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치노派Dulcinian: 中世資料

둘치노파는 중세 후기의 종교분파宗敎分派이다. 이 분파는 사도형제회Apostolic Brethren에 뿌리를 두고 있다. 둘치노파는 Dulcinians, Dulcinites, Apostolics 등 여러 명칭으로 알려져 있다. 둘치노파의 근원은 피오레의 요아킴Joachim of Fiore과 성 프란치스코의 사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가톨릭교회로부터 이단異端으로 판정 받았다. 둘치노파란 이름은 이들의 지도자였던 노바라의 수도자 돌치노Fra Dolcino of Novara 로부터 유래하였다. 둘치노는 1250년 태어나 1307년 교황 클레멘스 5세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定罪되었다.

둘치노의 실제 이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부유한 노바라의 토르노엘리 가문Tornielli family of Novara에 속한 인물이라고도 하고 혹은 베르첼리Vercelli에서 자신을 키워준 성직자의 재산을 훔쳐서 처벌받는 것을 피해 도망친 성직자의 사생아私生兒라고도 한다. 그의 실제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둘치노는 교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수도회를 통해 소정의 교육과 글을 배운 인물이었다.

둘치노파를 알기위해서는 1300년 경 결성된 사도형제회Apostolic Brethren와 창설자인 제랄도 세가렐리Gherardo Segarelli를 알아야한다. 1240년 경 파르마Parma 근교의 세갈랄라Segalara에서 태어난 제라르도 세가렐리는 사도형제회에 대한 교회의 탄압으로 파르마Parma에서 화형주火刑柱에 불태워진 인물이다. 사도형제회는 라틴어로 아포스톨리치Apostolici라고 표기된다.

제라르도는 어린 시절 파르마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원Franciscan monastery에 입회入會를 원하였지만 외적으로 드러난 불건전한 정신적 징후로 인해 수도회 입회가 좌절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수도원 소속의 성당과 주변의 수녀원을 들락거리면서 성당의 제단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때 그는 초대 교회의 십이 사도의 모습이 그려진 제단의 성화聖畫를 보고 깊이 느낀바가 있어 그 모습을 따라 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제라르도 세가렐리는 성당 제단에 그려진 초대교회의 사도들처럼 수염과 머리를 기르고 맨 발에 초기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하얀 튜닉을 걸치기 시작하였다. 세가렐리는 초기 사도들을 철저하게 모방하기 위해 유대인이었던 사도들의 전례前例에 따라 할례割禮를 받았다고 한다. 제라르도의 이런 모습을 보고 일반 대중들 가운데 그를 성인聖人이라고 부르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260년 세가렐리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창설자인 성 프란치스코를 모방하여 자신의 모든 소유물을 팔아 파르마의 장터로 가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일설一說에 따르면 그가 시장에서 돈을 나눠 주기 시작하자 근처에서 노름을 하던 불한당들이 몰려와 그 돈을 받아 가 순식간에 탕진하였다고 한다. 이후 제라르도는 거리로 나가 사람들에게 페니텐티암 아지테penitentiam agite를 외치며 다니기 시작하였다. 페니탄티암 아지테는 회개悔改하라는 의미의 라틴어이다. 거리에서 하느님의 왕국을 선포한 제라르도는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생활하기 위해 구걸하며 다니기 시작하였다.

그의 이런 행각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修士였던 로베르토Robert를 만날 때 까지 삼 년간 계속되었다. 로베르토를 만난 후 제라르도는 서른 명 이상의 추종자들을 모을 수 있었다. 이에 자신을 얻은 제라르도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도시로 들어가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설교를 시작하였다. 가 점점 불어나자 무리들은 제라르도에게 자신들의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대해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지만 지도자의 자리를 수락한 제라르도는 추종자들과 함께 찬송가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가진 것을 나누며 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제라르도는 자신의 행위가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교회 관계자들로부터 비웃음을 샀지만 개의치 않았다. 제라르도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벗어야 벗은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다며 알몸으로 거리로 나가 회개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런 기행에도 이들의 신앙운동은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Lombardy를 벗어나 독일, 프랑스, 스페인 그리고 잉글랜드에까지 퍼져 나갔다. 이에 위기를 느낀 교회는 비츠부르크 공의회에서 이들 사도형제회원들에게 물과 음식을 주는 기부 행위를 금지하기도 하였다.

1274년 제2차 리용 공의회Second Council of Lyon에서 교황의 재가裁可를 받지 않은 신심단체들을 금지하였다. 2차 리용 공의회의 주된 목적은 그리스 정교회와의 일치가 첫째 목표였다. 이단에 관한 언급은 그 다음 순위였다. 이는 사도형제회와 같은 자생적 신심단체들에 대한 교회의 제재制裁가 본격화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280년 파르마의 주교는 교회의 지도를 따르지 않는 제라르도를 체포, 구금하였다. 이 구금 기간 동안 제라르도는 교회의 철저한 사상검증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286년 제라르도는 파르마 교구에서 추방되었다. 1286년 교황 호노리우스 4세는 사도형제회를 엄하게 배척하였고 1289년 잉글랜드의 체스터 공의회에서 사도형제회는 배척받았다. 1290년 니콜라우스 4세 교황이 사도형제회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1294년 파르마에서 4명의 사도형제회원들이 이단으로 판명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1296년 칙서 세페 상탐 에클레시암에서 교도권에 편입되지 않는 모든 단체들을 이단으로 선언하였다.

칙서 세페 상탐 에클레시암Seape sanctam Ecclesiam’, 129681

우리는-여자들을 포함하여-몇몇 사람들이 거룩한 가톨릭교회를 거슬러 들고 일어나면서 다음과 같이 행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곧 그들은 자기들이 묶고 푸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며, 고백을 듣고 죄를 사해주고, 밤낮으로 모임을 열어 잘못을 충고하며... 감히 설교를 행하고, 교회의 관례를 거슬러 성직자가하는 삭발削髮을 남용하면서, 자기들이 안수로써 성령을 수여한다고 속이고 있다. 그리고 [첨가; 경외? 순종?]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드려야 하지, 다른 누구에게도 그가 어떤 위치와 어떤 품위와 어떤 신분에 있다 하더라도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나체의 상태로 드리는 기도가 더 효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위에 언급한 가톨릭교회에 묶고 푸는 권한이 있음을 부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결속 단체가 단죄받아 마땅한 이단이라고 선언한다.

1300년 알렉산드리아의 리처드로 추정되는 사도형제회원이 스페인의 갈리시아에서 설교를 하였는데 대중들의 열열한 지지를 받았다고 보고되었다. 이에 교회는 사도형제회에 대한 박해를 가속화하는 한편 창설자인 제라르도를 다시 체포하여 감옥에 수감하였다. 6년 후인 1300년 제라르도는 이단 신앙을 고백告白한 후 파르마에서 화형 되었다.

제라르도 세가렐리의 처형 이후 그의 추종자들은 교회의 박해를 피해 철저히 은둔의 삶을 살았다. 이들 사도형제회들은 당시의 혼란을 틈타 각지에 산재해 있는 탁발 수도회에 자신의 몸을 의탁하면서 철저하게 자신들의 신분을 숨겼다고 한다. 둘치노와 사도형제회원들의 접촉은 제라르도가 파르마에서 체포되었다가 추방당한 후인 1288년에서 1292년 사이였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당시 돌치노는 도둑질 혐의로 자신의 고향에서 도망친 상태였다. 이 접촉을 통해 활동에 제약을 받던 제라르도 대신 수도자 둘치노가 이들의 두 번째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사도형제회의 두 번째 지도가가 된 수도자 둘치노는 피오레의 요아킴의 이론에 기초한 새로운 시대epochs of history에 대한 생각을 구상하였다. 그는 자신의 구상을 초세기 교회의 사도 바울처럼 추종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설명하였다. 세가렐리와 달리 지적이며 박식하였던 수도자 둘치노는 제라르도가 화형당한 1300년부터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1307년 사이에 편지를 통하여 추종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렸다.

수도자 둘치노의 첫 번째 편지는 후일 출판되었는데 그 내용은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와 일곱 천사에 대한 해석이었다. 그는 이 편지에서 피오레의 요아킴이 말한 성령의 시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령의 시대 이전에 하느님은 혼탁한 교회를 정화하기 위해 성 베네딕트를 보냈다고 하였다. 베네딕트를 통해 하느님은 청빈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리고 성 실베스테르 1세 교황을 통해 교회가 세상을 다스리는 속권보다 우위에 있게 하였다.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와 성 도미니코를 보내 세상의 부와 권력에 대해 경고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둘치노는 에페소스 교회의 천사는 성 베네딕트와 그의 수도회를 지칭하고, 페르가몸 교회의 천사는 교황 실베스테르 1세와 성직자들을 지칭하며, 사르디스 교회의 천사는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탁발수도회를 말하고, 라오디케아 교회의 천사는 성 도미니코와 그의 설교수도회를 말한다고 하였다. 스미르나 교회의 천사는 파르마의 제라르도와 그의 사도형제회를 가리키며, 티아티라 교회의 천사는 수도자 둘치노와 둘치노파를 가리킨다고 주장하였다. 마지막으로 필라델피아 교회의 천사는 새로운 거룩한 교황으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교회를 이끈다 하였다.

수도자 둘치노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교회의 계서제階序制를 반대하고 겸손과 가난이 미덕이었던 초기初期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소수에 의해 대다수가 착취당하는 봉건제도의 철폐를 주장하고, 억압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외쳤다. 둘치노는 공동체가 모두의 재산을 소유하는 공동재산제를 주장하고 상호존경하고 돕는 동등한 사회를 만들자고 하였다. 둘치노의 이런 주장은 봉건제도를 고수하고 있던 당시 사회의 근간根幹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의 이런 주장의 근저根底에는 피오레의 요아킴의 사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세의 교회는 목자牧者, 민중은 양이며 귀족들은 이 두 무리를 지키는 사냥개라는 도식으로 강요된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다. 교회는 점점 비대해지고 민중들은 교회와 귀족들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였다. 둘치노의 주장은 이런 계급적 사회를 흔드는 것이었기에 교회와 귀족들에 의해 철저하게 배척되었다. 이와 함께 둘치노와 다른 이단들의 천년왕국설의 근간이 되는 피오레의 요아킴의 사상 또한 이단으로 판정받았다.

수도자 둘치노는 화형당한 제라르도처럼 기행을 통해 대중과 접촉하기 보다는 좀 더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펼쳐 나갔다. 그는 첫 번째 편지에서 요한 묵시록과 자신의 시대를 결합하는 방식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며 변혁을 꾀하였던 것이다. 교회의 입장에서 이런 방법은 제라르도의 방식보다 더 대처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실제로 수도자 둘치노는 첫 번째 편지에서 구체적인 이름을 거론하면서 시대적 사실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교회의 주장에 따르면 둘치노는 자신이 하느님의 유일한 사도라고 주장했고, 모든 것은 사랑으로 공유되어야 하고 남녀의 통정과 축첩을 주장했다고 한다.

1303년 수도자 둘치노는 가르다 호수Lake Garda 근처에서 제라르도 사후 붕괴되었던 사도형제회 운동을 재결합하였다. 둘치노는 여기서 그의 연인이자 영적인 자매인 명문 규수인 마르게리타 보닌세나Margherita Boninsegna 혹은 트렌토의 마가렛이라 불리는 여인과 만났다. 이 둘의 관계는 연인이면서 조언자였고 동지적인 것이었다. 수도자 둘치노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냄으로서 그동안 교회의 박해를 피해 숨어있던 사도형제회원들이 수도자 둘치노에게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이들 무리는 이미 1290년 이후 이단으로 판정되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릴 수는 없었기에 자신들의 실체를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수도자 둘치노가 마르게리타 보닌세나와 함게 작성한 두 번째 편지에서 새로운 교황이 나타나기까지의 일정도 소개하고 있다. 수도자 둘치노는 첫째와 마지막 교황은 착하고, 둘째와 셋째 교황은 악邪惡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넷째 교황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고 있다. 후일 교회는 둘치노 자신이 새로운 교황이라는 식으로 해석하였지만 편지 어디에도 수도자 돌치노 자신이 새로운 교황이라고 한 적은 없었다. 수도자 둘치노의 편지와 저서는 교회에 의해 철저하게 분석分析된 뒤 조목조목 논박論駁되었다.

1304년 초 세 명의 둘치노 추종자가 이단재판에서 유죄로 판명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이에 수도자 둘치노는 그의 출생지인 노바라 근교의 세시아 계곡Sesia valley 서쪽으로 교회의 탄압을 피해 공동체를 옮겼다. 그 해 말 돌치노는 교회의 탄압으로부터 살아남은 14백 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요새화된 파레트 칼바 산Mount Parete Calva 정상으로 이동하였다. 1305년 겨울 둘치노는 세 번째 편지를 보내자 많은 무리들이 둘치노 무리와 합류하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이곳을 근거로 하여 인근 계곡의 마을로 내려와 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였다. 생존을 위한 이들의 약탈은 당연히 마을 사람들의 적개심을 불러 일으켰다. 계곡의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가자리Gazzari"라고 불렀는데 이는 카타리파란 의미이다. 카타리파는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판정되어 철저하게 분쇄된 집단이었다. 이들 둘치노파들은 일 년 동안 교회와 귀족들의 포위 공격을 막아냈지만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1305년 말 수도자 둘치노는 부상자와 병자들을 남겨두고 주벨로 산으로 물러났다. 인적 물적으로 피폐해진 이들은 영주들의 끈질긴 공격에 최후의 근거지마저 함락되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항복한 수도자 둘치노와 그의 연인이며 동지인 마르게리타 보닌세나의 최후는 비참했다. 13073월의 성 토요일 둘치노와 마르게리타 보닌세나는 체포되어 수 개월간 교회의 조사를 받은 후 7월 초에 사법재판으로 넘겼졌다. 이 둘은 공식적으로는 교회의 이름으로 재판을 받지 않았다. 교회는 언제나 자신의 손에 피를 뭍히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사법재판에 넘겨진 두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은 후 수도자 둘치노의 고향인 노바라로 이송되었다. 마르게리타 보닌세나는 둘치노에 앞서 화형을 당했는데 그 모습이 당당하였다고 한다. 둘치노는 화형에 처해지기 전에 자신이 삼 일 후에 부활할 것이라고 외쳤다 한다. 수도자 둘치노의 최후는 비참했다. 그는 화형 당하기 전에 코를 자르고 거세를 하였다. 형리에 의해 갈가리 찢겨진 시신은 사형 집행인에 의해 불에 태워지고 재는 사방에 뿌려졌다. 둘치노가 처형된 지 15년이 지난 1322년 그의 추종자 30명이 파두아Padua의 장터에서 산채로 불태워졌다. 둘치노파의 구슬픈 마지막이었다.

이탈리아의 발도파Waldensians 언론인이며 저술가인 구스타보 브라티Gustavo Buratti는 그의 저서 “La riforma popolare: l'anticlericalismo nel movimento operaio biellese (18801920)”에서 수도자 둘치노를 사회주의자 예수의 사도Apostle of the Socialist Jesus’로 격상시켰다. 그 이전부터 둘치노에 대한 평가는 교회의 입장과 반대인 경우가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교회의 이단자였던 둘치노는 사회주의자나 노동운동가들로부터 교회개혁자의 한 사람으로 격상되거나 프랑스 혁명과 사회주의 이상의 창설자 가운데 하나로 소개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1907년 좌익 노동자들은 수도자 둘치노의 마지막 저항 장소였던 루벨로 산Monte Rubello에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1927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1974년 원래와 다른 작은 모양으로 다시 세워졌다.  


피오레의 요아킴Joachim of Fiore: 中世資料

피오레의 요아킴 Joachim of Fiore1135년경에 태어나 1202330일 사망한 이탈리아의 신학자이며 성직자이다. 요아킴은 성지순례후 전 생애를 신에게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코라초의 베네딕트회 수도원에 입회하였고 후일 수도원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속한 수도원을 시토파에 귀속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허락이 지지부진하자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피오레의 산 지오반니San Giovanni in Fiore에서 새로운 수도회를 창립하였다.

1202년 세상을 떠날 때 요아킴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인물 중의 하나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의 사후 그에게 적대적인 자들이 그의 명성을 실추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요아킴의 저작은 방대하고 난해한 새로운 성서 주석서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빌린 많은 위작문서들이 유포되기도 했다.

피오레의 요아킴 사후 그의 종말론과 역사론에서 영감을 받고 그를 추종한 무리를 요아킴파Joachimites라고 부른다. 요아킴파가 신봉했던 피오레의 요아킴의 사상을 살펴보면서 요아킴파가 어떻게 이단으로 빠지게 되었는지 살펴본다. 피오레의 요아킴은 성 프란시스코와 동시대 인물로 성 프란시스코가 물질과 세속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극단적인 청빈淸貧을 선택한 반면 요아킴은 인간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약속하였다. 그가 새로운 시대를 약속한 근거는 신약이었다.

피오레의 요아킴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이 삼위일체성三位一體性이 아니라 사성四性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즉 피오레의 요아킴은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은 세 개의 위격位格들과 네 번째 형태인 하느님의 본질本質을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에게 있어 이 네 번째 형체形體는 교회와 그의 지체肢體들처럼 하나의 윤리적 집합集合으로 보았다. 피오레의 요아킴은 이런 독특한 시각으로 요한복음 1722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을 해석하였다. 그의 취지趣旨는 하느님을 재차 인간을 위해 개방시키고 내재적 삼위일체를 돌파하고 체험의 영역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었다.

피오레의 요아킴은 독특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에 따르면 인류는 세 개의 시대 속에서 생활한다. 첫 번째 시대인 구약舊約의 시대에 인류는 성부聖父를 대하게 된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대가 아니라 상태status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 시대는 율법律法의 시대이며 육신肉身의 시대며 평신도平信徒와의 결혼의 시대다. 두 번째 시대인 신약新約의 시대는 성자聖子가 지배한다. 이 시대는 제도制度로서의 교회敎會의 시대요, 성직자聖職者들의 시대이다. 요아킴은 마태복음1,1-17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용하여 아브라함에서 예수까지 기간이 42세대이고, 한 세대가 30년으로 계산하여 제2의 시대는 1260년에 끝나고 바로 성령의 시대가 도래 한다고 보았다. 이 시대는 다시 세 번째 시대인 성령聖靈의 시대에 의해 소멸消滅된다. 이 시대는 순수한 영성적靈聖的 시대요, 요한John적 시대이다. 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교회가 되고, 산상설교山上說敎는 온전히 성취된다. 이 시대에서는 누구나 수도자修道者이다. 피오레의 요아킴의 이 지상왕국地上王國의 관념은 정치적으로는 나치의 제삼의 천년제국千年帝國에까지 영향력을 끼쳤고 철학적으로는 관념론과 공산주의의 유토피아 사상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요아킴은 성령의 시대가 확립되기 전에 적그리스도가 3년 반 동안 지상에 군림하고 그리스도교도는 가장 가혹한 최후의 시련을 맞게 된다고 보았다. 이 시기에 높은 덕성을 지닌 교황과 설교 수도자들과 명상 수도자들로 이루어진 영적 병사들viri sprituales이 적그리스도의 공격에 맞서 저항한다. 이후 영적인 수도자들이 인도하는 제3의 시대는 명상생활에 최대의 가치가 주어진다.

피오레의 요아킴의 이런 사고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 Fourth Council of the Lateran에서 거부되었다. 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회는 사성四性Quaternitas은 존재치 않으며 오직 삼위일체성만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교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타자他者alius이기는 하지만, 타자적인 것aliud은 아니라는 정식을 이어받았다. 세 위격에 있어서 각 위격은 하나의 본질quaedam summa res이다. 그 때문에 모든 역사는 하나의 원천을 가질 뿐이고, 각각 하나의 위격位格에 해당하는 서로 다른 여러 시기로 분할될 수 없다고 언명言明하였다.

피오레의 요아킴의 주장이 교회에 의해 거부됨으로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주장한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격間隔을 다시 강조하였다. 교회의 이런 주장은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삼중적三重的 관계를 체험할 수 없게 되고 오직 하나의 본질성, 신성神性만이 인간들과 상관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여기서 더 나아가세 위격들은 영원으로부터 그리고 동일한 양식으로 존재하며 삼위일체성은 만물의 한 존재원리라고 언명하였다. 이 결과 창조된 존재와 하느님 삼위일체 사이의 유사성은 비유사성보다 훨씬 미소하게 되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이 상이성이 더 크다고 기술하기 않고는 이 양자 사이에 이러한 유사성이 있다고 기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의 이런 언명은 피오레의 요아킴이 강조하였던 인간의 역사속에 하느님과의 관계가 부정되고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극이 다시 강조되었다. 이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하느님의 삼중적 관계를 체험할 수 없고 오직 하나의 본질성本質性 즉 신성神性만이 인간들과 상관相關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교회는 단일성을 위해 삼차원적인 신약성서의 하느님 체험을 부인하였다. 이는 하느님의 관계성을 기능이 없는 것으로 단죄한 비싼 대가였다. 이제 신학은 세 위격들은 세 개의 신들이 아니라 한 분 하느님이시다. 이 세 위격들은 하나의 실체, 하나의 본질성, 하나의 본성, 하나의 신성, 하나의 무량성無量性, 하나의 영원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관계들의 상호간에 상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외에는 모든 것이 하나이다.” 1442년 플로렌스 공의회의 이런 선언은 즉자적 하느님 안에서 전적인 단일성이 그의 본질성으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세 위격들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상위성이 아니라 유일한 구별성이 허용되었다. 예를 들면 출산하는 것과 출산되고 있는 것은 상반되는 운동들이고 따라서 구별된다.

요아킴의 주장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제3의 시대였다. 3의 시대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교회 성직자들의 반발을 받았다. 반면 수도자들과 민중들은 요아킴의 사상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요아킴은 교회의 전통적인 제도인 교황, 성사, 성직자제도를 부정하지 않았지만 여기에 큰 비중을 두지는 않았다. 요아킴에 따르면 성령에 의해 지배될 미래의 교회에서는 더 이상 성사가 필요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다. 성사聖事가 필요 없다면 사제직司祭職도 더 이상 존속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요아킴은 사제직은 소멸되지는 않지만 교회의 지도권은 영적인 병사들에게 귀속될 것이라고 보았다. 이 지배권은 순순한 영적인 것으로 외적인 교회 지배권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요아킴은 이 3의 시대는 성령의 인도로 완성될 것으로 보았다. 이는 약간 위험한 생각으로 구원 역사에서 그리스도가 차지하고 있는 중심적인 역할을 간과한 것이었다.

당시 교회는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정점頂點을 향해 가고 있었다. 교권과 속권의 대립에서 승리를 거둔 교회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유일한 절대자로 군림하게 될 것이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요아킴의 주장은 교회의 지도자들의 생각과 대립되는 것이었다. 요아킴의 이런 생각은 점점 세속적으로 비대해 지는 교회에 대한 비판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사상은 수도자들과 일반 민중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1209년 아시시에서 프란치스코에 의해 수도회가 창립되었다. 후일 성인으로 시성된 프란치스코는 요아킴의 사상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프란치스코는 청빈과 겸손과 생명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함으로서 추종자들에게 새로운 그리스도의 재림再臨體現했다는 찬사를 들었다. 이런 이유로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한때 이단의 의심을 받기도 했지만 프란치스코 본인이 교회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천명함으로서 교회의 의심을 불식시켰다. 그럼에도 프란치스코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가기도 하였다. 한 예로 1254년 보르초 산 도미노의 게라르도는 피오레의 요아킴이 저술한 세 권의 텍스트를 해석하고 주석을 달아 영원한 복음에의 서장이란 책으로 간행하였다. 여기서 게라르도는 가톨릭 교회의 권위가 다했고, 머지않은 1280년에 새로운 영적인 교회인 성령의 교회가 출현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를 계기로 신학자들은 탁발托鉢 수도회의 위험성과 이단성을 공격하였다. 사실 교회는 피오레의 요아킴이 사망한 후에 그의 사상에 대해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결과 1215년 요아킴의 삼위일체론이 이단으로 선고되었고 게라르도의 간행물이 큰 파란을 일으킨 후 교황 알렉산드로 4세는 1263년 요아킴의 중심적 사상을 모두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세권의 텍스트는 <신약성서와 구역성서의 조화에 관한 책Liber Concordiae Novi ac Veteris Testamenti > <요한의 묵시록 설명Expositio in Apocalipsim> <10개의 줄이 달린 현악기Psalterium Decem Cordarum>이다.

교회의 단죄에도 불구하고 요아킴의 저작들은 필사筆寫를 통해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 필사본을 통해 요아킴의 주장은 많은 이단 사상과 앞으로 태동할 종교개혁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출처: 미르치스 엘리아데, 세계종교사상사3, 이학사(2005), 177-182/ G.하센휘틀, 하느님-과학시대를 위한 신론 입문, 성바오로(1984), 260-273 참조.>


고정관념固定觀念 혹은 관념고정觀念固定: 蓼齋記


컬트cult란 숭배, 예찬, 열광, 일시적 유행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 속에 컬트의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90년대 우리의 영화계는 컬트열풍에 휩싸였다. 컬트를 모르면 영화를 모른 것처럼 이해되기도 했다. 솔직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컬트를 컬투 삼총사이상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할 마음도 없었다. 그러나 영화적인 코드가 컬트가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비디오 가게 먼지 속에 뭍혀있던 브레이드 런너를 찾아보고 재미없는 이레이저 헤드를 보았다. 우리는 과연 컬트를 이해했을까?

어떤 영화가 컬트가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 특이한 조건이 꼭 첨부되어야 한다. 그것은 대중의 열광적인 환호보다는 소수의 마니아에게 어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디애나 존스시르즈나 ‘007’은 컬트영화로 인정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컬트 영화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을 프리메이슨이나 헤르메스 비밀결사단과 같이 자기들만의 유대감으로 뭉쳐있기 때문이다. 이 감정은 자신들을 선택된 자, 축복받는 자로 여기면서 문화적 우월감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컬트의 문화적 코드는 획일적인 사회가 붕괴되면서 다원화 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사회현상이다. 미국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은 사회적 변혁에 큰 역할을 한 사건이었다. 여성들은 군대에 나간 남성을 대신하여 전시경제를 이끌었고, 이로 인해 전후에 여성의 발언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흑인들 역시 미국인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가함으로서 변화의 기운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미국의 흑인 병사들이 유럽에 갔을 때 유럽 여성들이 미국보다 인종적 편협함이 적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런 유럽의 여성들과 미국 흑인 병사들 사이의 자연스런 성적 접촉은 이들이 귀국하면서 폐쇄적이었던 미국 흑인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변혁의 기운은 결국 1960년대 미국의 흑인들이 공민권 운동을 하면서 백인들과 월남전 반대운동에 자연스럽게 접속함으로서 1968년 대변혁을 일으키는데 일조하게 되었다. 이는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격렬한 반항이 컬트의 싹을 자라게 하는 촉매의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컬트 영화는 기존의 상식을 기묘하게 비트는데 있다. 한 예로 리쎌 웨폰1에서 멜 깁슨과 대니 글로버가 경창 지하 사격장에서 권총사격을 하는 장면을 보자. 여기서 영화적 컨셉을 멜 깁슨이 사격을 잘하고 대니 글로버는 어설프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둘의 사격장면을 자세히 보면 영화적 화면과 반대의 생각을 하게 된다. 멜 깁슨은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눈을 감는다. 사격교육에서 격발시 눈을 감는다는 것은 목표물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기에 지양해야 될 자세이다. 반면 대니 글로버는 시종일관 방아쇠를 당기면서 눈을 감지 않고 있다. 컬트 영화 애호가들의 감각은 이런 것이 아닐까?

컬트영화는 사회성과 정치성을 반영하기도 한다. 여기서 반영이란 찾아냄이란 단어로 대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컬트란 소수의 영화광들이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 숨겨져 있는 암호문을 찾아내는 것은 소수의 몫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들 소수의 노력 덕분에 컬트 영화의 대부분을 이해하면서 그 테두리 속에 갇혀 버린다. 이렇게 볼 때 컬트 영화광들의 사유는 무한 자유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테두리 속에 갇혀 일정한 형식에 의해 해석되는 것은 더 이상 컬트가 아니다. 이는 컬트를 빙자한 유사제품일 뿐이다. 컬트는 우리에게 익숙하면서 우리를 가르치거나 교화하려는 대중매체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컬트는 비밀 결사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면서 철저한 그들만의 분위기 속에 감춰져 있다. 이는 대중음식점에서 파는 일반의 평균적인 입맛에 맞춘 음식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컬트의 컬트라는 음식은 심각한 불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컬트는 전통적이기 보다는 실험적인 퓨전음식과 유사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컬트란 음식은 전통주의자나 패스트 푸드 열광자에게 기피대상이 된다. 그 누구도 이 생경한 음식에 자신의 입맛을 도전하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통주의자나 패스트 푸드 열광자들은 이 음식이 아니라도 먹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컬트의 이런 특성 때문에 언제나 소수의 대변자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불행하게 이 소수는 거대한 현실을 물결을 바꿀 힘은 없다. 하지만 언제나 컬트는 주류의 목구멍에 박힌 가시가 되어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의 안일함과 고정관념에 일침을 가한다. 주류가 이 가시를 뱉어내거나 삼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 예로 에드우드 감독이 패티시즘이나 동성애를 영화로 표현했을 때 당시 대중들에게는 생경함과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이런 표현은 더 이상 생경하거나 혐오스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두에게 현실을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만으로도 컬트는 뮨화적 고정관념의 산소호흡기가 아닐까....

 

*2004년에 쓴 글을 약간 수정하여 다시 올림니다. 


몽세귀르Montségur:1243-1244(4) 中世資料



몽세귀르 함락과 이후

1243년 베지에 공의회의 결정으로 몽세귀르의 박멸이 결정된 이후 알비 십자군은 카타리파의 근거지인 몽세귀르를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물론 1241년에도 툴루즈 백작 라몽 7세가 프랑스 국왕과 가톨릭 교회의 압력으로 몽세귀르 성채를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당시 몽세귀르 성채에는 500여 명의 카타리파가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교회에서 파견한 종교 심문관인 귀욤 아르날William Arnald과 에티엔 드 상 티에리Stephen de Saint-Thibéry가 몽세귀르에서 파견한 50명의 무리에게 아비뇨네Avignonet에서 종자들과 함께 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으로 국왕은 이단의 근거지인 이 요새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1243년 세네샬 휴 드 아르키Hugues des Arcis가 인솔하는 1만 명의 국왕 군대가 몽세귀르로 접근하였다. 몽세귀르 성채에는 1백 명의 전사들과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완덕자Parfait와 난을 피해 성에 피신해 온 민간인이 있었다. 카타리파 전사들의 사령관은 라몽 드 페레유Raymond de Péreille였다. 그는 미레포와의 피에르 로제Pierre-Roger de Mirepoix의 사촌이었다. 난민의 대다수는 카타리파 신도Credentes였다. 이들은 대부분 성채 밖에 있는 산속 동굴과 움막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알비 십자군 사령관 휴 드 아르키는 성채를 공략하기 전에 먼저 성으로 반입되는 식수와 물품을 차단하기 위해 성채 주변을 포위하였다. 방어자들 역시 자신들의 공급원을 확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방어자들은 다행스럽게도 다수의 지역 주민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소수의 증원 병력이 도착하였다.

몽세귀르Montségur는 라틴어 몽스 세큐루스mons securus에서 유래由來하였다. 뜻은 안전한 언덕/산이란 의미이다. 이 단어가 오크어로 흘러가 몽 세귀르mont ségur가 되었다. 몽세귀르는 카르카손 남서쪽 80에 위치해 있는데 랑그독 Languedoc과 미디 피레네Midi-Pyrénées 지역의 중간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1204년 몽세귀르는 피레네 산맥 남쪽 국경의 방어를 위해 요새화되었다. 해발 1,200m 산꼭대기에 건설된 몽세귀르 성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채城砦가 되었다. 몽세귀르 성은 랑그독 언어로 포그pog라고 부르는 암반 위에 건설하였다. 포그란 단어는 산꼭대기peak, 언덕hill, 산맥mountain을 의미한다.

알비 십자군에게 가장 극렬하게 저항한 세력은 툴루즈 백작이었다. 1215년경이 되면 랑그독 지역의 대부분이 국왕의 군사들에게 점령되고 남은 것은 이 지역 최대의 대귀족인 툴루즈 백작뿐이었다. 툴루즈 가문은 초기 프랑스의 여섯 귀족 가문 가운데 하나로서 랑그독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가문이었다. 초기 여섯 가문은 다음과 같다. 노르망디 공작Duke of Normandy, 아키텐 공작Duke of Aquitaine은 기엔 공작Duke of Guyenne으로도 불린다. 부르고뉴 공작Duke of Burgundy, 플랑드르 백작Count of Flanders, 샹파뉴 백작Count of Champagne 그리고 툴루즈 백작이다. 이들 외에 렝스 대주교-공작Archbishop-Duke of Reims, 랑의 주교-공작Bishop-Duke of Laon, 랑그르 주교-백작Bishop-Duke of Langres, 보베의 주교-백작Bishop-Count of Beauvais, 살롱의 주교-백작Bishop-Count of Châlons, 노이용의 주교-백작Bishop-Count of Noyon을 합하여 12 귀족이라고 부른다. 이 가운데 랭스 대주교-공작이 가장 수위에 위치한다.

거대한 석회암 암벽으로 보호되어 있는 성채를 공격하는 일은 어려운 과정이었다. 성채로 통하는 좁은 통로를 이용하여 공격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네샬 휴 드 아르키는 여러 차례 공격을 가하였지만 성채 가까이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휴 드 아르키는 산악지방인 바스크 출신의 용병을 고용하여 성채 공격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산악지방 출신의 바스크 용병들은 성채 동쪽면의 안전한 지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곳에 성벽을 공략할 수 있는 공성기와 투석기를 설치할 수 있게 되면서 공격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성벽 바깥과 동굴에서 생활하고 있던 난민들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격자들은 외보外堡barbican로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하였는데 아마도 내부의 배신자가 알려준 것으로 보인다.

12443월 투석기가 성채 가까이 접근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 안쪽 거주 지역으로 바위덩어리를 쏘아 댔다. 성안의 방어자들은 외보에 들어온 공격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공격을 했지만 실패하였다. 외보 탈환에 실패한 방어자들은 세네샬 휴 드 아르키에게 투항의 신호를 보냈다. 휴 드 아르키는 협상을 신속하게 마무리 지었다. 그만큼 몽세귀르 성채 공격이 힘들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협상내용은 카타리파 신앙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주로 완덕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속하게 성을 떠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2주간의 휴전이 선언되었다. 성에 남은 카타리파 신자들은 2주 동안 기도와 금식을 하면서 보냈다. 이들은 카타리파의 의식인 콘솔라멘툼consolamentum/오크어로 콘솔라망consolament을 받았다. 카타리파의 콘솔라멘툼은 세례인 동시에 종부성사이며 완덕자들에게는 서품식이 된다. 콘솔라멘툼은 죽음에 임박해서 행해진다. 의식은 요한복음을 낭독하고 기도문 복되도다, 성부를 경배합니다Benedictus, Adoremus pater’를 암송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일 죽어가는 카타리교도가 콘솔라멘툼을 받은 후에 회생한다면 완덕자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카타리파 교도들은 일생을 통해 단 한번의 콘솔라멘툼을 받게 되는 데 그것은 죽음에 임박해서이다. 카타리파들은 그들의 예배 장소가 따로 없었다. 카타리 교도들은 가르침의 장소인 그들의 집이 있을 뿐이었다. 이 만인의 집은 개방되었으며 특별한 장식이나 조각이 없었다.

1244316210명에서 215명 사이의 카타리 교도들이 카타리파 주교 베르트랑 마트리Bishop Bertrand Marty의 인도 아래 성을 떠나 아래로 내려왔다. 이들은 화형주火刑柱도 원하지 않았다. 이들 모두는 자발적으로 장작더미 속으로 들어가 똑바로 선 채로 불길 속에 자신을 맡겼다. 이들이 화형된 후 성 안의 나머지 사람들은 떠나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들 가운데는 성의 방어 사령관이었던 라몽 드 페레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후로 여기에 전설이 개입하게 된다. 카타리 교도들이 투항하기 전에 몇몇 완덕자들이 카타리파의 보물과 서적을 가지고 성을 탈출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1249년 툴루즈 백작 라몽 7세가 사망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파리 조약에 따라 루이 9세의 동생인 푸아티에의 알퐁스가 툴루즈 백작의 작위를 승계하였다. 이로서 프랑스 남부 지역은 외형적으로 평화를 찾게 되었다. 로마 교회와 프랑스 왕은 자신들이 의도했던 바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카타리 이단은 완전히 근절된 것이 아니었다.

1256년 카타리파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케리비 성Château de Quéribus이 함락되었다. 코르비에르 산맥 Corbières mountains 해발 728미터 정상에 서있는 이 성은 카타리파의 마지막 근거지였다. 이 성은 몽세귀르가 함락되자 생존한 카타리파들이 아라곤 국경 근처인 이곳으로 모여와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255년 프랑스 군대가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몰려오자 카타리 교도들은 싸움을 하지 않고 스페인의 아라곤과 북부 이탈리아의 피에몬테Piemonte 지역으로 도피하였다. 이 지역은 카타리 신앙에 관대한 지역이었다. 또한 이 지역은 옥시탄 언어Occitan language 사용권이었다. 케리비 성은 이른바 카르카손의 다섯 아들들Five Sons of Carcassonne 가운데 하나인 성이었다. 이 다섯 성은 아귈라Aguilar, 페이르페르튀즈Peyrepertuse, 테름므Termes와 퓔오렝Puilaurens이다. 이들은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국경을 방어하는 중요한 다섯 성채였다. 1659년 피레네 조약Treaty of the Pyrenees으로 국경선이 이동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루시옹Roussillon과 페르피냥Perpignan을 얻으면서 국경선이 남으로 이동하였다.

케리비 성의 함락으로 남 프랑스의 고지대와 오크 지역의 영주들의 영지를 장악함으로서 프랑스 왕은 비로소 이 지역의 패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1270년 성왕 루이Saint Louis가 사망하였다. 1226년 즉위하여 44년간 프랑스를 다스렸던 루이 9세는 부친으로부터 경건한 신앙심과 격렬함을 물려받았다.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십자군도 2번이나 참전한 루이 9세는 존엄왕 필립이 추구했던 강력한 프랑스를 위해 헌신하였다. 루이 9세가 사망했을 때 그는 자신이 상속받은 것보다 훨씬 위대한 왕권을 아들에게 물려주었고, 이때부터 카페 왕가의 왕은 세습 군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왕은 자신의 의사에 따라 최고회의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 무엇이든지 집행할 수 있는 신의 직계 대표자로 생각하게 하였다.

1271년 툴루즈 백작 푸아티에의 알퐁스가와 툴루즈 백작의 무남독녀인 잔느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랑그독은 합법적으로 프랑스 왕의 영지로 귀속되었다.

1275년 경이 되면 프랑스에서는 더 이상 카타리파 주교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교회와 프랑스 왕의 합작으로 시작된 알비 십자군 운동은 서로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군사적 권한이 없는 교회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나 독일 제후, 프랑스 왕이나 잉글랜드 왕, 로렌 공작이나 부르고뉴 공작의 군사력을 이용해 프랑스 남부의 카타리파를 일소하였다. 반면 프랑스 왕은 교회와 합작으로 프랑스 남부를 자신의 영지로 삼을 수 있었다. 대신 프랑스 남부는 사회적 대청소를 당함으로서 독립적인 지위를 영원히 상실하였다. 이 알비 십자군이 프랑스 남부에는 재앙이었을지 모르지만 중세사회를 재건하는데 일조를 하였다. 교회는 40일 간 이교도와 싸우는 십자군 봉사를 한다면 모든 죄를 용서한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였다. 이 제안은 그동안 교회의 가르침을 어긴 영주들을 교회로 끌어들이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즉 교회는 군사력을 제공받는 대신 죄의 용서를 통해 봉건영주들의 사회적 명망과 위신을 회복할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이런 교회의 파격적인 제안에 응한 사람들은 중세의 봉건제도 속으로 안착을 하였다. 반면 이를 거부한 영주들은 교회의 반대편에 있어야만 했다. 이는 종교가 근간인 사회에서 큰 약점일 수밖에 없었다.

알비 십자군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프랑스의 필립 2세는 성직자와 부르주아 계층과 손을 잡은 최초의 국왕이었다. 프랑스 국왕은 철저한 실리 계산을 통해 알비 십자군을 조직한 반면 프랑스 국왕의 목표가 된 툴루즈 백작이나 아라곤 국왕은 카타리파 교도가 아님에도 북부 프랑스의 군대가 남쪽으로 진격함에 따라 이에 대한 반발로 카타리파에 가담하여 저항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는 남부의 카타리파를 응징하면서 이단심문을 동원하여 개인에게 주어진 신앙의 자유를 말살시켰다. 1229년부터 로마교황청은 중요한 도시마다 도미니코회 수도자 2명으로 구성된 법정을 2명의 심문관들은 이단의 색출을 위해 일반조사와 개인소환이란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였다. 일반조사란 지역 주민 전체를 모이게 한 다음 개인적으로 공술서를 쓰게 하는 것이었다. 개인소환이란 용의자를 법정에 소환하여 엄격한 선서를 하게 한 다음 개인이 알고 있는 이단에 관한 모든 것을 진술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가혹한 물리적 방법이 사용되었음은 불문가지이다.

1321년 이탈리아에서 최후의 카타리파 주교가 체포되었다. 이탈리아 지역의 카타리파는 프랑스보다 더 오래 존속했지만 이를 기점으로 더 이상 카타리파는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1326년 카르카손에서 프랑스 최후의 카타리파 교도가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몽세귀르Montségur:1243-1244(3) 中世資料

몽세귀르Montségur 전야前夜

1209년 시몽 드 몽포르Simon IV de Montfort가 이끄는 알비 십자군이 랑그독 지역을 침입하여 베지에와 카르카손을 함락시키고 1244년 몽세귀르가 함락될 때까지 기간은 프랑스 남부지역에서 카타리파가 근절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덤으로 프랑스 남부지역 고유문화도 함께 사라졌다.

카르카손이 허무하게 함락된 이듬해 시몽 드 몽포르는 미네르브Minerve를 공격하였다. 미네르브는 몽타뉴 누아르Montagne Noire와 카날 드 미디Canal du Midi 사이에 있는 카타리 교도의 도시로 이 전해 베지에 학살 소식을 들은 카타리 교도들이 피난 온 도시였다. 알비와 카르카손의 자작이 된 시몽 드 몽포르는 6주 동안 이 마을을 포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시몽 드 몽포르는 4대의 투석기를 동원하여 3방면에서 미네르브를 공격하였다. 세스Cesse 강 골짜기 위에 자리잡은 미네르브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 마을은 이중의 성으로 둘러싸여있었고 미네르브 자작 귀욤Viscount Guilhem of Minerve의 지휘 아래 2백 명의 용맹한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다. 미네르브가 함락된 것은 이 요새로 흘러들어가는 식수원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미네르브가 항복하였을 때 가톨릭으로 개종改宗을 거부하는 카타리 교도 140명이 화형 당하였다.

미네르브의 이단을 척결한 시몽 드 몽포르는 카타리 교도의 성으로 알려진 남쪽의 테름므 성Château de Termes으로 방향을 틀었다. 카타리 교도인 라몽Ramon de Termes이 소유한 이 성은 가파른 벼랑 위에 건설되었다. 삼면이 절벽으로 방어되는 요새인 이 성은 시몽 드 몽포르가 4개월 간 포위공격을 시도한 끝에 함락시켰다. 이 성은 공격자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지만 건조한 여름과 가을을 지탱할 식수 저장 물탱크가 비게 되면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후일담으로 시몽 드 몽포르가 사망한 뒤 이 성의 전 소유주인 라몽이 성을 다시 찾으려 했지만 실패하였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 성은 프랑스 왕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랑그독 지역을 지배하던 툴루즈 백작은 852년부터 이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던 루아르그 백작Counts of Rouergue의 방계 가문으로 툴루즈에 자리 잡고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툴루즈를 통치하였다. 툴루즈 백작의 시작은 프랑크 왕국의 봉신封臣이었으나 얼마 안가 독립된 세력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툴루즈 백작 가문은 쿼시Quercy, 루아르그Rouergue, 알비Albi와 님Nîmes 때로는 셉티마니아Septimania와 프로방스 Provence까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들의 선조 가운데 라몽 4세 백작Count Raymond IV은 십자군에 참가하여 트리폴리 공국County of Tripoli을 세우기도 하였다. 툴루즈 백작 가문의 전성시대는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친 시기였다. 알비 십자군이 결성되어 이 지역을 공격하자 1229년 프랑스 국왕에게 굴복하였다. 워낙 저항이 격렬하였기에 프랑스 국왕이 이 지역을 실질적de facto으로 지배한 것은 1271년부터이다. 당시 알비 십자군에 대항하여 싸운 남부의 대귀족은 툴루즈 백작, 카르카손의 트랑카벨Trecavel 가문, 푸아 백작count of Foix , 코맹주 백작Counts of Comminges과 베아르 자작viscounts of Béarn 등이다.

알비 십자군이 랑그독 지역을 공격하자 툴루즈 백작 라몽Raymond VI, Count of Toulouse은 격렬히 저항하였다. 라몽 6세의 외조부는 프랑스의 루이 6세이고 외삼촌은 프랑스의 루이 7세였다. 1194년 부친의 뒤를 이어 툴루즈 백작의 작위를 승계한 라몽은 방대한 영지를 소유한 만큼 통제에도 문제가 있었다. 라몽은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바쳐야할 의무를 지면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봉신으로 프로방스를 소유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의 헨리 2세는 부인을 통해 아키텐을 지배하면서 툴루즈 백작 기욤William IV, Count of Toulouse의 딸이며 할머니인 필리파 Philippa of Toulouse를 통해 툴루즈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였다. 아라곤의 알퐁소Alfonso II of Aragon는 아라곤의 새로 재정복한 영토를 식민지화하면서 이곳으로 이민을 장려하면서 랑그독 지역의 일에 간섭하였다.

툴루즈에서 라몽은 정치적 자치를 유지하면서 세금을 면제받고 자치 영토에 대한 그의 보호는 확대되었다. 당시 이 지역에는 카타리파가 많았지만 라몽은 이들에 대해 별다른 제제制裁를 가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태도는 교회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라몽은 카타리 이단을 믿지는 않았지만 카타리 이단에 대해 크게 억압하지도 않았다. 이는 그가 처한 정치적 상황에 따른 대처 방식이었다.

1213년 툴루즈 근처인 뮈레Muret에서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알비 십자군과 아라공의 왕이며 바르셀로나 백작인 페드로 2Pedro II de Aragón가 이끄는 군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페드로 2세가 전사하였다. 시몽 드 몽포르는 랑그독 지역을 침입하여 카타리 교도를 물리치면서 이 지역을 프랑스 왕에게 귀속시켰다. 오크 문명은 12세기 남프랑스와 스페인 북동지역, 이탈리아 서부지역에서 번성하였다. 이 지역은 랑그독Laguedoc, 아키텐l’Aquitaine, 가스코뉴Gascogne, 오베르뉴‘Auvergne, 리무쟁Limousin, 도피네Dauphiné, 카탈루냐Catalogne, 이탈리아 알프스 지역을 아우른다. 시몽 드 몽포르가 툴루즈 지역을 침입하자 툴루즈 백작 라몽은 쫓겨났다. 이에 라몽 6세는 자신의 매형인 아라공 왕 페드로 2세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페드로 2세는 이를 받아들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툴루즈 근교의 뮈레에서 시몽드 몽포르와 결전을 치뤘다. 페드로 2세는 우월한 병력을 유지하였음에도 패배하였고 자신도 목숨을 잃었다. 이 전투는 알비 십자군이 치룬 마지막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성 도미니코는 십자군을 위해 묵주기도를 받쳤다고 한다.

1215년 라테라노 총 공의회에서 이단 심문령을 채택하였다. 이 공의회에는 70명의 총대주교와 대주교, 4백 명의 주교들, 8백 명의 사제들과 수도원장과 평신도들이 참여하였다. 이 총 공의회에서 그리스도 국가에 대한 교황의 지도권이 선언되었다. 총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성변화聖變化 교리가 채택되었다. 성변화란 미사 중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성별하여 거양擧揚하는 순간,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이다. 두 번째는 서방교회가 동방교회에 우선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는 서방 교회가 전 세계 그리스도교의 대표자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세 번째는 세속권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주교는 정기적으로 자신의 관할구管轄區를 사목방문하도록 명시하였다. 네 번째는 사제들의 도덕성에 관한 것이었다. 여기서 교황은 사제의 독신을 지지하고 음주와 도박, 사냥과 사치를 금하였다. 다섯 번째는 성직세습을 금지하였다. 여섯 번째는 평신도는 일년 한번은 사제에게 고백성사를 보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사제는 신자들이 이단에 빠졌는지 알아보게 하였다. 일곱 번째는 교회가 이단으로 판정한 사람은 세속 군주의 법정에 넘겨 재판을 받도록 하였다. 교회가 이단으로 확정한 사람을 세속 군주가 처벌하지 않으면 파문하고 그래도 저항하면 교황은 군주의 신민들이 저항하도록 명령을 내릴 수 있게 하였다. 절대권력을 누리던 이노켄티우스 3세는 총 공의회 이듬해인 1216년 사망하였다. 그의 후임으로 호노리우스 3세가 선출되었다.

1218년 알비 십자군의 군사적 지도자인 시몽 드 몽포르가 툴루즈를 공격하다 사망하였다. 시몽 드 몽포르는 1213년 뮈레 전투에서 승리한 후 랑그독 지역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시몽 드 몽포르는 툴루즈 백작, 베지에와 카르카손 자작으로 임명되었지만 영주민들은 시몽 드 몽포르를 자신들의 영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툴루즈의 시민들은 1217년 전 툴루즈 백작 라몽 6세의 아들이며 정당한 상속자였던 라몽 7세에게 툴루즈의 성문을 열어주었다. 시몽 드 몽포르는 반란의 싹을 잠재우기 위해 저항의 머리인 툴루즈를 점령하려 하였다. 121710월 시몽 드 몽포르는 툴루즈를 되찾기 위해 포위 공격을 시작하였다. 아홉 달 동안 툴루즈를 공격했지만 시몽 드 몽포르는 이 도시를 점령할 수 없었다. 운명의 날인 1218625일 공격을 독려하던 시몽 드 몽포르는 성 안에서 발사한 투석기에서 날아온 돌에 맞아 즉사하였다. 그의 죽음을 기록한 연대기 작가에 의하면 날아오는 커다란 돌멩이에 맞아 눈과 뇌장腦漿, 치아, 이마, 턱 등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피와 더러움으로 얼룩진 채 땅에 떨어져 즉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시신은 자신이 점령했던 카르카손의 주교좌主敎座 성당인 생 나자레Saint-Nazaire에 묻혔다. 시몽 드 몽포르의 시신은 후에 아들인 몽포르 라모리Montfort l'Amaury가 이장하였다. 카르카손 주교좌 성당에는 시몽 드 몽포르가 묻혔던 자리에 묘지석이 붙어있다. 시몽 드 몽포르가 죽음으로서 알비 십자군은 정열적이고 탐욕스러운 위대한 군 지휘관을 잃었다. 이 죽음으로 알비 십자군은 5년 동안 소강상태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프랑스의 사자왕 루이Louis VIII the Lion1219년부터 1226년 계속된 군사작전 역시 실패하였다. 사자왕 루이는 툴루즈 백작 라몽 6세의 복귀를 허락하고 그의 아들 라몽 7세를 후계자로 인정하였다. 툴루즈 백작 라몽 6세는 그의 통치 지역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사자왕 루이는 1223년 즉위하여 1226년 사망하였다. 그는 부친인 존엄왕 필립Philip Augustus을 대신하여 알비 십자군에 참가하였다.

1221년 카타리 파 이단과 격렬하게 투쟁한 도밍고 데 구스만Dominic de Guzmán 수도자가 사망하였다. 그는 1234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성 도미니코의 후계자들은 앞으로 중세 유럽에서 이단 심문관으로 활약하게 된다.

1222년 푸아Foix 백작 라몽 로제Raymond-Roger와 툴루즈 백작 라몽 6세가 사망하였다. 라몽 6세의 뒤를 이어 라몽 7세가 작위를 승계하였다. 툴루즈는 여전히 이단인 카타리파에 관대한 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1223년 프랑스의 존엄왕 필립이 사망하고 왕세자인 사자왕 루이가 즉위하였다. 공식적인 이단 심문소가 설립되었다. 이는 교회와 세속의 왕권이 이단에 강력하게 대응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카타리파의 중심지역인 랑그독 지역으로 이단 심문관들이 파견되어 지역의 영주들과 마찰을 빚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지역의 영주들에게 이단에 강력하게 대응할 것을 요구하였다.

1224년 알비 십자군은 툴루즈에서 일시 퇴각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강력한 요구와 프랑스 왕국의 이익을 위해 새로 즉위한 사자왕 루이가 군대를 이끌로 툴루즈 원정을 실행하였다. 툴루즈가 완강히 저항하자 1226년 교회는 툴루즈 백작 라몽 7세를 파문하였다. 이듬해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사망하고 그레고리우스 9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레고리우스 9세는 강력한 교황이었던 이노켄티우스 3세 교황의 조카로 도미니코 수도회에 이단 심문권을 부여한 인물이다. 도미니코 수도자들이 가진 종교재판의 막강한 권리-사도적 권한-는 주교들의 권한과 마찰을 빚어 불만을 야기하였지만 교황은 도미니코 수도회를 끝까지 옹호하였다.

1227년 카타리파 주교 카스트르의 귈라베르Guilhabert de Castres는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카타리파가 장악하고 있던 성 가운데 하나인 샤토 드 피우스Château de Pieusse에서 일 백 여명의 카타리파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카타리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이 공의회에서 라세스Razes의 주교직을 설정하기로 결의하였다. 십자군 초기에 아젱Agen, 롱베르Lombert, 생 폴Saint Paul, 카바레Cabaret, 세르비앙Servian, 몽세귀르에 6명의 주교가 있었다.

1229년 툴르즈 백작 라몽Raymond VII, Count of Toulouse과 프랑스 국왕 루이 9Louis IX of France는 파리 근교 모Meaux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 루이 9세는 후일 교회로부터 시성諡聖되어 성루이라고 불린다. 당시 루이는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모친인 카스티야의 블랑쉬 Blanche of Castile가 조약 체결에 크게 관여하였다.

툴루즈 백작 라몽과 루이 9세는 모에서 만나 1209년에 시작된 알비 십자군의 공식적인 종결에 동의하였다. 두 사람은 라몽의 딸 조안Joan, Countess of Toulouse과 루이 9세의 동생인 푸아티에의 알퐁소Alphonse, Count of Poitiers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하였다. 툴루즈 백작 라몽의 유일한 후계자인 딸 조안과 결혼할 알퐁소는 주레 욱소리스Jure uxoris가 되면서 라몽이 사망하면 조안의 남편으로서 툴루즈의 지배자가 됨을 의미하였다. 이 조약을 체결하면서 라몽은 자신의 영지 가운데 동쪽 지방을 루이에게 프로방스 지역은 교황에게 양도하였다. 이 협약으로 옥시탄Occitania 지역의 정치적 자치가 종언을 고하였다. 옥시탄 지역은 오크어Lenga d'òc를 사용하는 지역을 말한다. 오베르뉴, 가스코뉴, 랑그독, 리무쟁, 프로방스 등지에서 사용하는 언어이다. 프랑스어의 yes”를 오크oc로 말하느냐 오일oil로 말하느냐에 따라 오크어와 오일어로 구분된다. 라몽 백작은 자신의 영지 반을 루이에게 양도하게 되었고 나머지 영지는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권리를 보유하게 되었다. 라몽이 사망한 뒤에 그의 영지는 사위인 알퐁소가 차지하고, 알퐁소가 사망하면 프랑스 국왕에게 영지가 귀속되게 되었다. 그리고 툴루즈의 성채城砦는 순차적으로 해체하고, 카타리파에 대한 정치적 보호도 철회하도록 하였다. 이 결과 이 지역의 카타리파들은 정치적 보호 세력을 잃게 되었다. 파리 조약의 결과 수 세기 동안 옥시탄 지역에 인정되었던 정치적 자치가 사라지고, 카타리파의 보호막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조약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프랑스 왕이었다. 그는 이 지역까지 자신의 통치권을 확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1232년 파리 조약 이후 남부 프랑스에서 카타리 이단에 대한 대대적인 척결작업이 전개된다. 이에 위기를 느낀 카타리파는 주교 카스트르의 귈라베르Guilhabert de Castres의 주도하에 몽세귀르Montségur로 들어가 거점을 형성하였다. 몽세귀르의 성채는 1204년 몽세귀르의 영주인 라몽 드 페레유Raymond de Péreille에 의해서 건설되었다. 몽세귀르는 카르카손 남서쪽 80에 위치해 있는데 랑그독 Languedoc과 미디 피레네Midi-Pyrénées 지역의 중간에 위치한 요충지로 피레네 산맥 남쪽 국경의 방어를 위해 요새화되었다. 해발 1,200m 산꼭대기에 건설된 몽세귀르 성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채城砦가 되었다. 몽세귀르 성은 랑그독 언어로 포그pog라고 부르는 암반 위에 건설하였다. 포그란 단어는 산꼭대기peak, 언덕hill, 산맥mountain을 의미한다. 몽세귀르Montségur는 라틴어 몽스 세큐루스mons securus에서 유래由來하였다. 뜻은 안전한 언덕/산이란 의미이다. 이 단어가 오크어로 흘러가 몽 세귀르mont ségur가 되었다.

재건축된 몽세귀르 성은 카타리파 이론가이며 주교인 카스트르의 귈라베르에 의해 카타리파의 본거지이며 종교의 중심지가 탈바꿈하였다. 1165년에 카스트르에서 태어난 귈라베르는 1193년 판야우스Fanjeaux에서 카타리파를 지도하였다. 1209년 시몽 드 몽포르Simon de Montfort의 무자비한 카타리파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자 귈라베르는 카타리파 성직자들을 안전한 샤토 드 몽세귀르로 철수시켰다. 귈라베르는 1223년과 1226년 사이에 카타리파 교회의 툴루즈 주교이자 가장 높은 지도자인 완전한 자Parfaits가 되었다. 그는 교황청과 카타리파 간에 신학적 논쟁이 시작되었을 때 카타리파를 대표하여 논쟁을 주도하였다. 1206년 몽레알Montreal에서 마지막 신학적 토론과 1207년 알비 십자군이 시작될 중간 시기에 귈라베르와 성 도미니코가 조우遭遇한 것으로 보인다.

귈라베르는 1229년부터 1232년까지 샤토 뒤드 베주 Château du Bézu에 상주하면서 박해와 위협 속에서도 랑그독 지역의 성과 마을을 사목 방문 하였다. 1232년 귈라베르는 몽세귀르의 영주인 라몽 드 페레유에게 의탁하였고, 라몽은 귈라베르에게 몽세귀르 성의 소유를 허락했으며 그곳에 카타리파 교회의 주교좌domicilium et caput가 자리잡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몽세귀르에 카타리파의 지도자들과 난민들이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귈라베르는 1240년 사망하였고 후임으로 베르트랑 마르티Bartrand Marti가 주교직을 승계하였다.

1241년 툴루즈 백작 라몽 7세는 몽세귀르 성채를 공략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듬해 라몽 7세는 또 다시 프랑스 국왕에 대항하여 반란을 시도하였다. 이 와중에 아비뇨네 지역에서 종교 심문관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들 종교 심문관들은 몽세귀르에서 파견된 카타리파 무장단원이었다. 이렇게 되자 1243년 베지에에서 공의회를 개최하여 몽세귀르의 이단을 완전히 박멸시키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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