다. 이 와중에 아비뇨네 지역에서 종교 심문관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들 종교 심문관들은 몽세귀르에서 파견된 카타리파 무장단원이었다. 이렇게 되자 1243년 베지에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여 몽세귀르의 이단을 완전히 박멸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몽세귀르Montségur:1243-1244(2) 中世資料


카르카손Carcassonne

당시 유럽은 십자군 운동과 교황권의 확립으로 그리스도교 발전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십자군을 통해 그리스도교는 유럽이란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주도한 로마 교황청은 서유럽에서 자신의 권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또 성지聖地 탈환을 위한 십자군 운동은 신앙심이 기층基層까지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고 민중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민중들은 십자군 운동을 통해 확대된 유럽의 신앙심을 교황청이 내면적인 성숙보다는 교회조직의 강화에 주력하는 것을 보고 반발하였다. 유럽을 떠나 성지를 다녀온 사람들은 돌아와 자신이 속했던 이전 사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었다. 이들 가운데 소수는 진실한 신앙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생활화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성직자에게만 부여된 특권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 이들은 성직자보다 더 신심信心이 깊은 평신도에게도 이런 권리가 부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은 교황 중심의 교권주의와 신분제-성직자, 귀족, 평민-로 재편되어가는 사회와의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이러한 소수의 생각은 결국 교회와 교황의 권위에 대한 비판과 도전으로 이어졌고 여러 사회 운동이 출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것이 발도파와 카파리파였다.

특히 카타리파는 교회의 권위를 철저히 부정하였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의 미사, 원죄론, 성육화와 삼위일체를 거부하였고 성서도 오직 신약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청빈과 금욕만을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 카타리파는 성모 마리아를 천상의 존재로 인정하여 여성에게도 완전한 자라는 지도자의 역할을 부여하였다. 이는 여성을 배제하고 통제하려는 기존 교회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막달라 마리아를 성 베드로보다 더 중요시 여겼는데 이는 예수가 부활하였을 때 그 기적을 처음 목격한 사람이기 때문 이었다. 이는 가톨릭이 사도 베드로를 통해 정통성이 계승되는 것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었다. 또 카타리파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통해 모든 것을 이분법적인 논리로 이해하였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과 상충되는 것이었다.

이런 카타리파가 득세한 지역은 남 프랑스 지역이었다. 특히 피레네 산맥을 중심으로 프랑스 남서부의 랑그독 지방, 에스파냐 동부의 카탈루냐 지방에 널리 퍼져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지역 외에 라인란트와 저지대 지역, 북부 이탈리아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이들이 이 지역에서 지역 제후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에서였다. 프랑스 남부는 여전히 북 프랑스의 카페 왕가와는 별도의 독립적인 대제후가 통치하고 있었고,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이라는 허울뿐인 제국 속에 수많은 군소 제후국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북 이탈리아 역시 독립적인 도시국가로 나눠져 있었고, 에스파냐는 국토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아랍 세력과의 투쟁으로 통일된 왕국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 결과 군소 제후들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기존의 종교와 제도에 비판적인 카타리파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카타리파는 지방의 토착문화와 관습도 존중하면서 지역 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교리와 권위주의적 문화와 관습은 자유기질이 강한 이 지역 사람들의 거부감을 일으켰다. 이 지역의 대중들을 이단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을 돕기 위해 파견되었던 도밍고 펠릭스 데 구스만Domingo Félix de Guzmán-후일의 성 도미니크-은 오히려 이들의 생활에 감동할 정도였다. 그는 이 지역의 카타리파 사제들의 헌신적인 삶과 금욕적인 모습에서 가톨릭 사제의 현재적 위치를 가늠하게 되었던 것이다.

카타리파의 사제인 완전한 자들에게는 가톨릭 사제를 능가하는 권위가 부여되었다. 이들은 일반 카타리파 신자-봉솜Bones Hommes-보다 더 엄격한 생활을 했고 일 년에 세 차례씩 장기간 단식을 준수했다. 카타리파 사제들은 장남長男filius major과 차남次男filius minor이라 부르는 보좌의 도움을 받았다. 카타리파 사제가 사망하게 되면 그 자리는 장남이라 부르는 보좌가 계승하였다. 이들의 이런 전통은 고대 그리스도교 교회의 전통에 입각한 것이었다.

왜 카타리파가 랑그독 지방에서 일반대중들에게 환영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는 종교적 측면보다 사회정치적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당시 이 지역을 지배했던 것은 게르만법이 아니라 로마법이었다. 이런 연유로 북프랑스에서는 장자법이 시행되어 부모의 재산은 장남이 상속받았지만 남프랑스에서는 토지가 자식들에게 고르게 분배되었다. 이는 단일한 중앙집권이 불가능하고 지방분권적인 기능이 가동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봉건영주들은 억압보다는 타협을 통해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였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종교적 관용이 팽배하여 다른 지역에서 박해 받거나 거부당한 공동체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실제로 나르본 지방에서는 12세기에 유대교 랍비가 저술한 모세 오경에 대한 신비한 해석서가 출판되었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투르바두르가 유행하였다. 이런 분위기는 엄격하고 통제적인 북부와는 다른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본다면 더 복잡하였다. 과거 이 지역은 비시고트visigoth-西고트-가 지배한 지역이었다. 비시고트들은 정통 가톨릭을 신봉하는 대신 아리우스 이단을 선택한 집단이었다. 이후 이 지역은 이런 저항 정신이 계승되면서 권위에 대한 저항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 지역 최대 실력자는 툴루즈 백작이었다. 툴루즈 백작을 중심으로 카르카손 자작, 베지에 자작, 푸아 백작, 비고르 백작이 혈연과 정치적으로 얽혀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침해하는 로마 가톨릭의 추기경, 주교, 수도원장과 같은 성직자들에 대한 거부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이 교회 권위를 바탕으로 일반 대중들을 지배하려 하였다면 카타리파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추구하는 세속적 가치를 철저하게 경멸하였다. 가톨릭 고위성직자들이 북부의 영주와 같은 존재였다면 카타리파 성직자들은 일반 대중의 보시와 적선에 의지해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이었고 그 누구도 개인 재산이나 봉토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이런 카타리파 고위성직자들의 이런 검소한 생활은 지역 제후들 뿐 아니라 가톨릭 하위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 지역의 대귀족들은 로마가톨릭에 대한 견제의 의미로 카타리파를 용인하였다. 카타리파는 이 지역의 제후들의 보호를 받았지만 자신들의 어떤 정치적 권력도 구성하지 않음으로서 봉건영주들의 신임을 얻었다. 이는 봉건영주들을 교회 아래 두려는 가톨릭과는 대조적인 면이었다.

이 지역 상위 군주인 툴루즈 백작은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툴루즈 백작은 자신의 이웃인 잉글랜드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툴루즈 백작은 그의 정치적 재정적 기초를 제공하는 일반 대중들이 신봉하는 종교를 탄압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교회와 프랑스 국왕의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툴루즈 백작의 영토는 잉글랜드 플랜태저넷 왕가의 소유인 아키텐과 인접해 있었다. 즉 잉글랜드에서 프랑스 남부로 이어지는 앙주 제국의 끝 부분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이는 툴루즈가 잉글랜드의 영향력 아래 들어간다면 프랑스는 영원히 동서로 분단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국왕에게 있어서 이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프랑스 국왕은 이단이란 실마리를 이용하여 교회와 손을 잡게 된다.

카타리파가 이 지역에서 가톨릭교회를 능가하는 교세敎勢를 확보한 것은 로마 교회의 타락이 큰 몫을 하였다. 특히 고위 성직자들의 타락은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 마저 육체의 쾌락에 절어 영적개발을 하지 않아 하느님의 말씀을 선교하고 지도할 능력이 결여된 주교들의 모습에 탄식하였을 정도였다. 성직자들의 부도덕성과 성직매매는 신자들이 교회를 멀리하게 하는 이유였다. 당시 많은 사제들이 결혼하였거나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극히 일부 사제들은 처자를 부양하기 위해 술집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사제들은 자신이 속한 교회의 후원자들에게 보답해야 했기에 세례, 혼인, 병자 성사와 미사성제聖祭에 금품을 요구하였다. 또 성경의 번역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통한 종교교육이 불가능했기에 하급 성직자들의 지적 능력은 형편없었다.

교황은 이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특사와 도미니코 수도사들을 이 지역으로 파견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1204년 카르카손에서 카타리파와 가톨릭 신학자들 사이에 최후의 공개토론이 벌어졌다. 양측은 상대를 설득시키지도 굴복시키지도 못하였다. 교황은 최후의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마침내 1207년 이노켄티우스 3세 교황은 북프랑스의 부르고뉴 공작, 바르 백작, 느베르 백작, 샹파뉴 백작, 블루아 백작을 향해 알비 교도를 토벌할 십자자군 소집을 선포하였다. 카타리파를 알비 교도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교황은 십자군이 승리한다면 알비 교도를 지지한 귀족들의 영지를 분배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프랑스 국왕도 남쪽으로 자신의 영지를 확대할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십자군에 참여하였다. 카타리파와 알비 십자군 간의 전쟁은 1209년 시작되어 1255년까지 계속되었다.

1208년 카타리파 이단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랑그독 지역을 방문한 교황 사절 피에르 드 카스텔노Pierre de Castelnau가 암살되었다. 그는 1207년 론 강 계곡과 프로방스 지역에서 보의 영주Lords of Baux인 위그 3Hugh III, lord of Baux, viscount of Marseille와 툴루즈 백작 라몽 6Raymond VI, Count of Toulouse 사이의 분쟁에 휘말렸다. 이듬해 라몽 백작의 사주를 받은 카타리 교도에게 보의 영주인 위그가 암살당했다. 교회는 즉각 라몽 6세를 파문하고 알비 십자군을 파견하였다. 이 사건은 두 제후 사이의 분쟁에 관련된 수도자가 살해된 것임에도 교회는 카타리파를 박멸할 기회를, 프랑스 국왕은 남부 지역을 통합할 명분을 얻었던 것이다. 1209년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알비 십자군이 랑그독 지방으로 들이닥쳤다. 프랑스 북부에서 모집되어 남부로 내려온 3만 명의 알비 십자군은 무자비한 살육과 방화를 저질렀다. 이들의 행위는 종교를 방패막이로 한 조직적인 대량학살이었다. 1209년부터 1255년까지 감행되었던 알비 십자군은 세 단계로 구분된다. 첫 번째는 1209년부터 1215년까지로 랑그독 지역의 상당부분을 점령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두 번째는 1215년부터 1225년까지로 툴루즈 백작 라몽의 반란과 패배가 주를 이룬다. 세 번째 시기는 1226년부터 1255년까지로 랑그독 지역의 카타리파 박멸에 집중하면서 이 지역이 확실하게 프랑스 왕국으로 편입된다. 당시 알비 십자군에 대항하여 싸운 남부의 대 귀족은 툴루즈 백작, 카르카손의 트랑카벨Trecavel 가문, 푸아 백작count of Foix , 코맹주 백작Counts of Comminges과 베아르 자작viscounts of Béarn 등이다.

1208년 로마 교황청은 오크 지역의 대제후들에게 카타리파 이단자들을 더 이상 보호하지 말고 체포하라고 강요하였다. 이에 강력하게 저항한 툴루즈 백작은 교회로부터 파문당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 사절 피에르 드 카스텔노를 툴루즈 백의 친구인 카타리파 교도가 살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빌미로 교황은 십자군 파병을 요청했지만 정작 프랑스 국왕 필립 2세는 잉글랜드와 전쟁 중이란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12094회 십자군 원정이 시작될 무렵이 돼서야 북부 프랑스의 귀족들이 정치적 반목을 상쇄할 목적으로 알비 십자군 원정에 응하였다.

1209년 시몽 드 몽포르가 지휘하는 알비 십자군이 랑그독 지방을 침입하였다. 이때부터 거의 반세기 동안 남부 지역에서 종교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왜 프랑스 남부, 특히 랑그독 지방은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면서까지 카타리파를 옹호하고 보호하려 하였던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민중들의 향방이었다. 남부의 대귀족들은 일반 민중들이 교회의 사회적 지배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자신들이 지배하는 신민들 앞에서 교회의 파문을 겁낼 이유가 없었다. 이는 교회의 파문이 있더라도 영주들은 더 이상 자신이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추방되거나 거부되지 않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는 가톨릭교회가 남부에서는 더 이상 신자들에게 공동체에 속하느냐 아니냐를 결정한 권한을 상실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민중들은 더 이상 교회의 간섭을 원치 않았다. 이들은 교회에 가야한다는 의무감에서 해방되었고 부패한 성직자의 설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남부에서 교회가 더 이상 신자들의 행동이나 사상을 지배할 수 없음을 자인自認해야만 했다. 귀족들은 카타리파가 기존 교회에 대한 거부로 선서의식을 부정하는 것을 교묘히 이용하였다. 이는 봉건질서의 토대인 봉건제가 선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들의 이런 입장은 상위영주인 프랑스 국왕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알비 십자군은 랑그독 지방에 침입하여 첫 번째로 베지에Beziers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의 지휘관은 시토회 수도원장Abbot of Citeaux인 아르노 아말릭Arnaud Amalric이었다. 랑그독 지방 최대의 포도주 집산지集散地인 베지에는 부와 활력이 넘치는 도시였다. 알비 십자군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전날인 721일 베지에 성 밖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베지에의 주교 몽페이루의 르노Renaud II de Montpeyroux를 협상자로 보냈다. 르노 주교는 알비 십자군이 작성한 명단을 가지고 성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에는 카타리파 신자들 외에 도시의 부유하고 저명한 인물-유대인-들이 적혀있었다. 베지에의 관리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르노 주교는 소수의 가톨릭 성직자를 데리고 철수하자 베지에의 관리들은 전투 준비를 하였다. 만약 베지에가 무모하게 알비 십자군을 공격하지 않고 수비에 전념하였다면 전투는 길어졌을 것이다. 722일 베지에의 방어자들이 새벽에 소수의 알비 십자군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공격하였다. 베지에의 공격자들은 이들을 가볍게 물리쳤지만 이 소란을 틈타 알비 십자군이 열린 성문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베지에의 방어자들은 제대로 수비를 할 수 없었다. 알비 십자군이 베지에 성으로 난입하면서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알비 십자군은 교황사절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하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아이들과 아녀자들은 생 마리 막달렌St Mary Magdalene성당과 생 주드St Jude성당으로 피신하였다. 성역 안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살아남지 못했다. 알비 십자군은 성당 문을 부수고 난입하여 안에 피신한 모든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상황이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그제야 귀족들은 병사들의 약탈을 통제하였다. 사실 귀족들이 약탈을 통제한 것은 자신들의 몫을 차지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병사들은 자신들의 전리품을 귀족들이 빼앗는다 생각하고 갖지 못할 바에는 태우자는 심보로 베지에에 불을 질렀다. 불은 걷잡을 수없이 확대되어 하루아침에 2만 명의 사람이 사망하였다.

베지에를 폐허로 만든 알비 십자군은 이틀 후에 나르본Narbonne으로 향하였다. 지중해의 부유한 무역항인 나르본은 베지에의 학살 소식에 저항을 포기하였다. 725일 나르본의 대주교인 바르셀로나의 베렝가르Berengar of Barcelona와 나르본 자작 에이머리Aimery III of Narbonne는 카페스탕Capestang에서 알비 십자군을 만나 투항하였다. 이들은 여기서 카타리파 교도를 넘기고 이들과 유대인이 소유한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알비 십자군을 지원하기 위해 협조하기로 하였다. 이제 다음 목표는 도보徒步로 사흘거리에 있는 카르카손Carcassonne이었다.

726일 아질Azille이 알비 십자군에게 항복하였다. 알비 십자군은 아질에 들어가 카타리파 이교도를 시장 한 가운데 장작을 쌓아놓고 불태웠다. 이웃마을 라 레도르트La Redorte 역시 아질처럼 알비 십자군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생 나자르Saint-Lazare축일 전날인 728일 알비 십자군 선발대가 트레베Trèbes에 도착하였다. 선발대는 무저항의 표시로 열려있는 트레베 성문을 통과하여 입성入城하였다. 알비 십자군 선발대가 트레베 성으로 들어서자 하늘이 흐려지며 폭우를 동반한 천둥 번개와 폭풍우가 몰아닥쳤다고 한다. 북에서 온 병사들은 이 자연현상에 놀라 모두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으며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제 카르카손은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81일 알비 십자군은 카르카손에 도착했다. 베지에처럼 지리적인 위치는 인상적이지 않았지만 카르카손은 성벽이 가파르고 높이 솟아 있었다. 성벽을 따라 26개의 탑tower과 외보外堡barbican가 건축되어 있었고 도시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카르카손은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르Borgh와 카스텔로Castello라 부르는 두 성벽이 카르카손의 양 옆에 위치해 있었다. 보르와 카스텔로 사이에는 백작의 성Château Comtal이라 부르는 성의 중심부가 위치해 있었다. 백작의 성 앞으로는 가파른 절벽 아래로 상-비생St. Vincent지역이 있는데 이곳이 성의 가장 중요한 전략적 지점이었다. -비생은 보르와 카스텔로처럼 성벽이 없었다. 카르카손 성 안에는 1만 명이 넘는 인구와 성주城主24살의 라몽 로제 트렝카벨Raimon-Rogièr Trencavel을 따르는 기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군주를 위해 죽음도 불사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 트렝카벨 자작은 카바레의 영주Lord of Cabaret인 노련한 피에르 로제Peire-Rogièr의 도움을 받았다. 트렝카벨의 봉신인 그는 주군이 도움을 요청하자 몽타뉴 누아르Montagne Noir에 있는 그의 성으로부터 밤을 달려와 자신의 의무를 다하였다. 피에르 로제는 트렝카벨에게 알비 십자군을 상대로 전면전을 치르기보다는 성벽을 의지하여 장기적인 방어전을 수행하도록 충고하였다. 카르카손은 장기전에 버틸 만큼 충분한 병력과 자원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83일 알비 십자군은 카바레의 영주 피에르 로제가 예측한 대로 외드Aude 강으로부터 카르카손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상-비생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카르카손의 방어자들은 이곳을 집중적으로 방어했다는 증거는 없다. 만약 카르카손 방어자들이 상-비생을 적극적으로 방어했다면 양측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오소서 성령이여Sancti Spiritus를 부르며 공격자들을 격려하는 동안 투석기를 동원한 공격자들의 공격은 집요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방어측보다 10배나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다. 알비 십자군의 시몽 드 몽포르Simon IV de Montfort가 선두에 서서 방어자들의 참호를 점령하였다. 2시간 후 방어자들은 성벽 안으로 후퇴하였고 알비 십자군은 상-비생을 점령하였다. 알비 십자군은 방어용 참호를 모두 메우고 공격 무기를 배치하는데 방해가 되는 건물을 파괴한 뒤에 공성용 무기를 배치하였다.

이로 인해 카르카손은 식수원食水源이던 외드 강을 이용할 수 없어 성 안의 우물에 의존해야 했다. 알비 십자군은 상-비생을 장악한 기세로 카르카손의 오른쪽에 위치한 보르 지역을 급습하였지만 실패하였다. 보르의 방어자들은 화살과 돌과 뜨거운 기름을 이용해 공격자들을 격퇴하였다.

포위 공격기간 동안 알비 십자군의 기술자들은 다양한 공격 무기를 구상하여 배치하였다. 이들은 노포弩砲catapult와 다양한 투석기magonels, tribuchets를 만들어 배치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고양이gata라 부른 공성용 무기였다. 네 바퀴가 달린 마차 지붕에 쇠가죽을 덮어씌운 공격용 무기는 병사들을 불화살과 돌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 성벽 가까이 접근하게 하였다. 이를 이용해 성벽에 구멍을 내거나 터널을 파 성벽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 알비 십자군은 이 공성용 무기를 동원하여 보르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전세가 여의치 않자 트렝카벨 자작은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84일 카르카손의 트렝카벨 자작은 자신의 상위 군주인 아라곤의 페드로 2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아라곤의 페드로 2세는 랑그독 지역의 대군주인 툴루즈 백작 레몽 6세의 처남이었다. 카르카손의 트렝카벨 가문과 아라곤의 페드로 가문은 역사적 유대가 견고한 사이였다. 구원요청을 받은 페드로 2세는 이튿날 카르카손으로 와 트렝카벨 자작과 의견을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페드로 2세는 카르카손이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 지적을 하였다. 이에 덧붙여 페드로 2세는 트렝카벨 자작이 교회와 화해하기를 권하였고 이들과 협상하기를 권하였다. 이에 트렝카벨 자작은 페드로 2세를 알비 십자군 측에 보내 양측의 협상을 중재하도록 하였다. 페드로 2세는 카르카손의 안전을 위해 협상을 시도했지만 알비 십자군의 사령관인 아르노 아말릭은 카르카손을 알비 십자군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트렝카벨 자작이 지명하는 12명의 가신들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성을 떠나는 것을 허락한다고 하였다. 트렝카벨은 당연히 이를 거절하였다. 중재에 실패한 페드로 2세는 아라곤으로 떠났고 양측은 최후의 일전을 위한 대치를 계속하였다. 카타리 교도가 아닌 트렝카벨 자작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개화된 인물이었다.

86일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축일顯聖容에도 양측은 무의미한 전투를 지속하였다. 87일 알비 십자군은 공성용 무기를 앞세워 보르와 카스텔로 쪽에서 공격을 개시하였다. 동시에 고양이를 이용해 단단한 성벽 밑을 파서 화약을 설치하였다. 88일 알비 십자군은 성벽 아래 설치한 화약을 터뜨렸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보르 지역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자 알비 십자군이 무너진 틈새로 밀려들기 시작하였다.

88일 알비 십자군은 보르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이곳을 통해 물밀 듯이 들어왔다. 방어자들은 보르를 포기하고 카르카손 성 안으로 후퇴하였다.

완강하게 저항하는 카르카손을 알비 십자군은 점령할 수 없었다. 814일과 16일 사이에 양측은 다시 협상을 시작하였다. 카르카손의 트렝카벨 자작과 알비 십자군의 책임자인 아르노 아말릭 사이의 협상을 중재한 사람은 툴루즈 백작 라몽 6세였다. 협상에 응한 트렝카벨 자작은 소수의 기사를 대동하고 느베르 백작 에르베 드 동지Hervé de Donzy, Count of Nevers의 천막으로 갔다. 느베르 백작의 천막으로 들어간 트렝카벨 자작은 알비 십자군 측에 의해 체포되었다. 트렝카벨 자작은 자신이 체포를 조건으로 카르카손의 카타리 교도, 유대인, 가톨릭 신자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고 떠날 수 있게 하였다. 단 떠나는 자들은 몸에 지닌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었다. 카르카손은 영주인 트렝카벨의 희생으로 큰 희생 없이 함락되었다.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 트렝카벨 자작은 그 해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몽세귀르Montségur:1243-1244(1) 中世資料

이야기의 시작

중세 중기에 유럽에 발호跋扈하였던 이단異端 가운데 종교개혁 시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것은 발도파Waldensians와 카타리파Cathari였다. 발도파의 현재 명칭은 Waldensian Evangelical Church이다. 이들은 현재까지도 살아남았다.

발도파는 평신도의 경건성敬虔性 전통을 주장한 이단이었다. 리옹의 고리대금업자 발도Petrus Valdes의 추종자인 발도파는 개인재산을 부정하고 구걸로 먹고 살며 소박한 생활을 통해 사람들을 갱생시키려 하였다. 이들은 서품敍品된 성직자를 갖지 않고 대신에 사도使徒, 장로長老, 지도자指導者, 형제자매兄弟姉妹들이라고 알려진 지도자와 벗들이라고 알려진 신자信者로 구성되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 년 동안 혹독한 훈련과정을 거쳐 세속을 포기하고 동정童貞을 지키며 시주施主와 편력 설교를 하며 살아가겠다는 맹세를 해야만 했다. 벗들이라고 알려진 일반 신자들은 이런 지도자들을 뒷바라지 하였다. 이들의 청렴성과 경건성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발도파는 가톨릭의 칠성사七聖事-세례洗禮, 견진堅振, 성체聖體, 혼인婚姻, 병자病者, 고백告白, 신품성사神品聖事-를 인정하지 않고 세례, 혼인, 성체 성사 만을 받아들였다. 발도파는 청빈淸貧을 가장 큰 가치로 여겼다. 이들에게 대다수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은 청빈을 소홀히 함으로서 자신들의 임무를 다 하지 못한 타락한 성직자였다. 발도파는 가톨릭의 성당과 전례와 성가 같은 외형적인 것도 거부했으며 연옥煉獄 교리를 부정하고 성인공경聖人恭敬과 같은 가톨릭 권위에 바탕을 둔 전승들 역시 거부하였다. 발도파는 일 년에 한번 영성체를 하고 주일을 지키는 것만을 믿었다. 이들의 이런 주장은 대부분의 이단이 창설자가 사망하면 소멸되는 반면 발도파는 발도가 사망한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실제로 발도파는 발도의 사망 후에도 살아남은 중세 중기의 유일한 이단이었다.

발도파는 1205년 교리상의 이유로 프랑스파와 이탈리아파로 분열되었다. 1218년 두 분파 사이의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베르가모에서 발도파 공의회를 개최했지만 둘 차이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였다. 이들은 교회의 강력한 탄압을 받았다. 발도파 마을 전체를 점령하여 모두 화형주火刑柱에 매달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교회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들의 극렬한 저항은 14세기 연대기 작가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완강함을 보여주었고, 즐거운 마음으로 형장刑場으로 갔다고 기록할 만큼 자신들의 원칙과 신앙을 고수하였다. 14세기 프랑스의 발도파는 왕국의 강력한 탄압과 야만적인 공격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들은 알프스 산간 지역으로 도피하여 16세기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였다. 발도파는 카타리파의 이원론적 영지주의를 거부하였다.

교황 프란치스코 1세는 2015622일 교황으로서는 처음 이탈리아의 토리노에 있는 발도파의 교회를 방문하였다. 교황은 그 자리에서 과거에 우리들 관계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신앙의 이름으로 저지른 폭력과 갈등을 보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죄인임을 인식할 수 있고 서로가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알 수 있는 은총을 주시도록 주님께 청해야만 한다고 말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운동이었던 성 프란치스코(1181/82-1226)는 교회의 인준을 받은 반면, 발도파는 가톨릭의 탄압을 받고 종교개혁 뒤로는 일부가 개신교에 합류하면서 크게 약해졌다. 지금은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주를 중심으로 수만 명의 신자가 남아 있다. 토리노는 피에몬테 주의 주도다. 교황은 그간 가톨릭교회와 발도파 사이에 진행된 교회일치 대화가 공통의 뿌리를 많이 확인했다고 높이 평가하고 앞으로도 이 대화를 계속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일치unity란 획일성uniformity과 같은 것이 아니며 성령의 열매라고 지적했다. 이날 만남이 끝날 때, 발도파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16세기에 처음으로 프랑스어로 번역된 성경 한 권을 선물로 줬다. -가톨릭 뉴스, 지금여기 2015623일자 참조-

발도파와는 또 다른 이단이 12세기 가톨릭의 금욕주의적 전통에 접합하여 탄생하였다. 이 이질적인 이단은 가톨릭이 중세에 접했던 가장 위협적인 이단이었다. 그것은 3세기 페르시아에서 발흥한 외래종교인 마니교Manichaeism의 영향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마니교는 하나의 창조주가 아니라 선과 악의 창조주創造主가 있다고 가르쳤다. 선의 창조주는 영적靈的인 것을 책임지고 악의 창조주는 물질적物質的인 것을 책임진다고 가르쳤다. 이 두 창조물은 개개의 인간 안에서 각축角逐을 벌인다고 하였다. 이 이원론적二元論的 세계관을 가진 마니교는 자신 안에 있는 악의 세력을 억누르는데 목표를 두었다. 물질적인 것은 악이고 영혼은 선이기 때문에 각 개인은 물질을 영혼으로부터 떼어내어 빛의 발원지인 빛의 왕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물질적인 것-물질적인 부, 섹스, 고기 등-을 거부해야만 했다. 이 결과 마니교의 지도자들은 독신獨身에 채식주의자菜食主義者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마니교는 폭력을 거부했기에 마니 조차도 자신을 박해하는 집단에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투항하여 살해된 평화주의자이기도 했다. 엄격하게 수련된 마니교의 지도자들은 청중聽衆들이라고 부르는 신자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청중들은 고기를 먹고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주기적으로 금식禁食을 하고 수시로 성적 금욕禁慾을 행할 것을 요구받았다.

10세기 경 마니교에서 영향을 받은 이단인 보고밀Bogomil파가 불가리아에서 출현했다. 지도자인 보고밀은 자신의 가르침을 신약성경新約聖經에 두고 고백성사, 영성체, 세례성사, 미사 전례 등을 거부하였다. 보고밀파는 특히 십자가十字架를 혐오했는데 이는 십자가가 그리스도를 고문拷問한 도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보고밀파 역시 물질계는 신의 은총恩寵을 잃은 장남 사타나엘Satanael이 지배하지만 영적인 세계는 하느님의 둘째 아들인 예수Jesus의 영토로 이루어졌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믿었다.

불가리아에서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을 따라 서유럽에 들어온 보고밀파는 기존의 반 성직자적 이단 전통과 결합하면서 색다른 형태로 변형되었다. 보고밀파에 대한 서유럽 최초의 기록은 1143년 슈타인펠트 수도원Kloster Steinfeld 원장 에베르빈Eberwin von Helfenstein이 새로 생겨난 이단을 퇴치하기 위해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 처음이다. 1163년 쉐나우Schönau의 에크베르트는 카타리파를 반박하는 13개 설교라는 저서에서 처음으로 이 종파宗派를 이단으로 소개하였다. 카타리파는 저지대와 라인란트에 뿌리 내리고 프랑스 남부에서도 강력한 이단이 되었다. 프랑스 남부의 카타리파는 1170년 카타리파 교회를 조직하였다. 이들 남부 프랑스의 카타리파는 그들의 거점이 있는 알비Albi의 이름을 따서 알비-카타리파로 알려지게 된다.

카타리파는 지역과 개인적인 이해관계로 인해 내부 분열이 가속화 되었다. 그럼에도 카타리파가 가톨릭에 큰 위협으로 다가온 것은 이들은 분열되어 있으면서도 동일한 기본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 역시 보고밀파의 육체와 영혼은 상이한 세력의 피조물이라는 이원론적 교리를 믿었다. 이들은 물질적인 것을 거부하고 연옥煉獄, 망자를 위한 기도, 성변화聖變化Incarnatio, 세례성사를 부정하고 위령안수예식consolamentum만을 신봉했다. 위령안수예식이란 신자들은 이 예식을 통해서만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영과 결합되고 순수해져 깨끗하게 된다는 교리였다. 그래서 카타리파 신자들은 이 위령안수예식을 임종 때 받았다. 카타리파 역시 완전무결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지도자들이 신도들을 이끌었다.

중세의 카타리파가 가톨릭교회에 위협으로 다가온 것은 그들의 금욕적인 생활 때문이었다. 이들은 당시 고조되던 반 성직주의와 종교적 열정에 힘입어 지식층 보다는 대중에게 커다란 힘을 발휘하였다. 카타리파의 교리는 남녀노소, 신분의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막론하고 똑바로 살기만 한다면 완전무결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단순한 것이었다. 이들은 이원론적 교리를 신봉함에도 자신들이 가톨릭이 실천하는 것보다 더 순수한 그리스도교를 고수固守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로마 가톨릭은 부와 권력權力으로 인해 더 이상 복음의 진리를 실천할 힘을 상실했기 때문에 자신들 만이 이 위기의 종교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근간이 되는 것이 청빈한 삶과 위령안수예식이었다. 사람들은 카타리파의 신학은 의심스러워했지만 그들의 정신과 행동은 지지를 받았다. 이들의 이런 사상은 기층민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교회의 이단에 대한 대응은 즉흥적이고 간헐적이었지만 교황 알렉산데르 3세 이후부터 조직적으로 바뀌었다. 이를 위해 교회는 설득說得, 탄압彈壓, 악마화惡魔化라는 세 가지 방법을 동원하였다. 설득은 강론과 선교활동에 의한 개종 작업을 말하고, 탄압은 고행의 강요와 사형 및 추방의 방법이 동원되었다. 악마화 작업은 일종의 선전전으로 이단자들을 성적性的 이탈자 및 방탕자로 낙인찍어 선전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이단자에 대한 억압 조치가 적절하고 합법적인 정부에 의해 행사된다면, 그것이 복수復讐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이단자에 대한 정의감正義感과 사랑에 바탕을 둔 것 이라면 허용될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교회의 이단자에 대한 교화적敎化的 대응은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사망 이후에 강경하게 변화한다. 후임 교황 루키우스 3세와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는 이단에 대해 교권敎權과 속권俗權이 공동으로 대처하기로 합의했으며 1184년 베로나 공의회에서 이단 일소를 위한Ad abolendam’이란 교서를 반포하였다. 이는 이단에 대해 초국가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12세기 최초의 시도였다.

교서 이단 일소를 위한Ad abolendam’은 이단을 명칭별로 분류하여 비난하였고, 이단자들이 교황이나 주교의 허락없이 설교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돕는다고 보았다. 이단을 근절하기 위해 주교는 이단의 소문이 있는 본당과 그 본당에서 의심의 소지가 있는 개인을 조사해야하며 이 과정에서 선서를 거부하는 행위는 이단으로 간주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단자들은 즉시 파문되었고 이단으로 파문된 신자들은 세속 당국에 인도되어 처벌을 받게 하였다. 이 교서는 이단자와 사도적 복음주의자使徒的 福音主義者를 같은 부류로 동일 시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래는 이 교서의 일부 내용이다.

우리는 이 헌장을 통해 사도적인 권위에 의거하여,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간에, 모든 이단을 단죄한다. 먼저 우리는 카타리파들과 파타리누스파와 자신을 거짓된 이름을 가지고 후밀리아파나 리옹의 가난한 이들(발도파)로 속여 부르는 이들과 파사지아파, 요셉파, 아르놀두스파는 영원한 파문에 처해짐을 결정하는 바이다.

많은 이들이 겉으로는 신심이 있는 체하면서....설교할 권위를 요구하기 때문에....금지되었거나 파견받지 않았음에도, 사도좌 또는 지역 주교로부터 어떠한 권한을 부여받지 않고 공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감히 설교하려고 하는 모든 이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성사, 세례, 죄의 고백, 혼인 또는 그 밖의 다른 교회적인 성사에 대하여 거룩한 로마 교회가 설교하고 지켜 오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거나 가르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하지 않는 모든 이를, 이 로마 교회가 또는 개별 주교들이 그들의 교구에서 성직자들의 자문을 받거나, 또는 주교좌主敎座가 공석인 경우, 성직자들 스스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이웃 주교들의 자문을 받아서 이단으로 판결한 모든 이를 우리는 똑같이 영원한 파문의 굴레에 묶는다.”

이 교서는 너무 광범위하고 막연하여 큰 효과를 볼 수 없었다. 루키우스 3세의 후임인 이노켄티우스 3세는 선임자의 정책을 계승하기 위한 포괄적인 정책을 내놓았는데 이단에 대한 십자군 운동이었다. 교황은 이와 함께 교회 내의 개혁주의자들에 대하여 보다 유연하고 세련된 접근을 시도하였다. 이노켄티우스 3세는 불신앙과 불복종의 차이를 이해하고 복종을 시금석으로 삼아 이단을 두 부류로 분류하였다. 이단이더라도 교황에게 충성하고 교회의 계서제階序制Ordo를 인정한다면 이단적 관습을 부분적으로 채용하더라도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또 자발적으로 청빈淸貧 생활을 고수하며 교리 상으로 정통을 지키며 교회의 허락 없이 설교를 하는 집단은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한에서 교회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1201년 교황은 두 번째 부류를 3개의 교단으로 재편하였다. 첫 번째 교단은 삭발례削髮禮를 하고 수도회의 신분을 누렸다. 여기에는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가 포함된다. 두 번째 교단은 가족과 떨어져 종교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남녀 평신도이다. 세 번째 교단은 가정생활을 영위하지만 엄격한 복음적 원칙에 따라 생활하는 평신도 들이다. 이들은 신학적 문제를 건드리지 않고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한 한에서 부분적으로 강론의 권한도 부여받았다.

이렇게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교회는 카타리파의 근절을 위한 전면적인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노켄티우스 3세는 이단異端과 반역反逆을 동일시하여 이단자들의 상속권을 영원히 박탈한다고 위협하였다. 교회의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카타리파는 프랑스 남부의 랑그독Languedoc 지방에서 완강하게 저항 하였다. 1208년 교황 사절 피에르 드 카스텔노Pierre de Castelnau가 암살되었다. 피에르 드 카스텔노는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 태어나 시토회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보의 백작count of Baux과 툴르즈 백작 라몽Raymond VI, Count of Toulouse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다 라몽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암살자와 라몽은 즉각 파문되었고 피에르 드 카스텔노의 죽음으로 알비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툴르즈는 카타리파의 근거지였다. 이에 교황은 알비 십자군을 선언하였다. 교황은 북 프랑스의 귀족들에게 남부로 내려가 이단을 근절하도록 요청하였다. 1209년 아르노-아말릭Arnaud Amalric이 알비 십자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베지에르Béziers를 점령한 뒤 이단자와 가톨릭 신자를 구분하는 방법에 대한 논쟁이 있을 때 그 유명한 말을 하였다. ‘모두 죽여라. 주님은 누가 당신의 어린 양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니라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 이 베지에르의 학살은 수년 후 몽세귀르의 학살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알비 십자군은 외적으로 신앙심에 입각한 십자군이었기에 여기에 참가한 북부의 귀족들은 초기에는 포위 공격이 주를 이뤘다. 이런 관계로 초창기 알비 십자군 전쟁은 어떤 결말을 내지 못한 채 수년간 질질 끌게 되었다. 이런 사정으로 결국 프랑스 왕의 개입을 불러일으켰고 국가의 대대적인 이단 박멸 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살인, 방화, 약탈이 극대화 되었다. 이때부터 국왕의 영토에 대한 욕심과 북부 귀족들의 탐욕이 본격적으로 발동되면서 엄청난 비극이 벌어지게 된다. 결국 강력한 국왕의 군사작전으로 카타리파 지역 대부분이 점령되었다. 1243년 몽세귀르Montségur에서의 저항을 마지막으로 프랑스 남부에서 카타리파는 근절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카타리파의 지도자인 완전무결한 사람들은 자신들 고유의 복장인 검은 색 옷을 더 이상 입지 않았다. 1275년경에 이르면 프랑스에 카타리파 주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1326년 카르카손Carcassonne에서 프랑스 최후의 카타리파 신자가 화형에 처해졌다. 이탈리아에서 카타리파는 프랑스보다 더 오래 존속하였지만 1321년 최후의 카타리파 주교가 체포됨으로서 실질적으로 이탈리아에서의 이단도 종식되었다.   


앙주 백작Count of Anjou(4) 中世資料

앙리Henry Curtmantle/Court-manteau1133년에 태어나 1189년 사망하였다. 후일 잉글랜드의 헨리 2세이다. 그의 별명인 curtmantle는 고 프랑스어 Court-manteau에서 유래하였다. 커틀멘틀은 아마도 그가 입었던 소매 없는 짧은 망토 때문에 붙여진 별명으로 보인다. 앙리는 11541025일 스티븐 왕이 사망하자 왕좌를 물려받기 위해 잉글랜드로 들어가면서 짧은 프랑스 식 외투를 입었는데 그것이 그대로별명이 되었다. 그는 역사에서 황후의 아들 헨리Henry FitzEmpress 혹은 헨리 플랜태저넷Henry Plantagenet으로도 호칭된다. 헨리는 앙주 백작, 멘 백작, 노르망디 공작, 아키텐 공작, 낭트 백작, 잉글랜드의 왕과 아일랜드의 군주Count of Anjou, Count of Maine, Duke of Normandy, Duke of Aquitaine, Count of Nantes, King of England (115489) and Lord of Ireland란 칭호를 가지고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였다. 헨리는 이 지역 외에도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브르타뉴에도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151년 부친인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이 사망하자 앙리는 앙주를 상속받았다. 그리고 아키텐의 엘레오노르Eleanor of Aquitaine와 결혼하였다. 앙리 역시 부친 조프루아 플랜태저넷처럼 11살 연상의 여인과 결혼하였다. 앙주의 앙리는 열 아홉 살이었다. 신부는 서른 살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였다. 그녀는 얼마 전 프랑스의 루이 7Louis VII of France와 이혼한 몸이었다. 정확히는 혼인 무효. 활기차고 부유한 아키텐 출신의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의 금욕적인 생활을 힘들어 했다. 루이 7세는 엘레오노르의 분방함도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낳아 준다면 개의치 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엘레오노르는 루이 7세의 이런 바램을 무산시켰다. 루이 7세의 스승인 대수도원장 쉬제는 두 사람의 결혼생활을 이어주는 끈이었다. 하지만 쉬제가 사망하면서 결국 두 사람은 오늘날로 말하면 합의 이혼을 하였다. 그리고 엘레오노르가 선택한 사람은 앙리 플랑타주네Henri Plantagenet이었다. 이 결혼으로 프랑스는 영토의 반이 떨어져 나가게 된 반면 잉글랜드는 배 이상으로 영토가 늘어났다.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에 가지고 있던 영지는 자신의 상위 군주인 프랑스 왕보다 월등히 많았다.

앙리가 잉글랜드의 헨리로 왕좌에 올랐을 때는 정복왕 윌리엄의 강압으로 잉글랜드에 중앙집권적 봉건제를 확립하였고 교회도 좀더 체계적이고 엄격한 노르만 식으로 개혁하였다. 윌리엄의 이런 정책 시행은 토착 색슨족들은 노르만의 멍에라고 비아냥댔지만 잉글랜드의 노르만 화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 색슨의 토착 귀족들은 토지를 빼앗겼고 이를 대신해 노르망디에서 건너온 신흥 노르만 귀족들이 이들의 영지를 차지했다. 사회는 노르만 법이 강요되었고 궁중과 법정의 용어는 노르만-프랑스어였다. 그리고 관료들은 라틴어를 사용하였다.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했을 때 프랑스 인과 잉글랜드 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헨리 2세가 왕좌에 올랐을 때는 잉글랜드 인이란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국왕은 사법의 중심이었고, 국가와 교회의 요직을 임명하고 외교의 수장이며 최고 군사지휘관이었다. 이런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필수적이었다. 또 왕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국왕은 자신의 최고법정인 쿠리아 레지스curia regis를 주재主宰하였다. 헨리 2세 전까지는 왕실이 순회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때는 왕실의 주요기관도 같이 따라다녔지만 이제는 왕실의 행정기관들은 웨스트민스터에 정착하게 된다. 이때부터 최고사법관들은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고 국왕의 부재 시 국왕을 대리했다. 재정담당을 엑스체커Exchequer라고 부르는데, 이는 왕실의 수입을 관리할 때 체크 무늬의 천을 깔고 업무를 보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이들이 양피지에 세입과 세출을 자세히 적어 돌돌 말아 보관했기 때문에 이 문서를 파이프 롤pipe-roll이라고 불렀다. 최고 사법관 밑으로 대법관이 있는데 법률과 행정상의 공문을 발행하는 관청의 책임자였다. 대법관의 왕의 고문이고 비서이며 옥새를 관장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외에 대귀족들이 왕의 자문에 응했는데 이들은 자신의 독립적인 영지에 성을 축성하고 그곳에서 자신의 영지를 다스렸다.

헨리 2세의 시기는 목조성木造城이 석조성石造城으로 바뀌는 시기였다. 화공火攻에 취약한 목조성은 망루와 목책木柵으로 둘려진 형태의 방어시설이었다. 반면 석조성은 석재를 이용해 건축하였기에 성벽의 두께가 목조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방어자들은 작은 화살구멍을 통해 적을 방어했기 때문에 목조성보다 훨씬 유리했다. 대신 외풍이 심하고 습기가 많았다. 이를 위해 홀 중앙에 불을 피울 수 있는 화덕이 설치되었고 천정의 통풍구로 연기를 빼내었다. 그리고 작은 방에는 화로를 설치하여 난방을 하였다. 이때까지는 탑의 설계로 인해 벽난로를 설치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런 석조성에는 컨스터블constable이란 책임자가 있어 성주城主가 출타 중일 때 성주 대신 성을 책임졌고 평상시에는 행정-사무와 재판-을 관할하였다. 당시의 성은 일반적으로 모트motte라고 부르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낮은 둔덕에 세워졌다. 이 모트는 목책과 해자垓字로 둘러싸고 이 안쪽에 베일리bailey라고 부르는 안마당이 있었다. 베일리에는 마구간, 작업장과 부엌이 존재했다. 부엌은 화재의 위험 때문에 바깥에 설치되었다. 보통 적들이 침입했을 대 영주의 보호를 받기 위해 농노와 평민들이 가축을 데리고 와 피신한 장소가 베일리였다. 성의 이런 기본적인 형태는 석조성으로 변환될 때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다만 부엌이 아성牙城-내성內城으로 옮겨진 것이 다른 뿐이었다. 이 내성에는 영주의 방과 기사들을 접견할 수 있는 넓은 홀이 있었다. 영주의 방은 홀 위쪽에 위치해 있어 영주와 그의 가족들의 공간이었다. 홀에는 가신들이 생활하였다. 이런 형태의 초기 석조성에서는 주개인의 사생활은 보호될 수 없었다.

헨리 2세는 잉글랜드를 통치하면서 주Shire의 장관Sheriff을 영주領主가 아니라 자신이 임명한 전문관료로 대체하고 이들에 대해서 임무에 대해 무거운 책임을 부과하여 과거처럼 이들이 영주의 이익을 위해 편법행위를 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헨리 2세의 통치기간은 19년의 무정부 상태가 끝난 시점이어서 잉글랜드에서 범죄행위가 급증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런 무질서를 통제하기 위해서 주장관과 장원의 영주들이 치안을 책임져야만 했다. 이런 범죄행위의 빠른 재판을 위해 국왕이나 국왕의 판사들이 각 주를 순회하면 재판을 하는 순회재판 제도를 시행하였다. 헨리 2세는 순회재판소와는 별도로 웨스트민스터에 상설법정이 설치되어 국왕이 뽑은 판사들이 민사와 형사 소송을 맡게 하였다.

헨리 2세 시대에는 범죄율이 높지만 사법기능이 이를 감당할 만큼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르만 법 두 가지를 도입하였다. 그것은 고문과 결투였다. 범죄자들은 자백할 때까지 고문을 받거나 결투로 유무죄를 판정하였다. 결투에서 패한 자가 죽지 않으면 교수형으로 마무리 하였다. 나머지 하나는 옛 앵글로 색슨의 관습법인 배심원 제도였다. 헨리 2세는 이 배심원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헨리 2세는 잉글랜드의 웨스트민스터와 노르망디의 루앙에 행정기관을 집중시켜 통치의 효율화를 꾀하였다. 왕의 명령은 대법관청에 의해 작성되어 왕국 전체에 하달되었다. 이 명령은 아주 단순 명료하게 작성되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헨리 2세는 아내 엘레오노르와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고, 다섯 아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왕관에 도전하였다. 그는 왕국을 위해서는 절대로 필요한 유능한 국왕이었지만 가정에서는 철저히 소외된 남편이며 아버지였다. 아내는 자신이 사랑하는 리처드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남편과 대립하였고, 자식들은 기회만 있으면 아버지를 괴롭혔다. 그럼에도 헨리 2세는 이 모든 것을 헤쳐나가며 잉글랜드와 앙주를 효과적으로 통치하면서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었다. 이 강철의 왕은 아내와 자식들에게 환멸을 느꼈다. 다만 넷째 아들인 존John만을 사랑하였다. 헨리 2세는 존에게 아키텐을 물려주려 했지만 엘레오노르가 사랑한 리처드가 이에 반발하여 프랑스의 필립 존엄왕에게 신하의 예를 바치고 앙주와 아키텐 전 지역을 차지하였다. 필립 존엄왕과 둘째 아들 리처드에게 패배한 헨리 2세는 르 망을 벗어나 시농에 은신하였다. 이곳에서 늙고 지친 심신을 다스리고 있던 늙은 헨리 2세는 넷째 아들 존 마저 자신을 외면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하였다. 늙은 헨리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짐은 나의 일도 세상 일도 이제는 생각할 기력조차 없다고 외친 후 피를 토하며 절명하였다. 현실적이며 유능하고 때로는 회의적이었던 잉글랜드의 위대한 왕이 죽은 것이었다. 그의 사후 잉글랜드와 앙주 제국은 둘째인 리처드가 승계하였다.

헨리 2세의 치세 중 가장 큰 위기는 종교적인 것이었다. 왕과 교회가 충돌한 것은 서임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성직자에 대한 재판 관할에 관한 문제였다. 헨리 2세는 종교인도 범죄를 저지르면 왕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는 종교재판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로 인해 국왕과 캔터베리 대주교는 충돌이 일어났고 둘 사이의 관계는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문제의 발단은 정복왕 윌리엄과 대주교 랑프랑이 잉글랜드를 정복했을 때 세속재판과 종교재판을 분리하면서 생겼다. 종교재판은 양심에 관한 것만을 관할하도록 하였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뿐 아니라 사람들도 처벌이 관대한 종교사건으로 재판을 조작하였던 것이다. 이는 헨리 2세의 통치기반을 흔들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헨리 2세는 클라렌든에서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여 종교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된 경우 성직자는 성직자 신분을 박탈하게 하였다. 이렇게 되면 세속재판에 회부하여 유죄를 선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한 가지 범죄로 두 번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입장에서는 절대 굴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토머스 베켓은 클라랜돈에서 헨리 2세의 위협으로 어쩔 수 없이 헌장에 서명했던 것이다. 이것은 두고 두고 베켓의 약점이 되면서 국왕과의 타협을 할 수 없게 하였다. 결국 헨리 2세는 1170년 성탄절에 왕과 화해한 토머스 베켓이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왕을 지지한 주교들을 파문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헨리 2세는 누가 이 골칫거리 성직자를 내게서 좀 치워줄 수 없는가?Will no one rid me of this turbulent priest?’라는 말을 내뱉었다. 정확한 기록은 아니지만 헨리는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레지날드 피츠우르스Reginald FitzUrse, 휴 드 모빌Hugh de Morville, 윌리엄 드 드레이시William de Tracy와 리처드 르 브리통Richard le Breton이 잉글랜드로 떠나 1229일 캔터베리에서 토머스 베켓을 살해하였다. 헨리는 기사 네 명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알고 그들의 의중이 무엇인지 간파하자 두려움에 그들의 소환을 명령하는 사자를 보냈지만 상황은 이미 종료된 것처럼 보였다. 1231일 헨리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살해 소식을 들었다. 헨리는 왕의 옷을 벗고 거친 상복을 입은 다음 6주간 칩거하였다. 헨리는 교황에게 자신은 이 살해에 전현 무관함을 항변하기 위해 교황청에 사절을 보냈다. 교황은 이 사절을 1주간 홀대하는 것으로 자신의 심정을 전하였다. 교황은 대륙에 있는 헨리의 영지에 성무금지령을 내렸다가 얼마 후 해제하였다. 교황은 헨리를 파문시킬지의 여부를 두고 고민했지만 헨리가 죄를 사면받기 전까지 성지를 밟을 수 없다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헨리는 토머스 베켓을 살해한 네 명의 기사를 즉시 처벌해야 했음에도 이를 시행하지 않음으로서 암살의 공범으로 믿게 되었다. 네 명의 기사의 운명은 다음과 같다. 휴 드 모빌은 팔레스티나로 참회의 순례를 떠났고 사죄를 받은 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윌리엄 드 트레이시는 데본의 영지를 캔터베리 대성당에 헌납하고 1173년 성지순례를 떠났지만 도착하기 전에 사망하였다. 레지날드 피츠우르스도 파문을 받고 참회의 성지순례를 떠나 1073년 성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리처드 드 브리통은 파문 당한 후 저지Jersey 섬으로 은둔하여 지냈다고 윌트셔의 성 토마스 성당의 무덤의 대석臺石Ledger stone에 기록되어 있다.

 

잉글랜드의 리처드 1Richard I of England는 사자심왕獅子心王 리처드Richard Coeur de Lion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리처드 1세는 1157년에 태어나 1199년 사망하였다. 1189년부터 죽을 때까지 잉글랜드의 왕이었다. 그는 노르망디와 아키텐과 가스코뉴의 공작이며 키프로스의 군주Lord of Cyprus이고 푸아티에, 앙주, 멘과 낭트의 백작이며 브르타뉴의 대군주Overlord로 호칭되었다. 리처드는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낳은 다섯 자녀 가운데 세 번째였다. 그의 별명인 사자의 심장을 가진 리처드는 그의 사후에 알려진 별명이다. 리처드 1세는 오크에 노Oc e No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졌는데 이는 오크어로 예스yes 아니면 노no라는 뜻인데 리처드 1세의 간단명료함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리처드 1세는 플랜태저넷 가문의 특징인 불같은 격정을 물려받아 여색女色과 용맹勇猛이 혼합된 기이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리처든 남 프랑스 출신이었기에 오크어Lenga d'òc에는 능통하였지만 영어와 오일어Lenga d'oil는 자신의 모국어가 아니었다.

리처드는 2미터에 가까운 키에 부친의 날카롭고 푸른 눈과 적갈색의 머리카락을 지녔다. 그는 모친 엘레오노르가 가장 사랑한 아들이었으며 모친의 이름에 영예가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려하였다. 이런 리처드를 엘레오노르는 매우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렀다. 리처드는 앙주 가문의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성미가 급하고 포악한 구석이 있었다. 이 점에서는 부친인 헨리보다 리처드가 더 폭력적이고 잔인했다. 한 연대기 작가는 이런 리처드를 모든 사람들에게 악질이었고, 친구에게는 더 악질이었고, 자신에게는 가장 악질이었다라고 묘사하였다. 리처드도 앙주 가문 사람들처럼 나이가 들어가면서 성적으로 문란한 소질을 드러냈다. 리처드는 소작인의 아내와 딸, 여자 친지들까지 겁탈하곤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욕정을 충족시킨 뒤에는 그녀들을 자신의 기사들에게 넘겨 취하게 하였다.

리처드는 자신의 형들과 함께 부친 헨리 2세에게 끊임없이 도전하였고, 언제나 헨리 2세는 아들들을 제압하고 용서하였다. 실제로 헨리 2세의 자식들은 아버지만큼 대단했지만 그를 넘어서는 자식들은 없었다. 가장 근접했던 소헨리Younf King Henry는 유능하였지만 세세한 일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헨리 2세와 공동 왕으로 다스리면서 정무에는 소홀하였다고 한다. 그가 가장 사랑한 것은 마상 창 시합이었다고 한다. 리처드는 아버지처럼 용감했지만 관용이 부족했고, 막내 존은 헨리 2세가 가장 사랑했음에도 왕이 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한 인물이었다. 존은 헨리 2세가 처음 계획했던 대로 수도자가 되어야만 했던 인물이었다.

리처드는 형인 소 헨리가 1183년 이질로 사망하면서 왕국의 후계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리처드는 부왕인 헨리 2세에게 끊임없이 저항했고 부친의 경쟁자인 프랑스의 루이 7세와 필립 2세와 결탁하여 부친을 괴롭혔다. 3차 십자군 전쟁은 그가 역사에 남는 별명인 사자의 심장을 가진 리처드로 불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활약한 그의 군사적 업적은 정치적 무능력과 인간적 품성의 빈약함을 대체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리처드는 싸우는 군주였지 다스리는 군주는 아니었다. 그의 인간적 단점인 잔혹함은 전쟁터에 어울리는 덕목이었다. 그래서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인정 받았을 뿐이었다. 그가 잉글랜드의 왕으로 있었던 기간은 10년이었지만 주로 프랑스의 영지에서 머물다. 그에게 잉글랜드는 왕의 영토가 아니라 이질적인 땅이었던 것이다.

리처드 1세의 죽음은 너무도 허무하였다. 그의 죽음 소를 탐하다 대를 잃어버린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1199년 리처드의 영지 가운데 하나인 리모주Limoges의 리무쟁Limousin에서 보물이 발견되자 리처드는 상위 군주로서 자신에게 그 소유권이 있음을 알렸다. 하지만 리모주 자작 아이마르Viscount Aimar V of Limoges가 이를 거부하자 리처드는 자신의 권리를 위해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가 군사를 동원한 시기는 부활절의 예비기간인 사순절Quadragesima 기간이었다. 이 기간에는 군사를 동원할 수 없음에도 리처드는 무리하게 군사를 동원하였다. 325일 리모주의 살뤼-사브로Châlus-Chabrol 성을 포위한 뒤 공성 작업을 격려하던 중 성에서 날아온 석궁石弓에 어깨를 맞았다. 급히 옮겨진 리처드는 치료를 받았지만 상처가 덧나 46일 마흔 둘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전쟁터에서 죽은 그의 시신은 당시의 관례대로 심장은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인 루앙Rouen에 장기臟器는 그가 사망한 리모주의 살뤼에 묻고 나머지 몸은 부친 헨리 2세가 묻혀있는 앙주의 퐁테브로 수도원Fontevraud Abbey에 안장되었다.

 

브르타뉴 공작 아서Arthur I, Duke of Brittany/Arthur Ier de Bretagne1187년에 태어나 1203년 사망하였다. 아서는 1196년부터 1203년까지 브르타뉴 공작 Duke of Brittany 이며 4대 리치먼드 백작 4th Earl of Richmond이었다. 아서는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Geoffrey II, Duke of Brittany와 콘스탄스Constance, Duchess of Brittany 사이에서 태어났다. 콘스탄스는 스코틀랜드의 말콤 4세와 윌리엄 1Malcolm IV and William I의 누이이며 브르타뉴 공작 코난Conan IV, Duke of Brittany의 딸이다. 브르타뉴 공작 아서의 부친인 조프루아는 잉글랜드 헨리 2세의 아들로 서열로는 사자심왕 리처드보다는 아래였지만 실지왕 존John Lackland/Johan sanz Terre 보다는 위였다. 그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키도 작고 머리색은 짙었고 잘생기지도 우아하지도 않은 외모를 지녔다. 조프루아는 형들과 달리 신하들의 사랑, 충성, 신뢰를 얻는 재능은 없었다. 오히려 조프루아는 배신을 잘하고 위험하고 탐욕스런 인물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조프루아가 앙주 혈통 가운데 가장 지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다만 이 능력을 나쁜 목적으로만 사용한 것이 문제였다. 조프루아는 강도귀족처럼 강탈이나 약탈을 하는 것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게다가 조프루아는 전쟁터에서는 무자비했고 성당이나 수도원을 약탈하는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조프루아에게 양심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고 파렴치한 변명을 늘어놓을 때도 얼굴 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누군가가 그에게 앙주 가문의 특징을 물어봤을 때, “우리 가족은 형제가 형제를, 아들이 아비를 대적하고 서로 해코지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도록 태어난 게 우리라오.”라고 이죽거렸다고 한다.

1204년 프랑스의 필립 존엄왕Philip Augustus/Philippe Auguste이 앙주를 점령하였다. 필립 존엄왕은 정복한 앙주를 루이 사자왕Louis VIII the Lion의 아들인 존Jean에게 왕자의 속령으로 수여하였다. 루이 사자왕은 필립 존엄왕의 아들이다. 루이 사자왕은 필립 존엄왕 사후 왕위를 이어받지만 1223년부터 1226년 까지 짧게 재위하였다. 하지만 존이 121416살의 나이로 사망하자 앙주는 루이 사자왕의 막내아들 샤를Charles에게 수여하였다. 샤를은 후에 앙주의 카페 가문Capetian House of Anjou으로서는 처음으로 시실리아의 왕이 되는 인물이다. 아서는 사실 상 플랜태저넷 가문의 마지막 앙주 백작이라 할 수 있다. 1204년 존엄왕 필립이 앙주를 프랑스 왕국의 영토로 병합하면서 플랜태저넷 왕가의 앙주 작위는 단절된다. 이후 앙주 백작의 칭호와 영지는 프랑스의 카페 가문이 소유하게 된다.

여기서는 플랜태저넷 가문까지만 기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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